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0. 2. 4. 14:2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20년 첫 영화를 실패했는데 설날 본 <페인 앤 글로리>가 참 좋아서 음력 첫 영화로 임명 :)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오랜만인데... 강렬한 색채감은 여전했지만 예전 영화들에서 느꼈던 도발적이고 악동스러운 느낌 대신, 수십 년 전 인연과 기억 들이 되살려주는 삶의 의미를 차분히 재현하는 영화 인생의 관록이 실감됐다. 젊었을 때 봤다면 이렇게까지 몰입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 이만큼 사니까 공감이 되네 싶어 반가운. 그러고도 은은한 잔상이 남아 다시 한 번 보니, 또 새롭고 좋더라.


영화에는 다차원의 시간이 중층적으로 존재한다. 재밌는 건 살바로드의 회상으로 재현되는 많은 부분이, 심신의 고통을 딛고 영화작업을 재개한 “첫 번째 열망”의 장면들이라는 것. 영화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시간’이라고 관객들이 믿고 보는 현재가 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고, 영화 속이 아닌 실제 엄마와의 경험을 회상하는 장면들은 대과거가 될 수도 있겠다. 더욱 재밌는 건, 이런 중층적 시간들의 실체를 관객들은 사실상 마지막 씬에 가서야 알아챌 수 있다는 것. 처음 봤을 때는 중년과 노년 어머니의 싱크로율이 너무 떨어져 의아했던 의구심이 해소되고 깜찍한 반전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이런 시간들의 비균질적인 배치와 교차는 꽤 공들여 설계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어졌다.


스토리를 끌어가는 주요 서사는 크게 성공했지만 영화를 만들 수 없을 만큼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살바도르의 인생 그리고 32년 전 영화 <맛>의 감독과 배우로 만나 작업 중의 불화로 연을 끊고 지냈던 살바도르와 안토니오의 에피소드이지만, 어쩌면 살바도르의 삶에서 유일한 사랑이었던 페데리코와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하다. 어떤 암시나 복선도 없이, 그야말로 갑자기 등장해 깊은 인상과 감정을 일깨워주는 둘의 이야기에 나는 처음에도 두번째에도 마음이 일렁였다.

“당신은 항상 옳아. 늘 그렇듯이.” 사랑만으로는 부족해 구원할 수 없었던 상대를 삼십여 년만에 만나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인생이라니. 눈물이 그렁그런한 채로, 그러나 애틋한 재회를 정제된 이별로 미무리하고 살바도르는 고통을 잊기 위해 의탁했던 헤로인을 버리고 의사를 만나고 “첫 번째 열망”의 집필을 시작한다. 영화를 만들 수 없다면 의미 없다고 놓아버렸던 삶이, 젊은 날 사랑만으로는 구할 수 없어 떠나보낸 인연과 함께 다시 돌아온 것이다. 

헌데 살바도르의 부서진 삶을 구하는 것이 그만은 아니다. 가난한 집에서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신학교에 진학했지만 합창단의 솔로이스트로 발탁되어 어떤 수업도 시험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노래만 불러야 했던 어린 시절, 읽고 쓰고 가르치기를 좋아했던 소년은 성장해 영화감독이 된 후에야 학교에서 배워야 했던 것들을 경험과 몸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글을 모르는 석공이자 화가였던 청년 에두아르도에게 글자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중 닥쳐온 강렬한 경험, 바로 그 순간을 담은 그림이 반 세기를 건너 살바도르에게 마침내 전해진다. 수소문을 할 엄두도 낼 수 없는 긴 세월을 돌아 결국 주인을 찾아온 그림과 편지는, 홀로된 어머니를 떠나 마드리드에 머물며 페데리코와 사랑에 빠지는 청년 살바도르의 이야기와도 유기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첫 번째 열망”에 고스란히 담겨, 오랜 무력감과 우울감에서 어렵사리 빠져나온 살바도르에게 새로운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내 기억 속의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숱 많은 머리를 뒤로 묶은 다소 느끼하고 과도하게 건강미 넘치는 마초스런 이미지였는데, 이 작품에서 그의 눈빛과 몸짓은 섬세하고도 유약해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성장하며 감수해야 했던 아픔과 끝내 구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사랑의 고통, 영화만을 부여잡은 외로운 일상, 그러나 더 이상 영화를 계속할 수 없는 절망적 상태와 긴 우울. 그 모든 감정을 담은 깊은 눈빛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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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