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4. 3. 13. 17:11

 

 

2월의 모임 책이었던 [더티 워크] 덕에 알게 된 책, 이후 우연히 한국에 방문했던 저자의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마침 도서관에 있었다. 총 3부로 구성된 본문은 저자가 국경순찰대 학교에서 교육 받고 국경 지역에서 야전 요원으로 근무한 1년, 이후 정보국에 차출되어 일하다가 작전 수행을 위해 다시 야전 근무에 투입되고 순찰대를 그만둘 때까지 그리고 퇴직 후 국경 지역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며 친구가 된 건물 관리인 호세의 멕시코 추방과 그를 도우며 경험한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멕시코 이민 3세대인 저자는 자연을 사랑해 국경 지역 국립공원의 파크레인저로 일한 엄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광대한 자연과 국경 지대의 문화적 요소를 흡수하며 자랐다. 할아버지 대에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한 친족들 대부분과 달리 ‘칸투’라는 외조부의 성을 물려받은 저자는 멕시코 전통의 영향 아래 성장하며 국경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대학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하며 국제질서 하의 이론적 국경에 대해 공부한 저자는 물리적 국경을 직접 체험하고자 국경순찰대에 자원한다. 

어쩌면 낭만적이고 순수한 열정으로 선택한 국경순찰대의 일은, 국경에서 마주치는 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순진한 예상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멕시코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저자는 자신의 존재가 국경 지대에서 단속된 멕시코인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인간적으로 대우했지만, 생존의 기로에서 택한 월경에 실패하고 송환센터를 거쳐 떠나온 땅으로 보내지는 이들에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위험하고 황량한 국경 지대에서 사망한 이들의 사체나 동행의 죽음 후에 속수무책으로 남겨진 이들을 거듭 만나며 저자는 애초 의도와 달리 무력감과 죄책감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누군가 목숨 걸고 감행하는 시도를 저지하고 중단시키는 자신의 일과 그에 수반되는 폭력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으로서 느끼는 중압감도 점차 심해진다. 반복되는 악몽과 잠잘 때의 이갈이, 스트레스에 따른 신체 반응, 자신이 선택한 일의 괴로움을 부정하려는 무의식과 커져가는 우울감 그리고 이따금의 돌발행동을 경험하며 저자는 자신이 미쳐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1년간 국경 지대 황무지에서 야전 요원으로 근무한 뒤 저자는 마약단속국의 말단 정보 요원으로 차출된다. ‘나사 통제 본부’ 같은 곳이라는 상사의 농담처럼 모니터로 가득한 사무 환경과 수행해야 하는 업무는 [더티 워크]의 드론 분석가를 연상시킨다. 저자는 국경 지역의 감시 카메라를 통해 지구대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들, 즉 사체 발견, 마약 압수, 총기류 몰수, 수배 중인 갱단이나 카르텔 조직원 체포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요약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에 투입되어 야전 요원으로서 단편적으로 경험했던 국경의 다양한 면모와 문제들을 더욱 총체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국경의 사람들 중에는 선량한 민간인만이 아니라 마약 카르텔과 갱단의 조직원을 비롯해 ‘국경산업’으로 돈을 버는 이들도 많았다. 국경순찰대원들에게는 이들과의 충돌에서 자신의 목숨과 안전을 지키는 일도 중요했고 동료 야전 요원 중 총상을 입거나 사망한 이도 있었다. 국경이 넘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이를 이용하는 자 모두에게 위험천만한 무엇이 된 것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 아니었다. 국경을 넘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이를 이용해 돈을 버는 이들이 늘어나고, 이 일이 점점 더 큰돈이 되면서 마약 카르텔까지 가세하며 ‘불법이민자들이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자는 국경의 ‘위험한’ 변화를 여러 저서와 언론의 심층 기사 등을 인용해 압축적으로 설명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근본적으로 국경 정책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2000년대를 전후해 국경을 넘은 멕시코인들을 겨냥한 인신밀입국 사업을 조직적인 갱단이 독점하면서 무사히 국경을 넘은 이들을 감금하는 범죄가 급증했고, 마약과도 연계된 범죄는 몸값 요구를 넘어 무자비한 살인과 시신 유기 등의 참극으로 치닫는다. 멕시코 국경 도시의 시체보관소에는는 신체가 훼손된 이름 없는 시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몰려들었고, 국경 지역 곳곳에는 조직이 처형하고 처리한 시신의 집단매장지들이 산재하지만 실제 발견된 것은 10% 미만이라는 내부자의 증언도 존재한다.   

