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알리바이2021. 6. 22. 23:19

 

 

서울에서 진행되는 책 모임을 주말에 듣는 강의가 겹쳐 두 번이나 빠지고 지난 달에 줌으로 함께했는데, 다음엔 한 번 오라는 동료들의 지나가는 말에 마음이 동했다. 마침 6월까지 써야 할 영화 쿠폰들이 있었고, 보고 싶은 영화들도 있었고, 스타벅스 쿠폰도 있었고.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 해야 하는 재택 알바를 60% 가까이 완료하고 났더니 좀 진이 빠지기도 해서 후반부까지 잠시 쉬며 환기를 해야겠다 싶기도 했다. 어떤 주제에 대한 1천 개가 좀 넘는 판결문을 텍스트로 정리하는 작업인데 백수 주제에 어찌어찌 굴러들어온 알바를 다행이라 여기며 임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판결문이다 보니 알고 싶지 않은 사연들이 넘쳐 난다. 동물을 괴롭히는 이들은 아이를, 여자를 괴롭히고 괴롭힘이라는 말로는 모자랄 잔인한 사건들도 많은데 그에 대해 적나라하게 기록된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다 보니 때로 구역질이 날 것 같고 몇 번은 악몽도 꿨다. 역시 남의 돈 벌기 쉽지 않다. 


 


그러하여 6월은 부산영화여행 대신 수도권여행으로 결정하고, 집은 무민과 비틀즈오빠들과 식물들에게 맡기고 20일 [헝거] 책 모임을 중심으로 앞뒤 며칠을 붙여 다녀왔다. 토요일에 수원 터미널에 내려 롯데시네마 수원점에서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을 보는 것이 여행의 시작, 롯데시네마에서 영화 많이 봤다고 발급한 무료쿠폰이 통영점에서는 사용불가여서(어이리스) 약간 오기로 시간을 맞춰 보았는데, 별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지 의외로 괜찮았다. 돌아다니는 시간대에는 늘 인적이 드문 통영을 벗어난 지 몇 시간 만에 복작이는 사람들 틈을 지나 영화관으로 가는 길은 약간 벙벙한 느낌이었는데, 한적한 극장 안의 어둠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번의 숙소는 의왕, 안양에도 몇 년 살았었는데 처음 가보았고 역사와 가까운 시장 골목을 지나면 나오는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지인의 신세를 졌다. 재래시장은 잘 정비가 되어 있었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주말 저녁 거리를 지나고 있을 사람들의 풍경은, 통영에 살다 보니 거리의 활기가 낯설어진 내게는 반갑기도 하고 이채롭게도 보였다.

다음 날은 서울에서의 책 모임, 저자의 이름과 제목은 익숙했던 책을 여러 감정 속에 읽었는데 (일관된 주제가 없고 내용을 이끌 수 있는 안내자가 없으며 책을 다 읽지 않고 참여하는 성원도 있는) 우리 모임의 특성이 빛난 시간이었다. 일관된 주제가 없으니 깊이가 더해지지 않고 안내자가 없으니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오가고 모두가 책을 다 읽은 것이 아니므로 온전하게 책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가 어렵다는 말, 짧은 감상이라도 정리해보려고 하는데 포스트는 만들어뒀지만 잘 마무리가 될지 모르겠다. 오전 11시였는데 점심 식사를 겸한 모임이어서 조금 늘어졌고, 간만의 서울행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약속을 잡은 터라 나는 먼저 나왔다. 목적지는 길상사,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에만 두고 있다가 서울을 떠날 때까지 미지의 장소가 되어 아쉬웠는데 흔쾌히 받아준 지인 덕분에 처음 가볼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의 유골이 모셔진 곳이기도 하지만, 젊은 날 백석 시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 님의 시주로 지어진 절이라는 것 때문에 궁금했었다. '나타샤'의 진실은 죽은 시인만이 알고 있겠지만 반 세기가 흐른 뒤에도 그 마음을 유언 삼을 수 있는 사랑이라니, 도저하고 놀랍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이 부럽다. 

 

 

 


마음의 흔적을 따라 세워진 곳이라선지 둘러볼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너무 넓거나 화려하지 않고 나무들이 우거진 오솔길이 적당해서 녹음 짙은 계절의 고즈넉한 산책으로 좋았다. 동행한 지인은 지난여름 일을 그만둔 직후 해방촌과 이태원에도 함께했었는데 그곳은 행복했던 내 학창시절의 공간이었다. 그날은 퇴근한 지인과 해방촌에서 만나기로 하고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에서 영화를 본 후 좀은 낯선 길로 해방촌까지 걸었다. 여름이라 더웠지만 오랜만에 학창시절 오가던 남산순환도로와 남산도서관을 지났고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해방촌 곳곳을 홀로 걸으며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짧은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길상사에서 내려와 명동에서 지인과 이름이 같은 감독 겸 주인공이 나오는 다큐 [까치발]을 보고 두끼떡볶이의 마지막 손님으로 배부르게 늦은 저녁을 먹은 후 헤어졌다. 누군가를 만나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혼자가 편하지만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였으면 싶고, 그럼에도 각별한 마음의 장소에 누군가를 청하는 건 때로 고민스러운 일이 된다. 해방촌과 길상사를 기억할 때 함께 떠오를 지인에게 고맙다.

