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1:40


낭만적이지만 가벼운 제목에 끌리면서도 괜히 탐탁하지가 않았다. 이제는 꽤 많아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오면 반가운 '동유럽' 여행기. 게다가 저자의 이름은 내가 꽤나 좋아하는 노래하는 이와 동명이인이다. 제목만큼이나 다감한 책표지도 살짝 마음에 들기는 했다. 제목이며 표지가 내겐 너무나 현혹적이어서 괜스레 미덥지 않은 마음 약간만 빼면.
 

사실 사놓은지 꽤 지났다. 벌써 훌쩍 4년 여가 흘러버린 첫번째 배낭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감히 네이티브와의 대화가 가능해질 때 다시 비행기를 타겠다는 얼토당토 않은 다짐에 부풀어있었다. 물론 마음만, 여지껏도 마음만. 하지만 이런 책을 다시 읽으면 나도 모르게 또다시 가슴 한쪽이 부풀어오르며 문자해독의 아무런 장애없이 지구별 어느 하늘 아래를 활보하는 내 모습을 꿈꾼다. 그렇다, '꿈'꾼다. 이번 겨울에는 유난히 국경을 넘는 지인들이 많았다. 가벼운 여행이거나 지난한 여행이거나 불안한 유학이거나를 막론하고 나는 또 무작정 그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before sunset', 고즈넉한 파리의 거리와 밤마다 잠드는 귓전을 파고드는 목소리 덕에, 현실을 생각하면 어림도 없지만 내 마음은 자꾸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지난 새벽 뽑아든 책이 바로 '황금소로에서 길을 잃다'.
 

외국 배낭여행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소위 전문 여행가라는 사람의 수도 적지 않으며, 그들이 내는 갖가지 여행서들이 넘쳐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들 중에 낯선 땅으로 향하는 나만의 취향에 온전히 맞춤한 책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이 책도 큰 기대없이 그저 어디론가 가고 싶어 죽겠는 새벽, 내가 좋아하는 '동유럽' 이야기라도 읽으며 위안을 삼아 보고자 펼쳐든 것이었다. 한편으로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으로 불만스러웠던 감성적인 제목, 동유럽의 수많은 길들 중에서 하필 카프카의 '황금소로'를 꼭 집어낸 그 제목에 대한 마음의 시비는 사실 유치한 시샘이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유일한 나의 힘인 질투를 가라앉히고, 순수하게 그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전문여행인이 된 저자가 아내와 함께 한 2002년의 동유럽 여행기가 전편, 그리고 직장생활을 접고 떠돌기 시작할 무렵 삼심대 중반의 고독하고 가난한 여행자였던 사내의 1992년 동유럽 여행기가 그 다음이다. 내가 느끼는 여행기의 재미는 저자가 전해주는 견문의 폭보다는 저자의 감상과의 만남이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나 사실의 전달은 굳이 여행기가 아니라도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에 나는 글 쓰는 이의 마음 가닿는 곳이 어디인가에 관심을 두는 편이다. 이 책으로 처음 만난 이지상이라는 여행가는 평범 속에서 발견하는 비범과 사소함 속에서 발견하는 특별함에 깊이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자신이 걷는 땅의 역사와 그곳에 사는 인류의 내력에 대한 이해로부터, 지금 여기의 모습을 바라보며 낯선 곳에서 펼쳐지는 일상 속에서 묻어나는 사람의 정취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여행자의 발걸음을 견인하는 것은 소시적 몰두했던 예술과 인문학에 대한 매혹의 기억이며, 조용히 방랑하는 자의 우울과 낭만은 흐르는 세월에도 녹이 슬지 않은 것 같다.
 

그의 글은 참으로 편안하다. 하지만 너무나 무난하다 싶으리만치 자연스럽게 읽히는 중에 느껴지는 인간미가 보통이 아니다. 가슴으로 세상을 돌아본 자의 겸허함이 속속들이 배어나고 자신이 밟은 땅과 마주친 인연들에 대한 이방인의 조심스러움이 가득하다. 한편 넓고 깊은 경험 속에서 농익은 여행자의 예리함과 세상에 대한 통찰 또한 무르지 않다. 공히 비극적인 현대사를 간직한 땅이어서 더욱 그러했겠지만, 그는 땅과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이 지나친 많은 것들에 선의를 가질 줄 아는 참 착한 여행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10년의 시차를 두고 걸어온 길은 이미 한 번은 스쳐갔던 기억에 대한 아스라한 확인이자 그 길을 지나쳤던 그 옛날 자신의 모습에 대한 조용한 반추가 된다. 그 많은 곳을 떠돌고 떠돌면서도 여전히 침착하고 조용한 여행자, 돌고 돌아온 현실과 일상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생활자인 그를 꽤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덮은 새벽, 나는 언제가 될 지 모르는 훗날의 떠남을 꿈꾼다.


2005-02-20 02:01, 알라딘



황금소로에서길을잃다
카테고리 여행/기행 > 기행(나라별) > 유럽기행
지은이 이지상 (북하우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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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