특히 이 시기 멕시코 국경도시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는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강간과 살해, 시체 유기 등 연쇄적인 범죄가 빈발하여 2003년 유엔 여성차별방지위원회가 실태 조사를 진행하고 2006년 멕시코의 칼데론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였다. 격전장이 된 시우다드 후아레스는 이후 여성만이 아니라 누구나 살해되는 도시가 되었고 위험이 당연한 도시로 자연스럽게 인식되었으며, 같은 시기 리오그란데강 건너의 엘파소는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선정되었다고 저자는 쓴다. 

태평양에서 리오그란데강에 이르는 1,086킬로미터의 국경선이 명확히 확정된 것은, 1848년 미합중국과 멕시코 사이에 체결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과 1856년의 최종 합의 후에도 수많은 논의와 실태조사, 측량과 조정 등을 거친 다음이라고 한다. 이후 저자의 할아버지 대까지는 비교적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던 국경 통제의 수위가 높아지고 순찰이 강화되자, ‘불법이민자’를 통한 돈벌이가 기승을 부리고 마약 카르텔과 ‘인신밀입국’ 범죄가 만연한 악순환은 오늘날의 현실을 낳았다.   

학교에서 공부한 국경과 몸으로 체험한 국경의 괴리는 컸다. 정책이 빡빡해질수록 고도화되고 산업화된 국경 범죄의 실상과 이에 대응하는 조직원으로서 피해갈 수 없는 폭력을 내면화하며 갈등과 혼란에 빠진 저자는 4년 만에 제복을 벗는다. 국경순찰대를 그만둔 후 자신이 나고 자랐고 두 뿌리가 수렴된 국경 지역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며 저자는 한 사건을 통해 새롭게 국경을 경험한다. 매일 아침 간단한 식사를 함께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된 건물 관리인 호세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멕시코에 갔다가 적법하게 귀환할 수 없게 되자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체포된 것이다. 

평소 성실한 노동자이자 친절한 이웃이었던 호세를 돕기 위해 건물주와 지역 교회가 나서서 재판 준비에 필요한 변호사 선임 비용을 부담하고 탄원서를 모은다. 저자는 유창한 통역자이자 친구로서 그의 아내가 모아온, 열한 살에 미국에 입국해 수많은 블루컬러 직업을 거치며 성장하고 결혼해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온 호세의 이력에 관한 각종 서류와 증명서들을 정리한다. 체류자격 문제로 법원과 구치소에 갈 수 없는 아내를 대신해 아이들의 보호자로 함께하면서, 국경순찰대로 일했던 지난날의 의미를 속죄의 마음으로 자문하기도 한다. 

‘불법체류’와 밀입국 전력이 있는 호세의 재판 전망은 어두웠고 그가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실히 살아왔다는 점과 세 아이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점 등을 기소 재량에 호소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백방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강제 송환 연기 신청 기각과 함께 호세는 멕시코로 추방된다. 절망에 빠진 저자는 자신이 지금껏 거대한 거인의 발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자신을 짓누르는 거인의 실체를 마주한 것 같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한다. 국경순찰대 지원을 만류하고 일하면서 어딘가 변해가는 모습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말에, 대답을 회피하거나 화제를 돌리며 스스로를 방어하던 저자는 마침내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은 것이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호세가 1인칭으로 들려주는 긴 이야기다. 마약 조직이 장악한 위험하고 미래가 없는 고향의 상황, 제대로 교육 받은 건전한 시민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싶은 바람, 밀입국과 강제 송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고마운 마음, 법의 권위와 준수의 의무를 인정하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고자 하는 더 큰 갈망, 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계속 시도하겠다는 꺾을 수 없는 미국행의 의지까지. 호세가 모든 것을 걸고 다시 넘고자 하는 국경의 실체는 무엇일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텍사스주 국립공원 끝자락의 리오그란데강을 찾아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들과 함께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자신이 지금 어느 쪽 나라에 있는 것인지 망각했다는, 자신을 둘러싼 강과 산은 한 몸이 되어 있었다는 문장으로 글을 끝맺는다. 

몇 년에 불과했지만 이주 단체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읽을 때면 조금 다른 마음이 된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과 한국의 국경은 사뭇 다르고 미국의 멕시코인들과 한국의 이주노동자들도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국경과 출신국이 한 인간의 생의 범주와 더 나은 삶을 위한 바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멕시코계 후손으로서 멕시코인들의 비참을 목격하는 저자의 마음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할 것이고, 아마 그런 이유로 국경순찰대에 지원하고 견디며 상처받고 결국 이런 글까지 써내고야 말았을 것 같다.  

