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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07 꽃다지 콘서트 1
  2. 2013.07.05 김창기, 13년만의 외출
  3. 2013.06.18 무림파혈전
  4. 2013.06.06 실비아
  5. 2013.05.27 엔젤스쉐어
  6. 2013.05.25 비포미드나잇
  7. 2013.04.10 왕자가된소녀들
  8. 2013.04.08 원치않은,나혜석
  9. 2013.01.18 레미제라블
  10. 2012.12.19 우리도사랑일까
빛의걸음걸이2013. 7. 7. 14:07




소식을 들은 때부터 마음으로 꼽아두고 다른 일정이 없기만 바라고 있었는데, 이틀 모두 딱 겹치는 바람에... 뭐라 하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괜히 미안했으나, 꿋꿋하게! 근데 예상보다 길어진 공연은 좋았지만 골든타임에 빠져나온 게 마음에 걸려 총총걸음으로 돌아온 후원주점의 복작스러움 덕에... 몰입했던 공연의 여운이 휘발된 것 같아 복기하다보니 뭔가 몽환적인 느낌도 들고 많이 아쉽기도 하다.

신명도 흥도 무척 없는 편이라 학교 다닐 때 전주만 나와도 애들이 떼로 일어나 문선을 해대곤 했던 "바위처럼"이랑 "처음처럼"이 난 참 부담스러웠고ㅠ 한때 서너명 이상 노래방엘 가면 지정곡인 양 마지막곡이었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도 뭔가 계산된 감동을 들이대는 느낌에 심드렁했었고ㅠ 한참 전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선가 열렸던 꽃다지 공연을 본 적은 있지만 사실 큰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늙으막에 팬질을 하고 있는 건, 지난 가을 새누리당사 앞 농성을 하던 쌍차 투쟁문화제에서 꽃다지를 조우한 덕분. 지난 세기에 나온 정윤경 음반의 노래들, 특히 "조성만"을 참 좋아해서 mp3플레이어에도 휴대폰에도 늘 담아 자주 들었는데...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사람은 어디서 무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진 않았던 건 '그대 너무 서러워마요. 어차피 인생이 그런 걸. 떠나간 사람 지나간 일일랑 그저 세월에 묻혀가는 걸' 하는 가사처럼, 굳이 궁금해하고 찾아보지 않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따금 정윤경 독집 수록곡을 부르는 꽃다지의 무대를 만나면서도 그저 안타깝게 묻힌 좋은 노래라 다시 부르는 거겠거니 하고 말았던 듯. 

한참 뒤 "내가 왜?"를 들으며, 조합원의 글에 곡을 붙인 노래인가 했다가 정윤경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서... 이 양반이 어디에선가 여전히 노래를 만들고 있구나 싶어 반가우면서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었다. 생각날 때마다 유튜브 영상으로만 들은 탓에 꽤 오랫동안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없었지만, 그때 이후로 꽃다지를 새롭게 각인하게 됐던 것 같고. 그러다 지난 가을의 투쟁문화제에서 노래도 하게 되었다는 정윤경을 코 앞에서 목도하는 나름 놀라운 경험, 뭐든 대중을 상대로 활동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의 자장에 걸쳐지는 게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암튼 내게는 꽤나 반갑고 신기한 일이었다. 

이후 뒤늦게 유정고밴드며 꽃다지 4집을 찾아들으며, 정윤경이 만들고 부른 다수의 노래에 뒷북열광;; 세계의 모순을 구조적으로 인식하고 과학적으로 고민하는 것과 심히 거리가 먼 나는, 대체로 내 속의 불균형과 혼란이 확장되어 부조리한 세계와 만날 때 결은 좀 다를지언정 나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 고민 비슷한 걸 하게 되는 인간인데....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게 그만큼 공명과 공감을 불러일으켜준 노래들은 없었던 것 같다. 내 기분에 취해 구구절절 길어졌는데... 말하자면 이건, 22년차 꽃다지에 이제서야 무임승차해 응원을 보내는 이유에 대한 아무도 안 궁금해 할 고백 같은 거.

