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11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코로나19 때문에 시외버스가 앱의 시간표대로 운행되지 않아서, 12시 25분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1시 40분에 도착했으니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보통버스를 탔더니 자리도 불편하고 버스 자체가 오래되기도 해서 전혀 쾌적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무척 답답하고 힘이 들었다. 중고서점에 팔려고 가져간 문지에서 나온 [어린왕자] 자수버전을 버스에서 읽었는데, 아주 어렸을 때 읽고 다시 읽으니 몇몇 에피소드 외에는 무척 새로웠지만(역자 후기를 보니 어린이용으로 다시 번역했다고 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닌 듯) 그림책 잠깐 읽는 데도 멀미가 나서 혼났다.
버스들이 빨리빨리 연결되면 2시 20분에 하는 [블라인드]를 볼 수 있겠다 싶었지만 서면역에 도착하니 2시가 넘어서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1년에 서너 번은 여기저기 며칠씩 여행하는 편이어서 몇 년 전부터 야놀자앱에서 예약을 하는데, 서면역에서 가장 싼 숙소를 예약했더니 역시나 싼 게 비지떡. 교지 만들던 대학생 때 취재차 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왔던 게 처음 부산행이었는데 그때 멋모르고 잡았던 남포동 뒷골목의 숙소, 불결하고 허름한 여인숙 같았던 여관이 떠오를 정도였다.
텔레비전에서 <유퀴즈온더블럭>을 하고 있었는데, 대구에서 엠씨들이 이동하느라 탄 택시의 기사님이 첫 번째 문제를 맞추고 상금 백 만원을 타셨다. 구경하던 시민 중 한 분이 한 달 월급 벌었다며 축하하고 기사님이 수긍하자, 유재석이 진심 놀라는 게 느껴졌는데 사실 나도 좀 놀랐다. 최저임금의 절반보다 조금 많은 벌이라니, 말씀하셨던 시민이 자기 가족도 택시를 해서 안다고 하셨고 약간 감성적인 자막이 흘렀는데... 감성팔이라는 느낌보다는 예능프로그램이지만 애쓴다는 느낌이 들어 괜히 고마웠다. 출연자가 문제를 맞췄을 때 너무 좋아하는 조세호도 인상적이었는데, 연출한 표정이나 리액션이 아니라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예전에 이석원의 글에서 남의 슬픈 일을 위로하는 것보다 기쁜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게 더 어렵다는 얘기를 읽고 공감이 됐었는데,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함께 기뻐하는 조세호가 좀 달라보였다.
수요일의 영화는 [키드]와 [438일], 첫 영화가 5시 20분 시작이어서 멀지 않은 부산시민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나가는 길에 알라딘중고서점에 들러 책을 팔았는데, 무위도식하는 주제에 영화여행까지 하는 뻔뻔함을 약간 상쇄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사 둔 책을 묵히지 않고 읽고, 책짐을 줄이고, 돈도 생기니 일석삼조. 앞으로도 부산영화여행 올 때 숙박비 정도는 책 팔아서 충당해야겠다는 의지가 절로 생겼다.
부산시민공원은 2010년 하야리아기지 반환 이후 조성된 곳이라는데, 서울로 치면 용산미군기지 정도 되었던지 엄청 넓었다. 시간이 아주 많지는 않아서 전체 중 사분의 일 정도를 주마간산으로 둘러보며 걸었는데, 구역마다 테마를 정해 꾸미고 어울리는 조형물이나 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듯 했다. 낮시간임에도 사람이 꽤 많았다. 숙소에서 부산시민공원까지 가는 길에서도, 서면이 번화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높은 건물이 많고 사람들이 많을 줄은 전혀 몰랐어서 낯선 도시로 여행 왔다는 실감이 확 들었다. 사람들이 쓰고 있는 마스크가 아니라면 코로나19 상황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서, 문득 옛날 배낭여행 갔을 때가 떠오를 정도였다.
cgv서면이 서면역 기준으로 부산시민공원과 반대편에 있어서 나름 열심히 걸은 덕에 통영에서 산책하는 것만큼 걸을 수 있었다. cgv서면에는 임권택관과 art2관, 아트하우스관이 두 개였고 내가 볼 영화도 그 두 곳에서 연달아 상영했다. cgv가 무비꼴라쥬니 아트하우스니 하며 예술영화전용관을 만들 때 처음에는 가본 적도 없으면서 괜히 재수없어 했는데, 알라딘이 영화할인쿠폰을 맥스무비에서 cgv로 바꾼 이후에는... 앱을 깔고 아트하우스클럽에 가입하고 영화 볼 때마다 쌓이는 포인트와 쿠폰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대자본에 대한 적의는 디폴트이므로 여전히 재수없어는 하지만, 연말 리뉴얼한다며 문을 닫은 cgv통영이 문을 열지 않는 게 아쉬운,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으로서... 솔직히 cgv아트하우스가 없다면 내 일상은 좀 더 각박했을 것이다. cgv아트하우스는 각종 쿠폰과 제휴할인 같은 걸 활용하면 가난하고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내가 꽤 싸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영화관이기는 하다. 마음은 인디스페이스, 씨네큐브, 에무시네마 같은 곳에서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사실 cgv에서 대략 그 반값으로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미안해요;;; 암튼, 그리하여 cgv서면 임권택관과 art2관에서 처음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art2관은 좌석이 무려 리클라이너여서 과한 안락함이 민망할 정도였다.