[더티 워크]를 읽으며 이 책이 궁금해진 가장 큰 이유는 저자가 책을 출간한 후, 걱정했던 국경순찰대와 과거의 동료들이 아닌 활동가들의 비난에 직면했다는 점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도 그렇게 편협하게 활동하는 사회운동가들이 있다는 게 의아하게 느껴졌는데, 책을 읽은 후에는 그들이 정말 활동가였을까 의구심이 일었다. 책에는 작심한 폭로라기엔 이미 많은 것이 알려져 있는 현장과 조직의 일원으로서, 다분히 개인적인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약간은 내부 고발의 성격도 띤, 무엇보다 국경에 태생적으로 연루되어 있고 매우 다면적으로 국경을 경험한 사람의 깊은 궁구와 성찰이 담겨 있다.  

이미 그렇게 정해져서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만 자신의 많은 것을 내던져 조금은 다르게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이상주의자 청년의 분투와 세계의 냉정함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혔다. 어쩌면 호기롭게 도전했던 국경순찰대에서의 충격적인 경험과 결국 상처입고 만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며 자기연민을 배제한 채 객관화하고 사회화하려는 노력도 인상적이었다. 일종의 현장 연구처럼도 느껴졌지만 연구를 마친다고 빠져나올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이 무겁기도 하다. 고마운 책이다. 



프란시스코 칸투•서경의 옮김
2019.5.3초판1쇄인쇄 5.17초판1쇄발행, (주)서울문화사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다호]  (0) 2024.03.05
[벨기에 에세이]  (0) 2024.02.29
[더티 워크]  (0) 2024.02.24
[결혼·여름]  (0) 2024.02.15
[랩 걸]  (0) 2024.01.28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3. 5. 02:50

 

 

참으로 좋아해서 여전히 가끔씩 떠올리며 살아가는데 책의 존재를 얼마 전에야 알게 됐다. 저자가 ‘거스 반 세인트’로 되어 있으니 그에게도 외래어 표기 기준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구스 반 산트로 굳어진 이름과 동명 같지 않기도 하고 검색으로 찾기도 어려웠을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연히 발견하고 너무 오래 전 책이라 아무런 정보를 찾을 수 없는 가운데 무려 도서관 보존서고에 묻힌 책를 상호대차로 대출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서 모티프를 따고 또 어디선가에서 영감을 얻은 약간 옴니버스 같은 기획이었다고(아닐지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서 내심 영화 자체에 대한 감독의 의도와 각본에 대한 이야기, 제작노트 기록 같은 걸 기대했는데 몹시 번지수가 다른 책이었다. 그런 장르가 있다면 영화소설 혹은 영상소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인물의 대사와 감정, 서사와 이미지를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 쓴 듯한 책이었다.  

단, 영화에서 대사나 내레이션으로 나오지 않았던 전지적 시점의 설명이 꽤 많이 덧붙여져 있는데, 원작에도 있는 것인지 모두 역자의 재량 서술인지 궁금하다. 인물들의 내면이 어떤 부분에서는 과하게 느껴질 만큼 상세하게 묘사되어 때로 거슬리기도 했지만 덕분에 오롯한 존재감의 마이크와 스코트만이 아니라 거리의 부랑 청소년들과 그들의 문화 전반이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1992년에 출간된 책이다 보니, 영화의 톤과 별개로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고스란히 텍스트에도 반영되어 있는 점은 묘한 느낌을 주었지만 말이다. 

이십 여 년 동안 영화를 예닐곱 번은 본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이 지났는데 활자의 묘사와 함께 머릿속에 영화의 장면들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게 신기했다. ‘사실’보다 이미지가 더 강력하게 기억되기 때문인지, 영화 내용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읽으며 새롭게 느껴졌던 것 역시 신기한 경험. 스스로를 줄거리전제감상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미지나 소회보다 서사의 기억이 쉽게 휘발되는 경험이 누적되면서 무의식적 강박이 생겨난 걸까 싶어지기도 했다.  

영화 포스터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마이크와 스코트의 오토바이 장면이다 보니 그들이 이복형의 집으로, 패밀리 트리 인 호텔로 엄마를 찾으러 떠날 때 타는 오토바이가 모두 훔친 것이었다는 것이 미처 몰랐던 중요한 사실로 느껴졌다. 전혀 염두에 없었는데 밥과 부랑아들이 몹시도 일자리와 안정된 일상을 원한다는 점도 새로웠다. 마이크의 엄마를 찾아간 로마에서,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나 스코트의 사랑을 차지한 카르멜라의 존재와 극적 배치도 의미심장하고 인상적이었다. 그 새로운 사랑은 마이크에게 엄마와 스코트, 이중의 상실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이어서 더욱.  