암튼. 공연에서 나는 얼마 전 담 넘어 들려온 안타까운 소식으로 오랜만에 떠올렸던 소풍가는날의 "이런 생각"이랑 결국 못 듣나 싶어 조바심이 났던 "당부"가 참 좋았다. 그리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마음에 깊이 담고, 무엇보다 음악인이고 싶다는 꽃다지에게 투쟁사업장 동지가 꽃다발을 전하는 모습에도 살짝 울컥. 성심껏 준비해 올린 공연을 보고 딴 소리만 늘어놓으니 좀 민망하지만... 좋은 시절 다 지나고 더 이상 자람의 토양이 아닌 운동판에서, 어쩌면 외줄타는 심정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세월을 견뎌왔을 꽃다지에게 참 고맙다. 그런 꽃다지를 다시 만나게 해 준 '기가 막힌' 정윤경의 음악에는 뭐 말 할 것도 없고. 

글 보실지 모르겠지만, 공연 끝나고 후원주점에 급히 돌아가느라 전하지 못한 인사는 이렇게 대신하는 걸로.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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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3. 7. 5. 12:52



7월 학전 공연 소식을 반가워하다가 조용히 포기하고 맘을 다독이던 차, 막 간절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고 싶어 신청했는데 운좋게 당첨된 ebs스페이스공감 김창기 공연, "13년 만의 외출"
맘에 걸려하면서도 하고 싶은 건 알뜰히 챙기며 살고 있으니 좀 뻔뻔한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껏 나를 키워주고 살아가는 데에 힘이 되는 것들, 그런 자리에서 다시 떠올리는 지난 기억들과 조우하는 반가운 얼굴들은 여전히 커다란 일상의 동력이다.
한시도 같지 않은 존재와 마음을 어떤 한결같음과 일관됨 혹은 일체감의 상태로 상정하고 자주 괴로워하는 내게,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 건네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되는 그의 노래들. 자기가 알고 있는 최고의 저주를 퍼붓는 어린아이가 그려져 궁금했던 '모두 지옥에나 꺼지라고 해'를, 참 좋아하는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를 라이브로 처음 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순조로운 정신과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들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와 고민이 제일 무거울 테고, 그걸 제삼자가 감히 비교하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울먹이는 모습을 보니 새삼, 십수 년 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먼저 간 친구를 떠올리며 얼마나 괴로웠을까. 게다가 그 이름을 제목으로 삼고 노래를 내놓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이 갈등하고 고민했을까 싶기도 하더라.
잊고 지냈던 옛 노래들을 들으며, 정작 난 달라진 게 없으면서 잔뜩 짊어진 부채감으로 아주 이상한 저울질을 하고 있었구나 또 깨달았다. 동물원의 첫 음반이 나온 때로부터 25년, 참 오랫동안 그의 노래에 공감하고 위로 받으며 지냈으면서 좀 배은망덕했다는 생각도.
어차피 삶은 무수하게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인데 그동안 정말 되도 않는 분법을 써가며 함부로 타인을 재단하고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내가 어떻게 살고 싶든 무엇이 되고 싶든, 그건 생각과 말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니... 지금은 그저 좀 더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욕구와 나를 분별하고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그 안의 균형을 찾는 수밖에 없을 듯.
암튼 고대하며 기다리던 순간을 맞은 누군가의 두렵고 상기되어 설레이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도 참 행복한 일이다. 게다가 시절과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성심 어린 노래들까지. 짧은 공연을 보니 학전 공연이 더 고파졌지만... 이번엔 여기까지. 그의 해사한 웃음에 겹쳐 떠올랐던, 힘겨운 표정의 얼굴들에도 가끔은 환하게 웃음이 피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좌충우돌 솔직하게 잘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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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3. 6. 18. 01:08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열리는 5기동인들의 2013 봄 페스티벌 '국가보안법'. 7월에 하는 그린피그의 "빨갱이. 갱생에 관한 연구"만 꼽아두고 있다가... 어찌어찌 토요일에 극단 거미의 "무림파혈전"을 봤다. 페스티벌의 두번째 작품으로 6월 13일부터 23일까지 공연.
별 기대없이 갔다가 엄청 웃으며 유쾌하게 보고, 공연이 끝난 후 프로그램 책자를 살펴보며 살짝 감동과 든든함까지. 다섯 극단의 단원들은 국가보안법을 페스티벌의 주제로 정하고서 몇 달 전부터 여러 차례의 워크숍을 진행하며 공연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낯선 국가보안법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가면서 적잖은 이들이 '이러다가 잡혀가는 게 아닐까' 하는 정체 모를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고. 혜화동1번지 5기동인은 지난 겨울 재능교육 투쟁에 연대하는 연극 "아름다운 동행" 연작을 올렸던 팀이기도 하다.
헌데 여덟 명의 배우와 (눈에 보이기로 만) 네 명의 스탶이 함께 진행하는 공연에 관객이 나 포함 아홉이었다는 안타까움^^;;;
80년대 초반 "무림파천황"이란 무협지가 이적표현물로 국보법에 걸려 작가는 구속되고 십여 년이 지나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된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와 "무림파혈전"이란 웹툰을 연재하는 작가에게 닥치는 압력과 자기검열, 갈등을 통해 창작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일상에서 공포 효과를 발휘하는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조명한다.
무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대치중인 강북/강남무림의 고수들이 펼치는 온갖 대결과 음모와 배신, 그 중심에는 그야말로 코에 걸고 귀에 거는 무림 최고의 비기 국보법경이 있다. 대를 잇는 다툼 속에 국보법경을 세습하고 지키기 위해 발휘하는 6조 신공 장면이나 작가의 친구인 길고양이의 놀이터로 또 취조실로도 변신하는 그네 설치물의 효과는 정말 압권이었던 듯^^
암튼 "무림파혈전"의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해 재현하는 갖은 만화적 상상력과 코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배우들의 연기 덕에, 문제의식은 잘 전달되면서도 소재와 주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발랄하고 참신한 작품이었다. 근데 이렇게 즐겁고 유익한 연극에 고작 아홉명의 관객이라니ㅠ
화려한 재미와 상업적인 성취를 좇는 연극들에 가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학로 한구석에서 묵묵히 고민하고 작업하며 유쾌한 무대를 선보이는 이들이 있으니 참 고맙고, 그린피그는 요즘 한창 '박정근되기'에 매진 중이라니 이 역시 기대된다.
혹시나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되시는 분들 "무림파혈전"으로 기분전환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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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3. 6. 6. 23:30


