산책일기2022. 8. 13. 22:25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여름부터 약 1년간 시간여행까지 더해 경기를 챙겨보면서도 생각지 못했던 여자 배구 직관. 티켓을 구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순천행을 자처한 드라이버가 있어, 되면 좋고 아님 말고 부담없이 예매를 시도했고 비지정석에 성공하였다. 운동 경기 직관은 88올림픽 때 반 전체가 관중으로 동원됐던 수구, 고등학교 때 친구들 분위기에 휩쓸려 갔던 농구대잔치가 전부였는데 지난세기의 일이어서 모든 것이 가물가물하다.

 

비지정석은 만석일 경우 입석 관람이 될 수도 있다는 납득할 수 없는 안내가 있었지만 거리도 있고 나이도 있어 무리할 수 없었으므로, 입장 시작 시간 도착을 목표로 2시간 전 집을 나섰다. 11시 20분쯤 도착해 주차를 하고 줄에 서기 위해 끝을 찾느라 경기장 전체를 한 바퀴 돌았는데, 꽉 차면 3천 석이 넘는다는 경기장 입장을 위해 늘어선 인파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꺼번에 본 가장 많은 사람들인 것 같다. 날은 찌는 듯이 더웠지만 입장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경기장에 들어서니 아직 좌석은 절반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김희진 선수를 보고 싶었고 D는 김연경 선수를 보고 싶어했기에 쿨하게 찢어져 각자 응원하는 팀 방향의 좌석으로 향했다. 중계를 보며 갖고 싶었던 IBK기업은행의 클래퍼도 챙기고, 가져간 책을 읽다 보니 개막식이라며 마술사가 등장해 공연을 했다. 관중석이 점차 채워지고 개막식이 끝난 후 웜업을 위해 선수들 등장, 오~ 내가 직접 김희진 선수를 보다니! 멀어서 그저 봤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했지만, 아무려나 신기했다. 1시간쯤 지나 경기가 시작될 즈음부터는 중간중간 하나씩 비워져 있던 좌석도 채워지기 시작했고, 내 옆에는 또래 일행들과 주변의 빈 자리에 띄엄띄엄 자리잡은 60대 아저씨가 앉았다.

 

경기가 시작되자 박수와 응원을 유도하는 응원단장의 몸짓과 관중의 함성, '성격 좋은' 옆 자리 60대 아저씨의 팔 툭툭 침을 동반한 대화 공세, 비어 있던 바로 옆 계단에까지 앉은 사람들로 답답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난시즌 주전으로 나서지 못했던 선수들의 플레이에 이름을 연호하는 응원은 뭔가 벅찬 느낌이 들었지만, 잠시의 적막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테크니컬 타임아웃 때마다 댄스 이벤트를 고지하고 극E로 추정되는 이들의 격렬한 춤사위를 카메라에 잡고 도드람한돈을 선사하는 반복은 견디기 힘들었다. 나름 경기에만 집중하고자 애썼지만 조용히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경기장에서 제맘껏 떠들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수다와 함성은, 있지 않았으면 좋을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배가시켰다.

 

프로 선수들의 플레이에 말을 얹을 입장은 못 되지만 지난시즌 여자 배구 거의 전 경기를 지켜보았던 자로서, 경기 내용은 그저 그러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세터 김하경 선수와 아웃사이드히터 표승주 선수의 국가대표 차출 영향이 크겠지만, IBK기업은행 선수들의 플레이는 빈 구석이 많아 보였고 전반적으로 결정력이 너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박민지 선수나 최정민 선수의 선전은 반가웠지만 기대했던 김희진 선수의 파워풀한 플레이는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지난여름 여자 배구를 보기 시작하며 선수도 팀도 전성기였던 시절의 IBK기업은행 경기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IBK기업은행이 나름의 준비를 확인하며 승리하길 바랐지만, 여자 배구씬에 향하는 관심과 주목의 절반 이상을 짊어진 김연경 선수의 복귀 경기 승리도 괜찮은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난 후 기사를 보니 흥국생명 선수들은 부상과 코로나19 확진 때문에 가용 인원 8명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더욱 박수 받을 만한 경기였다고 생각한다. 축하합니다-

 

난생처음 여자 배구 경기를 직관하고 가장 강력하게 느낀 것은 고마운 줄 모르고 보았던 중계의 소중함이다. 멀리서나마 선수들을 직접 보는 것도, 토랑이의 똘아이짓을 직접 보는 것도 나름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자생적 열기에 끊임없는 응원 유도가 더해진 경기장 분위기는 나로서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 일정 구간 앞서가는 IBK기업은행 알토스 배구단 버스를 보며, 오는 시즌에도 방구석에서 열심히 지켜보겠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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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