전체적으로는 과연 이 책을 구스 반 산트가 쓴 그대로 번역가가 옮긴 것일까 하는 의아함을 떨칠 수 없었고, 본문 외에는 역자의 말이라든가 부가 설명이 전혀 없어 알 수 없었지만 대체로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디테일의 측면에서 새롭게 느껴졌던 부분들이 많았기에, 대조할 역량이나 필요는 없지만 책의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누렇게 바랜 책장과 아날로그 시절의 도서 관리 흔적들도 한 몫을 한 여러 모로 진한 향수의 독서였다.

 

어렸을 적만큼은 아니지만 갖은 결핍으로 외롭고 외로운 마이크를 읽으며 여전히 마음이 울렁거려서, 역시 나의 인생 영화는 [My Own Private Idaho]이며 성도 모르는 Mike는 인생 캐릭터라는 걸 확인했다. 또한 그가 미카엘이라는 것도 새삼. 마이크도 미카엘도 모두 리버 피닉스였기에 그 이른 죽음이 남긴 전복성과 충격 때문에 강렬하게 각인된 것이지만, 그의 시절과 나의 시절이 교차한 그 시기로부터 오래 이어지는 마음이 나는 고맙다. 그 길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아이다호에 한 번은 가보고 싶다.    



거스 반 세인트•옮긴 이 한명준
1992.2.15초판인쇄 2.20초판발행, 도서출판 모아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은 장벽이 되고]  (0) 2024.03.13
[벨기에 에세이]  (0) 2024.02.29
[더티 워크]  (0) 2024.02.24
[결혼·여름]  (0) 2024.02.15
[랩 걸]  (0) 2024.01.28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2. 29. 17:17

 

 

19세기 초중반을 살다간 샬롯, 에밀리, 앤 브론테 세 자매의 글을 발췌해 담은 작은 책이다. 읽은 건 어릴 때 으스스하게 매료됐던 [폭풍의 언덕]뿐이니 이들에게 별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벨기에 에세이]라는 제목에 끌려 선택했다. 본문은 “앤 브론테의 죽음에 대하여”라는 샬럿의 짧은 시를 시작으로 6편의 일기와 11편의 편지를 묶은 “바람 부는 하워스에서” 그리고 12편의 산문이 담긴 “벨기에 에세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글들이 아닌데 서문처럼 읽힌 첫 번째 글을 동생의 죽음에 부치는 시로 넣은 점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망자의 고통이나 남은 자의 비감을 토로하기보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담담히 수용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내용도 이채로웠는데, 아버지가 목사였고 종교의 무게가 지금과는 다른 세계였을 테니 그렇겠지만 온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예기치 않게 시작부터 죽음을 마주하며 그들의 삶이 궁금해 살펴보니 책 말미에 짤막하게 실린 생몰년도는 샬럿 1816~1855, 에밀리 1818~1848, 앤 1820~1849. 세 자매가 모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떴고, 시대를 감안해도 너무 짧은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와 앤이 함께 썼다는 일기 부분에는 자매들이 자란 하워스 목사관에서의 소소한 일상, 가족과 주변인의 소식 등이 담겨 있고 일기의 원본과 배경이 된 공간의 사진 몇 장이 실려 있다. 자매들은 오랫동안 함께 구축한 상상의 세계에서 ‘곤달 연대기’ 등의 서사를 진전시키며 글쓰기를 이어갔고, 성인이 되어서는 여러 곳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훗날 함께 학교를 세우려는 계획과 포부를 키워나갔다. 누군가의 생일이면 과거에 함께 쓴 일기를 열어보고 지나온 날들과 몇 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자매들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일기는 1845년 7월 30일, 에밀리의 생일 다음 날의 기록이다. 어릴 적부터 공유한 상상의 세계와 미래의 꿈을 여전히 기억하면서 1848년 7월 30일의 삶을 궁금해 하며 자신들의 나이를 가늠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편지 부분에 실린 11편 중 7편의 수신인이 샬럿과 평생 500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친구 앨런 너시, 3편이 에밀리, 1편이 아버지다. 현재 세 편만 확인된다는 설명과 함께 실린 에밀리의 편지들은 모두 샬럿의 여행 일정과 귀가 등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안부를 담아 앨런에게 쓴 것이다. 샬럿이 아빠와 에밀리 그리고 앨런에게 쓴 편지들에는 비교적 세부적인 사실들이 담겨 있는데 그 수가 적은 데다 작성일이 뒤죽박죽이어서 맥락적 이해는 어려웠다. 1841년 4월 에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에서 원하는 직장을 얻을 방법이 없어 뉴질랜드 북부의 섬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한 지인 메리의 이야기를 하며, 그에 대해 ‘이성적인 기획력인지 절대적인 광기’인지 염려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1848년의 마지막 두 편지에는 병으로 고통 받는 에밀리와 죽음의 소식이 담겨 있다. 일기에서도 느껴졌던 자매들의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데, 생에 대한 적극성의 원동력이 신앙심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벨기에 에세이” 부분에 실린 글은 에밀리와 샬럿이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1842년에 9개월간 벨기에 브뤼셀의 에제 기숙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쓴 것으로, 프랑스어로 쓴 과제 형식의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샬럿은 과제를 봐주던 에제 선생을 짝사랑했고 이후 소설 [빌레트]에 그 경험이 담겼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제목만으로 19세기 여성들의 벨기에 여행기 같은 걸 기대했던 터라 살짝 당황했지만, 전반부의 일기와 편지가 구성이나 내용의 완결성보다 사료로서의 가치와 무게를 갖는 글처럼 느껴져 아쉬웠던 점을 상쇄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첫 번째 글 “한 인도인 과부의 희생”은 죽은 남편을 따라 불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는 아내와 그 의식을 목격한 기록이었다. 샬럿이 인도에 갔다는 정보는 없으니 이주한 인도인들의 현장을 벨기에에서 목격한 것 같은데, 내용 자체의 충격파에 어지럽게 혼재된 세계와 인식의 이질성이 크게 다가오는 글이었다. 의아했던 한 가지는, 과부는 스물 셋, 넷 정도로 보인다고 하고서 그 옆에 ‘열 여섯 살’ 난 딸이라고 쓴 부분이었는데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나이차여서 몰입해서 읽다가 의구심이 증폭했다. 원문의 오기라면 달렸을 주석이 없어 편집 과정의 오타인가 보다 싶은데, 이런 부분은 많이 아쉽다.  