암튼, 요새 은연 중에 떠오르다 가라앉다... 책에서 봤나 영화에서 봤나, 전기오븐이었나 가스오븐이었나, 생각하는 줄도 모르게 뇌리를 맴돌던 실비아 플라스에 갑자기 맘이 가서. 이런 날 올 줄 알고 사놓기만 했던 "실비아"를 봤는데... 천당에서 지옥으로 급전직하하는 관계는 수틀린 마음에서 나오는 말 몇 마디로도 충분하다는 놀랍고도 당연한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물론 한 번으로 지옥행은 드물고 몇 번의 반복과 가속화하는 상호작용으로 더욱 공고해지지만, 아무리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도 상처 받았다는 느낌만은 선명하게 각인이 되는 것 같고 그렇게 생겨난 마음의 요철을 없는 셈 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벨자"로도 충분히 우울해서 두터운 그녀의 일기는 차마 엄두도 못내고 있었는데, 영화 역시 충분히 우울하다. 어찌됐든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그녀에게 휴즈가 다시 돌아왔던들, 언해피엔딩을 비껴갈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봤지만 절대 아니다에 한 표. 오랜만에 본 기네스 팰트로우는 여전히 참 매력적이더라만, 날도 더운데 마음으로 옮겨 온 우울한 여운은 살짝 성가시다. 밝은 영화로 덧칠을 하고 마무리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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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3. 5. 27. 04:33


