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알리바이2021. 4. 1. 22:20

 

 

설 연휴에 서울 다녀오느라 2월은 쉬었고, 3월의 마지막 수요일이 31일이다 보니 1-2회차 사이의 텀이 길었다. 1박 2일 영화 본 후 통영국제음악제 이날치 공연을 함께 보기로 한 지인의 차를 얻어 타고 통영으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일정도 고려했으나 지인이 나름 독립운동 중인 관계로 무산되었고, 부산에 하루 더 머물고 금요일에 함께 오는 것도 생각했으나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3월 31일 아침 9시 반쯤 집에서 출발한 덕에 알라딘중고서점에서 읽은 책들을 팔고 예매한 대로 [117편의 러브레터]와 [스파이의 아내], [아이카]를 무사히 잘 보고, 다음 날 [파이터]를 본 후 바로 통영으로 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뒤풀이까지 하고 귀가. 세상 깔끔한 영화여행이었다. 31일의 영화는 모두 cgv서면 art2관이었는데, 1월에 [438일]을 볼 때는 편안한 리클라이너 좌석이 살짝 부담스러웠으나 한 번 경험했다고 적응이 되어선지 무척 만족스러웠다. 다만 문화가 있는 날이라 관객이 적지 않았고 앞 줄의 휴대폰 불빛이 가려지지 않는 각도이다 보니 이따금 짜증이 나기는 했다. 다음 날 [파이터]는 임권택관이어서 살짝 아쉬웠지만 극장에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방해요소 없는 쾌적한 환경이 매우 만족스러웠더랬다.

영화를 이어서 보면 완전히 우연이지만 연관된 어떤 맥락이 생기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117편의 러브레터]는 1945년, [스파이의 아내]는 1940년대 초반이 배경이어서 자연스럽게 전쟁과 역사 속 개인의 선택, 운명 따위에 대해 생각이 옮아갔다. [아이카]와 [파이터]는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20대 여성이 각각 모스크바의 '불법체류자'와 서울의 탈북자로 살아가는 힘겨운 생존과 관계 맺기를 보여주었다. 주인공을 조명하는 관점이나 스타일은 많이 달랐지만, 소수자로 살아가는 존재가 처한 취약함과 마주하는 고통이 신랄하게 혹은 덤덤하게 전해지는 영화였다. 모두 궁금했고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진 영화들이어서 참 좋았는데, 차분히 감상을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통영 와서 뒤풀이로 본 [아무도 없는 곳]이 의외로 그저 그랬는데, 24시간 동안 4편의 영화를 본 이후여서 다소 소화불량의 상태였던 것도 같고, 엣나인의 화려한 홍보에 기대가 과했던 것도 같다.  

3월 22일부터 [백석 정본 시집]으로 하루에 한 편씩 백석 시인의 시를 필사하는 카카오 프로젝트100에 참여하고 있다. 처음 접한 건 학창 시절이었지만 간헐적으로 들춰보고 매혹되곤 하다가 통영행을 결심하고 이따금 내려올 때마나 그의 흔적을 찾아보고 다시 시를 읽으며 더 좋아진 시인이다. 지난해 가을 통영에서 한 달 살 때 [백석 평전]으로 통영에서 책 모임을 하느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집중해 읽었더니 더욱 매료되었고, 매일 한 편씩 읽고 필사를 하는 건 또 새로운 느낌이다. 부산 가며 필사노트를 깜빡한 탓에 난감해하다가 영화 티켓 뒷면에 시를 베껴 적었다. 

첫날 서부산터미널에 내려 사상역 지하철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카트를 끌던 한 아주머니가 길을 물으셨다. 난 잘 몰라서 말씀드렸더니 그 사이 다른 두 분의 아주머니가 길을 알려주시고 에스컬레이터에서 개찰구까지 원래 알던 사이처럼 웃고 떠들며 함께 가셨다. 다음 날 서부산터미널에 가려고 사상역에서 내릴 때는 고속버스 시간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서 앞에 계시던 아저씨가 카드 태그 안 하신 걸 모르고 내가 먼저 태그를 하고 바로 이어 아저씨가 태그를 하셨다. 다행히 빠져나오는 데에 문제는 없었지만 좀 놀라서 죄송하다고 하는데 뒤돌아보신 아저씨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인구 밀도 낮은 통영에 거의 혼자 있다 보니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잠깐 스치며 느끼는 감정도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꽉찬 1박 2일을 보내고 돌아오니 현관 앞에는 나를 기다리는 대저토마토 5kg가 있었다. 며칠 전 엄마가 주문을 부탁했는데 집주소 선택을 잘못한 탓에 전날 낮에 우리집으로 배송됐다. 사먹은 적 거의 없는 토마토를 저렇게 많이 보유하게 되었지만 금요일에 지인이 오니 함께 먹고 가는 길에 나눠줄 수도 있어 다행이다. 이참에 나도 토마토랑 좀 친해지면 좋고. 정적인 일상이 계속되어서 그런지 평소와 달리 좀 움직이거나 하면 바로 몸 상태가 달라진다. 대충 집 정리하고 샤워하고 났더니 윗 입술의 한 부분이 빨갛게 부어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몸이 으슬으슬하다. 4월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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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