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1:38


차라리 바람을 따라 휘돌고 싶었다 / 떨어져나간 이파리들을 보는 일들 / 탐탐히 마주하던 정인을 잃고 / 위탁받은 생애는 부담스럽고 / 마음먹은 꿈들도 번번이 거미줄에 걸렸다  -  '다른 아침' p144 <사랑>
 

오랜만에 마음 먹고 침대맡 독서에 들어갔다. 마침 마음은 이유없이 우울하였고, 무언가 하염없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글들에 눈길을 주고 싶던 새벽이었다. 분홍과 백색이 따스히 만나 어지럽게 교차하는 표지에 흐르듯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있다. 출간 소식에 반가움이 앞서 받아들고는 내내 마음이 어지러워 차마 손길을 주지 못하고 침대맡에 고이 모셔두었던 '사랑'.  남녘 길가의 작은 교회를 떠나 어느 산골 깊숙한 곳에서 고요히 지낸다는 임의진 님의 책이다.
 

임의진이라는 존재를 알고난 후 나는 그가 낸 거의 모든 책들과 음반을 읽고 들으며 가없이 위로받았다. 지금에야 그저 그런 일도 있었다,고 담담히 말할 수도 있는 한 때, 삶이 아닌 채 살고 있던 인생의 나락에서 나는 그의 글을 처음 읽었고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은 여행에서 그를 만났다.
 

세상으로부터 너댓 가지의 수식어로 소개되는 그는 한 마디로 예술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예술가의 영혼을 천형으로 부여받은 성직자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도 않고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를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과 열정과 천재를 신에 대한 사랑으로 침잠시키고 두 팔 벌려 그를 맞이할 세속을 무연하게 떠난 외롭고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이다.
 

한없이 아프고 싶고 한없이 울고 싶고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나고 나면 그저 한 시기의 몸살이라고, 누구나 겪는 사춘기 시절의 감상이라고,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성장통이라고, 그런 시간을 겪고나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견디며 자라왔다. 하지만 인생이 언제나 그토록 열병인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그들처럼 바람을 따라 휘돌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고, 위탁받은 생애가 부담스럽지만 묵묵히 살아나간다. 가슴 안팎을 떠도는 오만가지 사념들을 한 줄의 글로 남길만한 여력도 없이 생활은 매일같이 다가와 어김없이 나를 두드리고 영혼은 외로울 겨를도 없이 존재를 감춘다.
 

나는 언젠가부터 시를 읽지 못한다. 까닭 모를 조급증에 사로잡혀 시집을 펼쳐도 한 줄 한 줄 시심에 빠져들지 못하고 마음이 번잡하다. 이 책을 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음 먹은 스탠드 불빛 아래의 독서건만, 행간을 좇는 두 눈이 무색하리만큼 머리 속에는 갖가지 잡념들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영혼과 사랑을 들먹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이값을 떠올리게 되는 나이의 나. 저만치 가는 사람들의 발자욱을 바라보는 눈에까지 마음의 허덕임이 느껴지고 좁은 마음에 다 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빛처럼 빠른 나의 시간들을 가로질러 휑하니 떠나버리는 느낌.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을 바라지도 않건만, 언젠가부터 나는 갈수록 좁아지는 마음의 통로에 결국엔 스스로 갇혀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했다. 가진 사랑이 너무나 커서 그 영혼의 울렁임을 감당할 수 없어 홀로 고요히 잦아든 한 사람이 온 맘으로 온 몸으로 써낸 시들의 이름이라고 했다. 세상이 주는 대로 나이는 먹어 일찍도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내 속의 마음 하나도 불감당이라 어찌할 수 없는 내게, 오랜만에 조우한 그는 사랑,이라고 했다.


2005-02-14 04:30, 알라딘



사랑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임의진 (샘터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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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