그래도 켄로친데 놓치면 아쉬울 것 같고, 서대문 퇴근도 몇 번 안 남아 큰 기대는 없이 보러갔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노래 한 곡에 마음이 빵 터짐! 로비 일행이 히치하이킹에 성공해 몰트몰 증류소를 향하는 길에 펼쳐지는 시원한 풍경~ 배경으로 깔리는 전주를 알아채는 순간, 완전 신이 나서 나도 모르게 발장단이 맞춰지더라. 어렸을 때 "베니와준" 보고 너무 좋아서 ost 참 많이 들었었는데... 모자란 커플의 동화같은 사랑에도, 막막한 커플의 인생 반전에도, 이렇게나 딱 맞아떨어지는 노래라니. 족히 열 번은 넘게 반복해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니... 픽션과 논픽션의 세계를 딱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네.


시네큐브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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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3. 5. 25. 22:02

일요일 낮의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를 시원하게 까버리는 바람에 좀 김이 샜지만, 어쩌다보니 개봉 당일 비포-빠질을. 18년전 싱그러운 청춘의 열정으로 이끌리고 어긋났던... 9년 전 조울기 다분한 환경운동가와 아들 하나 바라보며 권태로운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작가로 재회했던, 엇갈린 인연을 새로 잇기엔 각자 많이 나갔다 싶었던 셀린느와 제시가 다시 함께 있는 배경은 수도 없는 신화들과 유구한 인간사의 유적들과 망망한 대자연이 공존하는 그리스다.
어느덧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뱃살에 담고 주름살에 새긴 중년의 그들, 꿈같은 기억과 거짓말 같은 재회로부터 시작된 운명의 사랑은... 일상에서 엉키고 설키며 켜켜이 쌓인 불만과 불신으로 숙성됐고, 서로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 수시로 난무하는 지경으로 승화됐다. 신경증적인 강박과 피해의식까지 겸비하게 된 셀린느와 그녀의 '지랄'은 물론이요, 이중의 부채의식과 죄책감을 감수하며 애쓰는 제시. '비포선라이즈'에서 맘껏 발산했던 풋풋함도 '비포선셋'에서 감지되던 두근거림도, 사십대의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선 이제 찾아볼 수 없더라. 뭐, 뜬금 판타지를 기대한 건 아니니까... 당연하지만.
다만 다시 안 볼 사이처럼 마음 바닥에 내려앉았던 말들까지 실컷 퍼붓고 난 뒤에도 실은 진심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음을 깨닫고 금세 다가가는 관계의 경지. 환상 속에 살 수 없음을 안다면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는, 더욱 나이 든 뒤에 돌아보면 사십대는 열두 살보다 조금 더 어려울 뿐이라는 둥의 이야기로 마음 밑바닥의 믿음을 건드리고 다시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관계의 정체 같은 것들이 좀 궁금해지기는 했다.
나이에 걸맞는 보편적 생애 경험의 자장을 이탈한 삶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가벼움을 다행스레 여기다가도, 이따금... 지지고 볶고 사네 못사네 견디는 시간들 속에서 자라나는 관계의 진하고 깊은 애틋함 같은 게 있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싶을 때가 있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세계가 주는 상상 속 안온함의 실체는 과연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건 때때로 엄습하는 타인의 지옥을 버티고 또 버텨낸 이들만이 공유하는 전유물인 것인지 말이다.
일단 살다보면 언젠가 알 수 있게 되거나 영 가망 없겠다는 판단이 서면 자연스럽게 신포도 방어기제가 작동하겠지만. 내심 배수진 삼아 든든히 여겨왔던... 점점이 떨어져 각기 외로운 존재 자체의 연대. 다른 거 없고 그냥, 우리 모두 똑같이 외로운 존재들이라는 사실 자체가 주는 어떤 연대감,이 남은 세상살이의 자양분으로 썩 든든한 게 아닐 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살짝.
아무려나.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친구처럼, 이십대 초반 이후 띄엄띄엄 마주칠 때마다 한동안 무방비상태의 마음이 되고는 했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라 들었다. 하여 고마웠고... 또 고마운 마음,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중견이 된 두 배우에게 그리고 18년을 함께 살아온 또래의 페르소나 제시와 셀린느에게. 그리고 오늘은 혼자 산 지 딱 십 년이 되는 날이다. 나름 대견쓰~ 스스로에게도 좀 고마운 마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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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3. 4. 10. 10:00

