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무감해졌지만 해가 바뀌는 건 안 바뀌는 거랑 비교하면 어쨌든 다른 느낌이다. 다이어리 참 열심히 쓰던 어릴 적 습관은 사라졌는데, 이사 준비하느라 간만에 연 판도라의 상자들에는 그 시절의 기록들이 수십 권 있었다. 다이어리 기록 유무가 일상의 질을 결정하는 건 아니더라도, 깨알 같은 글씨들로 빼곡한 과거의 시간들과 아무것도 노트에 기록하지 않은 몇 년의 시간들이 확 대비되는 느낌이다. 나만 아는 삶의 밀도를 다이어리가 담보하는 건 아니겠지만 일상이 완전히 헐렁해진 내게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몇 달 전의 다짐도 지키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며 살고 있는 자로서 민망하나, 다시 한 번 새해에 기대어 보기로 한다. 마침 여행하며 프라하에서 사온 작은 탁상 달력 그리고 정말 많이 절제했지만 100주기를 맞아 쏟아져 나온 프란츠 카프카 관련 책들을 구입하며 외면하지 못한 작은 다이어리가 있다. 조금 전 꽤 진정이 필요한 다량의 쿠폰 날림 사실을 확인했다. 어디에도 미션 쿠폰 발급기간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1년 단위로 돌아가는 미션이니 고려했어야 했는데, 최대한 늦게 다운로드하려고 미루다 마주한 돌이킬 수 없는 일. 뭔가 탓하고 싶지만 내 탓이고 복구 가능한 다른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안 좋은 일을 액땜 삼는 고질로도 위로가 안 돼서 잠시 생각하다가 유치하지만 좋은 일을 생각하며 덮기로 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됐고, 프라하 풍경의 달력과 프란츠 카프카 표지의 다이어리와 함께 한 해를 보낼 수 있다. 기록에 대한 강박 못지않게 강력한 ‘어떤 최적화’ 상태에 대한 갈망에 잠식되어 노트북을 열어 뭔가 쓰는 일을 하염없이 유예했었는데, 아무려나 지금 쓰고 있다. 바쁘게 일하는 중에도 본 영화와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열심히 남겼던 예전의 내가 좋았다. 그것만 해도 무너진 일상이 조금씩 복구되고 나로 사는 일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새해 덕분에, 나쁜 일 덕분에, 오늘의 좋은 일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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