영화가 끝나고 금요일 밤인가 싶게 활기 넘치는 서면 거리를 구경하며 숙소로 돌아왔더니, 벽에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있었다. 순간 얼음, 에프킬라가 있길래 열심히 분사했는데 끄떡도 없고 혹시나 해서 방에 있는 전화를 들어 0번도 누르고 *도 #도 눌러봤으나 신호조차 가지 않아서 숨쉬는 얼음 상태로 거미를 한참 주시했다. 그러다 벽의 모서리 쪽으로 계속 올라가던 거미가 바닥에 떨어지길래 쓰레기통을 뒤집어 덮어놓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침대에 누워 [라디오스타]를 봤다. 얼마만인지.
다음날도 3편의 영화를 볼 계획이어서 1시 쯤엔 잠을 자려고 했으나 거미로부터 시작된 불안함과 쾌적하지 못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고 덩달아 잠도 안 왔다.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텔레비전도 틀었다가 휴대폰도 봤다가 유튜브 잠오는 소리도 틀었다가 했으나 뭔가 불편하고 팔다리도 저리고. 결국 4시가 넘어 잠들었고 10시쯤 일어났는데, 아직 때가 아니건만 생리 시작. 나이 먹으면서 주기도 통증도 컨디션도 점점 난조가 되어가는데, 하필 오늘이었다.
오늘의 영화는 [파힘]과 [어바웃 타임], [블라인드]였고 마지막이 5시 20분 시작이어서 안 그래도 좀 애매했는데, 몸 상태도 그렇고 버스 시간 때문에 동동거리게 되면 별로일 것 같아서 아쉽지만 [블라인드]는 취소했다. 체크아웃이 12시고 컨디션이 안 좋아 일찍 나가기도 그래서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조금 나오다가 꺼지더니 신호가 안 잡혔다. 여행 다니면서 모텔에서 많이 자봤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덕분에 평소처럼 라디오를 듣다가 나와서 첫 영화관인 cgv서면삼정타워로 갔다.
도보 10분 거리에 cgv가 두 개나 있는 게 신기했는데, 이름만 들었을 때는 지역의 오랜 랜드마크인가 싶었던 삼정타워는 1층에 무려 쉑쉑버거가 있고 층마다 빽빽하게 살 거리 먹을 거리 놀 거리가 입주해 있는 새 건물이었다. 서울로 치면 영등포 타임스퀘어쯤 되나 싶었는데(왜 자꾸 서울로 치는지는 나도 잘;;;) 무척 의외였던. 점심시간이기도 했지만 평일 낮인데도 전체적으로 아주 휑하지는 않아서 좀 신기했으나 영화관은 썰렁했고 영화는 나 혼자 보았다. 특이한 건, 영화 시작 전 영화예고보다 삼정타워에 입점해있는 음식점 광고가 많았다는 것 그리고 비상시 대피 안내 화면 한 편에 수어통역사가 있었다는 것. 문득 자막으로 나오는 내용 그대로인데 굳이? 싶기도 했지만, 수어통역이 있어서 나쁠 건 없는데 왜 처음 보게 되었을까 싶기도 했다.
[파힘]을 잘 보고 나와서 [어바웃 타임] 보러 cgv서면으로. 영화 보기 전 지인에게 전화가 왔어서 가는 길에 통화를 했는데, 이전 활동에 관한 용건이어서 이야기하기 민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내가 거기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하기는 했다.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기까지 나름 많은 일들과 내딴의 갈등과 인내 그리고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오롯한 혼자의 일상이 매순간 즐겁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으니까. 팀처럼 시간여행의 능력이 생긴다고 해도, 지금인 미래를 바꾸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바로 부산서부터미널로 이동해 6시 14분 버스를 탔다. 다행히 갈 때 탔던 버스보다는 쾌적했고, 그러나 창문이 열리지 않는 버스 안에서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게 역시 답답하기는 했다.
집에서 챙겨간 것들로 대충 때웠더니 배가 고파 맥도날드에서 슈슈버거세트 사먹고 버스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8시 33분. 고요한 우리 동네, 적막한 집에 들어서니 이제야 높은 건물과 많은 사람들로 가득한 서면이 별세계처럼 느껴진다. 1박 2일이 꽤 길었던 듯 피곤하기도 하지만, 네 편의 영화가 나름 다 좋았어서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는 중에도 만족스럽다. 통영발 부산행의 과정을 경험했고 서면역 주변과 영화관에 대해 대략 알게 되었으니 다음 번은 좀 더 익숙하고 편안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숙소 선택이었는데 두 달에 한 번으로 줄이게 되더라도 숙소 만큼은 쾌적한 곳으로 예약하는 게 중요하겠다고, 적어둔다.
'사는게알리바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영화여행 3회차 (0) | 2021.04.20 |
---|---|
부산영화여행 2회차 (0) | 2021.04.01 |
10월 25일, 부산-남해 (0) | 2013.10.26 |
10월 23일, 경주 (0) | 2013.10.23 |
6월 2일, 강릉 (0) | 2013.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