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연예인 J에게 푹빠지고 톡톡 튀는 개성으로 성덕이 된 여중생은 세월이 흘러 다큐 감독이 된다. 첫 기차, 첫 방송 출연, 첫 외박, 그리고 또 수많은 처음들. 인생의 많은 처음에 J가 있었고, 사인회에 한복을 입고 찾아가 눈길을 끌고 그가 주인공인 방송 프로그램에 덕후의 대표격으로 출연했던 감독은 팬덤 내의 유명인사였다고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에너지의 덕질로 일찌감치 스타의 기억에도 각인됐을 감독은, 그가 싸인하며 적은 글귀대로 열심히 공부해 전교 1등을 되찾고 서울의 한 대학 영화과에 진학한다. 그리고 청소년기를 올인했던 J가 성범죄자가 된 후, 그를 좋아했던 팬들과 누군가의 덕후였던 팬들 그리고 미처 몰랐으나 비슷한 처지임이 확인된 조감독 등 소위 우상의 추락과 충격을 경험한 이들을 인터뷰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낮게 울려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궁서체로 쓰인 커다란 제목이 줌아웃되는 인트로, 영화가 시작되는 곳은 창원 어딘가에 있다는 성덕사다. 감독의 첫 번째 내레이션은 "나는 정준영의 팬이었다." 성범죄자가 된 연예인을 사랑했던 감독은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전국의 성덕사를 찾아보고, 그곳에서 촬영을 시작했다고 한다.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을 감독이 후에 성범죄자가 된 연예인을 좋아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게 안타깝지만, 실제 사건의 무게와 개인에게 미쳤을 엄청난 영향에 비해 웃프고 발랄한 영화의 분위기를 인상적으로 예고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다큐 촬영을 결심한 계기는 J의 범죄 사실이 알려지고 유죄가 확정되고 수감되고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도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팬들의 존재였다는데, 탈덕한 감독의 시선은 범죄자에 대한 팬심을 유지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성찰에 무게를 둔다.
다큐에는 J뿐 아니라 성범죄를 저지른 여럿의 남성 연예인들과 그로부터 상처받은 팬들이 등장한다. 한동안 사회면을 요란스레 장식하며 추락한 스타를 사랑했던 팬들은 배신감과 실망을 넘어, 그들이 몰입했던 마음과 시간 그리고 추억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훼손을 감내한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을 것이고 차츰차츰 밝혀지는 사실들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왜 그런 사람을 좋아했는지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SNS나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등을 통해 보여지는 연예인의 모습은 아무리 진실되게 느껴진다고 해도 연출에 가깝고, 이미 기울어진 마음은 고도의 이미지메이킹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게 아니라도, 누구도 타인이 드러내지 않거나 감추려는 이면을 알 수 없다는 걸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범죄자로 밝혀진 연예인을 마음을 다해 좋아했다는 것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자신의 스타를 옹호하며 2차 가해를 벌이지 않는 이상, 팬 역시 스타의 범죄에 있어 피해자다. 파렴치한 성범죄가 밝혀지며 탈덕한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명백한 범죄 사실이 확증되었음에도 자신이 몰두했던 대상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심리를 알기 위해 감독은, 박근혜 지지자들의 시위 현장에 찾아가 목적을 숨긴 채 참여 관찰을 하고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엽서를 쓴다. 누구에게나 내 덕질은 특별하지만, 대상이 누구든 덕질의 기저를 이루는 감정과 메커니즘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스타와 팬이라는 일 대 다의 일방적인 관계에는 구체적이고 상호적인 감정과 일상적 교류가 불가능하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만, 그 공허는 팬들간의 공감대와 일체성으로 메워진다. 불특정다수의 팬덤을 향한 스타의 메시지는 팬심이라는 마법의 스펙트럼을 거쳐 개별화되고, 팬이 스타에게 있어 자신의 고유성을 체감하는 드문 순간은 한없이 증폭되어 덕질에 가속을 부여한다. 이 모든 것이 실체 없이 허망한 감정 놀음 같기도 하지만, 덕질과 팬심을 그렇게 치부한다면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 역시 그러할 것이므로 덕질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지속되는 사회 현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감독은 J를 비롯해 비슷한 시기 성범죄로 물의를 일으킨 남성 연예인들의 팬들 여럿을 인터뷰하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낸다. 배신감에 비난을 퍼붓는 이도 있고 스타의 범죄가 미치는 비가시적이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성찰하는 이도 있다. 가장 인상적인 건 굿즈 장례식을 하면서 단호했던 마음에 균열이 일고 의외의 양가적 감정을 느끼며 혼란스러워 하는 감독의 모습이었다. 겪지 않았다면 좋았을 성장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때의 개인적 몰두만은 아닌 덕질과 팬질의 사회성이 환기되는 부분이라고도 생각됐다. 기부나 챌린지 등을 통한 '선한 영향력'의 확산이 연예 활동의 클리셰가 된지 오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연예인 개인이 단죄되고 매장되면 그뿐 범죄가 갖는 다층적인 파장을 주목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상처와 혼란 속에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오가는 당사자인 감독 그리고 유사한 경험과 공감대를 가진 인터뷰이들의 목소리가 반가웠고, 사실상 평생 덕질 중인 내 마음을 비춰볼 수 있었다.
센스와 유머가 상당한 감독의 영화는 자주 웃음을 선사했는데, 아프고 상처받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돌아보는 일이 꼭 우울할 필요는 없다는 점 그리고 몰두했던 오랜 시간과 아름다운 기억 모두가 그 대상으로 인해 무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누군가를 인생의 전부인 듯 사랑한다 해도 누구나 별개의 인간일 수밖에 없고, 한 사랑의 배신과 실망이 다음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 조민기를 좋아했던 엄마를 인터뷰한 부분도 좋았는데 밤에 일하느라 혼자 잠들어야 했던 겁 많은 딸을 걱정하던 시절 J 에게 고마웠다는 말도, 거제에서 만난 친구가 후회하지 않는 방법은 고인을 좋아하는 것뿐이라며 정약용을 언급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죽은 사람만이 변치 않는다는 걸 깨달은 사춘기 시절 이후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말이다. 영화는 어떤 면에서 유쾌한 씻김굿 같은 느낌도 들었고 결국 다다른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성하기를 바란다. 죽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만큼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공감이 됐다. 좋은 영화였고, 엔딩타이틀에 등장한 유일한 삽입곡 “박근혜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때문에 마지막에 한 번 더 웃었다.
10/9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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