 

 

 

그러니까 십오 년 전, 십오 년 후의 내가 좋아하는 공연의 포스터를 붙이고 티켓을 팔고 무대의 준비를 돕고 하면서 대학로 어느 구석에 머물고 있을 거라는 상상에 한 점 의심도 없던 시절. 공연에 대한 기대를 잔뜩 품고 들뜬 걸음으로 지하 계단을 내려가고는 했던 학전블루에서, 처음이자 (아직은) 마지막인 여성국극 "진진의 사랑"을 꽤 여러 번 봤었다.
독특한 개성의 연기자로 희화화된 이미지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던 이정섭의 연출과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데 나로서는 알 수 없었던 몇 분의 노배우들 그리고 여성국극 주연이 내뿜는 포스가 저런 건가 싶게 멋진,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는 이옥천 선생님이 그곳에 있었다.
지하 소극장의 시간은 언제나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몰입의 공간. 여러 차례의 반복으로 처음의 낯섦이 자연스러운 친숙함으로 변했고, 비현실적일 만큼 진한 분장에 우렁찬 목소리와 당당한 자태로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무대 위의 그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십오 년, 우연찮게 접한 "왕자가 된 소녀들" 소식에 잊고 살던 이름 세 글자와 그때의 기억 몇 조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지금의 아이돌 못지 않은 팬덤을 몰고다녔다는 여성국극. 극단원이 되겠다고 집 나와 학교도 결혼도 뒷전인 채 전국을 누볐던 수십 명 여성의 무리, 돈도 모르고 남자도 모르는 젊은 처자들이 왕자도 되고 장군도 되어 호령하는 무대 위 세상에 청춘을 걸었다 했다. 간혹은 무어라 명명도 없었을 커플이 되어 하와이로 떠나는 과감한 선택을 했고, 대개는 국가 재건 시기 관제 문화 육성 정책에서 장르적 배제 대상이 된 여성국극과 다르지 않은 운명을 겪었다 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일세대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나고, 여성국극의 매혹에 사로잡혀 인생을 건 몇 안 남은 '할머니'들은 수십 년째 현역으로 변방의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기존 혼합창극단의 남자들을 내쫓고 여성들만의 자유로운 예술공동체를 만들기도 하고, 혈서는 기본에 가상결혼식을 꾸미는 사생팬이 생겨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는 여성국극이 남성 중심의 새로운 국가 질서에 의해 철저히 배제된 결과다.
정부 지원 하에 장르별 국립예술단이 속속 창립되었지만 여성국극의 자리는 없었고, 독보적인 인기와 생동하는 공동체성은 새로운 권력이 된 창극계와 평단에 의해 오히려 폄하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국극의 성공에 힘을 보탰던 당대 최고의 연출가와 안무가들은 자신의 과거를 쉬쉬했고, 그야말로 흥망성쇠를 겪으며 여성국극과 운명을 함께 한 극소수 예인들과 수십 년 변치 않은 소수의 팬들만이 서로를 지켜왔다. 어쩌면,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재구성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완전체를 이뤘던 여성국극(단)은 그 자체로 불온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고사 직전의 상태로 긴 세월을 이어온 여성국극, 수십 년 쇠락의 길을 피하지 않고 서로를 부둥켜안은 "왕자가 된 소녀들"을 감독은 오 년 동안 카메라에 담았다 했다. 배급까지 자력으로 해결하며 일 년 간의 공동체순회상영과 후원 조직으로 마침내 개봉을 일주일 여 앞 둔 영화의 감독은 울먹울먹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영화가 어떻게든 여성국극이 지속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억 저 편에 내려앉아있던 이옥천 선생님과 "진진의 사랑"을 오랜만에 떠올리며 되새기는 감회 못지 않게... 힘 없는 존재들의 초라하고 정다운 어울림, 순정하고 오롯하게 갈 길을 가는 이들의 생명력에 마음이 먹먹해지고 또 환해졌다. 생을 걸 수 있다면 해피엔딩 아닐까.