이후 에밀리의 “고양이”, “해럴드의 초상, 헤이스팅스 전투 전날”, “어머니에게”, “자식의 사랑”, “형제가 형제에게”, “나비”, “죽음의 궁전” 그리고 샬럿의 “앤 에스큐-샤토브리앙의 「순교자들」”, “애벌레”, “죽음의 궁전”, “가난한 화가가 고귀한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가 뒤섞여 실려 있다. 대체로 두 사람의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 인간에 대한 양가적 인식, 독실한 신앙을 전제로 한 세계에의 사유가 녹아 있는 글들이다. “나비”, “애벌레”와 두 편의 “죽음의 궁전”은 같은 글감으로 각각 쓴 글이었는데 신과 자연의 위대함과 유한한 인간의 타락과 비극에 대한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죽음의 궁전”은 감정과 현상을 의인화하고 인간 세계의 질서로 구조화한 상상력과 묘사가 감탄스러웠고, 모티프가 되었을 원전이 궁금해졌다. 화가 초년생 조지 하워드가 밀로드 남작에게 후원을 요청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미래의 성취를 소망하는 마지막 글에서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이 어느 정도 드러나 흥미로웠고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샬럿의 간절한 바람이 투사된 느낌이었다.  

책 전반에 걸친 세심한 주석과 설명, 많지는 않지만 적절히 들어간 자료와 사진들,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자의 ‘옮긴이의 말’에 출판사의 ‘편집 후기’까지 모두가 무척 애써서 만든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과문한 독자로서 원작 언어에 따른 번역 글의 차이를 감지할 수 없었고, 구성과 편집에 들인 출판사의 노고를 책 말미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브론테 자매와 그들의 글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독자라면 무척 반가운 책이 될 것 같다. 초심자로서는 여성의 입지와 활동에 대한 제약이 당연하던 시대의 한계를 별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경계 없는 사유와 일상적인 글쓰기와 꾸준한 배움의 길을 걸었던 브론테 자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좋았다. 너무 짧은 생애로 다 펼치지 못한 탁월한 재능과 진취적인 미래 계획은 안타깝지만, 남겨진 흔적은 충분히 소중한 것 같다.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 김자영, 이수진 옮김
2023.8.25초판1쇄 발행, 미행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은 장벽이 되고]  (0) 2024.03.13
[아이다호]  (0) 2024.03.05
[더티 워크]  (0) 2024.02.24
[결혼·여름]  (0) 2024.02.15
[랩 걸]  (0) 2024.01.28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