주말을 알차게 보내고 월요일과 화요일은 오롯이 영화를 위해 남겨두었다. 월요일은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에서 [#위왓치유]와 [혼자 사는 사람들]과 [롤라]. cgv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 건 알라딘에서 매월 하나씩 주던 맥스무비 쿠폰을 cgv로 바꾼 후부터다. 대자본에 휘둘리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무려 4,000원이 할인되므로 무시하기 어려웠고, 2017년 1월 대학로에서 누군가와 [너의 이름은]을 본 게 시작이었다. 할인쿠폰을 사용하려고 앱을 깔았더니 신세계가 펼쳐졌는데 영화 한 편 볼 때마다 꽤 적립되는 포인트와 무엇보다 아트하우스 클럽이었다. 전에는 일에 바빠 영화를 자주 못 보기도 했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유일한 돌파구 삼으며 아주 가끔 시내의 시네마테크에 가는 게 전부였는데, 마침 몇 년째 일하며 누적된 만성피로와 만나니 시너지가 장난 아니었다. 일에 지칠 때 잠시나마 다른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는 역시 영화만 한 게 없었고, cgv 아트하우스관은 시내 곳곳에 산재한 두어 시간 동안의 소도가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 5개 관이 모두 아트하우스관이 된 후로, 대자본 대기업을 향한 부정적 인식에서 cgv 아트하우스만은 제외하기로 혼자 마음먹었다.

일요일의 [까치발]도 cgv명씨네에서 보았지만 영화를 즐기지 않는 지인에게 나의 마음을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이므로 아무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극장 입구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내부의 [마티아스와 막심]을 보면서, 힘들 때 마음을 기댔던 영화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벅찬 기분이 되었다. 지난봄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외벽 입구에 자리한 후부터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약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잘 있는지 확인하곤 했었다. 나는 폭 빠졌지만 크게 화제가 됐거나 한 작품은 아니어서 간판이 그대로인 게 신기하면서도 불안했는데, 늦가을에 SIPFF2020 때 포스터 이미지였던 [썸머 85] 현수막으로 잠깐 덧씌워졌을 때를 빼면 생명력이 길다. SIPFF2020 때 영화 보러 갔다가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올 것이 왔구나 그러나 너라서 다행이다 하는 양가적인 감정에 빠졌었는데, 이후 cgv명씨네는 몇 달 휴관에 들어가기도 했고 코로나19는 계속되고 있으니 아마도 극장은 간판 교체조차도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건재'한 것이겠다는 생각도 한다. 어쩌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조금은 볼품 없게 바랜 듯한 간판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늘고 운 좋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cgv압구정에서 [강호아녀]와 [애플]을 보았다. cgv압구정은 자주 가는 곳은 아니었지만 처음 가서 본 [몽마르뜨 파파]의 유쾌함과 함께했던 지인 덕분에 정겨운 기분이 드는 곳이다. 황막함을 채우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과 텅 빈 유려함 같은 것이 느껴졌던 [강호아녀]를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지금까지는 올해 가장 인상적인 영화 [애플]을 꼭 다시 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어서 좋았다. 영화 사이에 서울 온 김에 잠깐 봐도 좋겠다 싶었던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와 반가웠고, 영화를 보러 들어갈 때 세차게 내리던 비는 나올 때 되니 이미 그치고 날이 환하게 개어 있었다. 통영에서 느리고 게으르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정말 열심히 돌아다니며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했더니 기분이 상쾌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다만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고 서울을 활보하자니 한 구석이 심히 캥기기는 해서, 이런 여행을 반복할 수는 없겠다 싶었다. 통영으로 오는 먼 길은 프리미엄 버스 덕에 쾌적하였고, 남은 알바 마무리 리프레시로 충분한 여행이었다.

 

 

'사는게알리바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6th 부산영화여행, 조신한 대구 방문  (0) 2021.08.30
5th 부산영화여행  (0) 2021.07.30
부산영화여행 4회차  (0) 2021.05.31
부산영화여행 3회차  (0) 2021.04.20
부산영화여행 2회차  (0) 2021.04.01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