 

.. 130409pm2,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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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3. 4. 8. 11:10

 

 

 

어느 주말 어떤 일정이 생길 지 알 수 없지만, 지난 번 "아름다운 동행"처럼 매진될까 싶어 일찌감치 예매한 그린피그의 "원치않은, 나혜석". 갈등을 좀 하다가 달랑 며칠 간의 공연이라 다시 볼 기회는 없을 것 같아서... 인천과 나혜석, 뭔가 근대와 현대의 불화가 절묘하게 수렴되는 공간과 인물 같아 불균형 유전자 보유자로서의 기대가 적지 않았고, 낯선 인천에 대해 나름의 각인이 된 "고양이를 부탁해"의 어떤 장면들도 간만에 떠올렸다.
비오는 음산한 오후, 퇴락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퇴락한 시공간을 만나러 간다는 정말 주관적인 의미부여를 한껏. 십여 년 전 세 사람이 함께 작업한 음반을 흘려들으며 지난 작은책을 읽는 중에 두 번쯤 시각을 압도하는 청각의 자극에 굳이 노래 제목과 음색을 확인하고서, 세월과 무관하게 공명하는 감성의 일관성 같은 걸 확인한 듯 혼자서 괜히 흐뭇해도 하며... 좀은 세계의 끝 같은 서쪽 육지의 종착역이자 이 땅 최초의 철도가 출발했다는 인천역에 도착-
오래 된 역사 맞은 편엔 인공적이고 이물스러운 차이나타운의 입간판과 중국풍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잔뜩 흐린 하늘과 인적 없는 거리 탓인지 을씨년스럽기도 했지만 여행지의 산책자마냥 한적한 맘으로 두리번두리번 주마간산 구경을 하며 걷다 보니 금세 공연장에 닿는다. 인천역 부근은 용도폐기된 개항 시기의 유적들을 복원하거나 박물관으로 꾸미고 차이나타운이랑 이것저것 묶어 개발한 관광특구인 듯, 공연장인 인천아트플랫폼도 그 안에 속해 있었다.
매진씩이나 우려했으나 날씨 탓인지 접근성 탓인지 관객은 스무 명 남짓, 그나마 일인극이고 집단적 박장대소의 포인트가 없는 작품이라 민망하진 않았다. 배우는 화가지망생이었던 나혜석 연구자로, 위작과 자화상 논란이 따라붙었던 나혜석 그림의 주인공으로, 식민지 근대 여성 나혜석으로, 작품의 해설자로도 분하며 1인칭과 3인칭을 오간다. 공연은 쓸쓸하게 죽은 지 오십 년쯤 지나서야 요란스레 재조명되는 나혜석에 관한 기억과 기록의 편린들을 들춰낸다.
당대에도 사후에도 보고 말하는 이들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선망과 열광과 오해와 비난의 극단을 오가는 반응과 평가 속에 갇히곤 하는 나혜석. 그가 1933년부터 2년 간 열었었다는 '자기만의 방', '여성미술학사'의 간 데 없는 흔적과 결국 '집 없는 노라'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정황들을 소극처럼 간증하기도 한다.
기록으로 남은 두 개의 주소지를 오가며 찾고자 하는 진실(?)은 입주한 수많은 사무실들이 그 자체로 이율배반인 커다란 건물에서도, 두드려도 자동응답만을 반복하는 휴관으로 굳게 닫힌 미술관에서도 당연히 만날 수 없다. 12권의 책과 97편의 학위논문과 123편의 학술지 소논문 속에 범람하는 나혜석-들 속에서 어떤 진실을 만날 수 없고, 실은 그 불가능성을 가로지르며 직조된 무수한 겹겹의 기억과 기록 속에서 재구성된 수많은 나혜석-들이 있을 뿐이다.
디귿자 객석에 둘러싸인 꽤 넓은 무대 바닥 가득 놓여 있던 방대한 연구의 흔적들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의 움직임에 의해 어지럽게 흐트러진다. 매끈하게 정리된 텍스트 속에서, 가지런히 나열된 '사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진실이란 결국 없는 것일까.
연출은 이번에도 '연출의도 같은 것은 없음'이라는 연출의 글을 남겼고, 극작/드라마터그는 긴 글 속에서 몇 가지 의문을 던졌다. 예술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특정 인물을 다루며 사기 치지 않으면서도 허무함에 빠지지 않을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 공연을 보고 프로그램을 다시 들춰보며 명사 몇 개를 대입해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린다.
이번에도 역시 커튼콜은 없었다. 결말과 환상을 동시에 제공하는 깔끔한 마무리 뒤에 급반전처럼 이어지는 환호의 커튼콜, 공고한 공연의 도식에 오래 익숙했던 나도 이제는 좀 자연스러워졌다.
그린피그의 공연에는 나랑 다르지 않은 고민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반가움이 있다. 몇 년 동안 놓친 공연들이 새삼 아쉬울 만큼, 좋다. 고맙게도 관람료마저 참 저렴하다. 머지 않아 올릴 무대를 위해 요즘 그들은 국가보안법을 공부 중이라 들었다, 기대를.

