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족한 기분으로 흔쾌히 잠들고 싶었으나 전날 못지 않은 소음과 간만의 열폭도보로 다리가 아파 새벽까지 뒤척뒤척, 덕분에 아홉시 반쯤 숙소를 나섰다. 거주민마냥 동네 산책으로 해변을 걷고 어제 약속한 슈퍼집 강아지랑 다시 만나 작별인사.
가까운 초당마을, 유난스런 간판과 몰려드는 자가용들을 피해 들어간 집에서 식사를 하고 허난설헌•허균생가와 기념관으로.
늘어선 가게들 뒤로 이어진 주택가 길목엔 아담한 교회가 있었다.
2003년 여름 강진 갔을 때 부러 남녘교회를 찾아가 십몇 년 만에 예배 드리고 어쩌다보니 어울려 놀다 하룻밤 신세까지 졌던 기억이 문득, 해남으로 넘어갈 때는 다른 목사님 차를 얻어타기까지 했으니 시종일관 폐쇄적 인간은 아니었던 듯도 하고. 암튼 주인이 외지인인지 두부부자인지 알 수 없는 예쁘고 번듯한 집들을 구경하며 걷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얼마나 된 집을 언제 어떻게 복원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시멘트공구리만 선연한 생가는 슬쩍 보고, 아는 게 없는 덕에 살짝 알차게 느껴졌던 기념관 구경.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정원과 건물에 언발란스다 싶은 동상과 시비들이 좀 아쉬웠지만, 입구 양쪽으로 설치된 데크 경사로랑 화단의 안내문은 퍽 맘에 들더라. 애니로 만들어진 허난설헌과 허균에 대한 정보들을 보면서 물론 주인공들이니 더욱 그렇겠지만 새삼 참 멋진 양반들이었군~ 싶은.
입구 안내판 왈 홍길동박물관이 지척에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 빙빙 돌다 물어보니 없어졌다 한다. 검색해보니 몇 년 전 소송에서 패소해 이름도 홍길동'전'박물관이 되었다던데 이젠 아예 자취를 감춰버린 게, 뭔가 홍길동스럽단 느낌도 들더라. 생가 담벼락 밖에서 두꺼비집 지키는 홍길동을 만난 걸로 만족. 잠시 주변 솔숲에 널부러져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해주고, 팔랑이고 말 마음이지만 매혹된 김에 허난설헌•허균시비공원으로.
거창한 걸 기대하진 않았고 어울리지도 않겠다 싶지만, 나름 찰라 추모의 마음을 담아 한 시간 가까이 걸었는데 덩그러니 놓인 두 개의 시비와 딱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는 배경조형물 그리고 그 뒤에 새겨진 내용들을 읽으며 괜히 씁쓸해지더라. 허난설헌과 허균은 어쩌면 참 드문 소위 고위층 반인습•반체제(?) 인사들이었는데, 이들을 기리는 시비의 건립에는 천박한 인습과 체제의 수호자들이 앞장을 섰던 듯도 하고. 아이러니라고 하기엔 이미 당위가 된 관제 기념의 매커니즘을 다시 확인하며, 나 역시 모르지만 지난 시대에 생동하던 정신은 이렇게 활자로 박제되어 안전한 명망으로 둔갑하는구나 싶은. 그걸 아니까 집권자들은 자꾸만 뭉툭한 기념비들을 세우고 그걸 알면서도 한쪽에는 재해석을 확산할 힘이 없고, 뭐 그런 중에 기념은 풍경이 되고 낭만으로 추억으로 전락하고 그런 거겠지만. 일상으로 돌아가 그들을 되짚어 볼 열정도 여력도 없으니, 그래서 더 씁쓸한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바다는 한 번 더 봐야지 싶어 안목해변에 갔는데 해맞이공원의 쩌렁쩌렁한 색소폰 소리가 과하게 반겨주시고. 동행, 아이러브유, 사랑의미로, 황진이 등 정말 다양한 레퍼토리를 자랑하시는 덕에...
코 앞 카페 테라스에 자리잡고서는 이어폰을 아니 꺼낼 수 없었다. 잠시 강릉bgm을 바꿔 두어달 사이 마르고 닳도록 듣고 있는 몇 곡으로 이 생각 저 생각.
언제나 여일한 바다를 두고 유난과 청승을 떠는 게 우습긴 하지만, 오늘은 괜히 더 아쉽더라. 이어폰을 빼고 카페를 나서는데 거짓말처럼 울려퍼진 이제하의 '모란,동백'을 감사하게 마지막 곡으로 듣고 발길을 돌렸다, 이런 건 정말 신기하고 좋은 기분^^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 세리머니가 민망하지 않도록 담담히 또 살다가... 답답할 때 하루 여행으로도 다시 오면 괜찮을 것 같다. '솔향'강릉은 내게 매우 fine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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