 

.. 130406pm6,인천아트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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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3. 1. 18. 17:25



무려 단체관람 덕에 "레미제라블"을 봤다. '민중의 노래'가 대선 패배를 위로하는 카타르시스마냥 회자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꼭 그렇진 않더라도 괜히 시큰둥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경험한 적이 없으니 함부로 말할 수 없겠지만 말로 글로 감정이입으로 참 쉽고 무수해진 우리 시대 혁명 인식의 현주소가 이런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 것도 내놓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 아무런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바라고 기념할 수 있는... 어쩌면 박제가 되어버린 안전한 혁명. 나 역시 예외는 아니고.
근데 물론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새로운 뮤지컬 각색과 스펙타클한 연출, 헐리우드 초특급 배우들의 대거 출연으로 승부하는 "레미제라블"에 대해 혹은 어쨌거나 더 이상은 노예로 살 수 없다며 자명한 패배 앞에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는 이들에 대해, 단지 선거를 통한 변화를 갈망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동일시와 정화의 감정을 나는 납득하기가 힘들더라.
투쟁의 상승 국면에서는 집 안의 가구를 아낌없이 던져 바리케이트를 만든 사람들이, 소수의 결사항전이 되자 함께해달라는 호소를 외면한 채 가구를 집어던졌던 창문을 스르르 닫아버렸다. 저항을 멈추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죽음을 맞은 대다수의 사람들, 결국 나란히 눕혀진 시신들을 보면서 (감히) 윤상원과 전남도청이 떠올랐다. 
함께 싸우겠다고 말은 하지만 지난하게 이어지는 수많은 싸움들에 나 역시 스르르 창문을 닫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바닥에 고인 핏물을 닦아내며 누군가들의 장렬한 최후를 기억하는 것으로만 면피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영화를 보며 또 나를 돌아보며, '함께 하겠다'는 말의 무게를 새삼 실감했다. 야근과 업무과부하가 핑계만은 아니었지만ㅠ 하는 것 없이 내달리기만 하는 생각의 중심은 움직이는 두 발로 잡는 게 맞겠지... 생각하며, 마음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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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2. 12. 19. 23:55

 

 

스치는 입소문과 너무 평이한 제목 사이에서 볼까 말까 했던 영화, "take this waltz"가 원제인 "우리도 사랑일까". 영롱한 햇살이 비치는 주방, 트레이에 반죽을 붓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며 머핀을 굽는 여인의 실루엣은 뭔가 지치고 공허해 보였다. 오븐 속에 트레이를 넣고는 망연자실 주저 앉고 마는 그녀, 그리고 햇살 속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 그렇게 시작되어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싶었는...데,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게 페이드아웃. 그렇지. 그 어떤 격렬한 감정도 결국은 시작된 그 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녀가 잠시 시덥잖은 눈길을 주고 받고, 참으로 우연하게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게 되고, 그도 모자라 알고 보니 바로 이웃에 살고 있더라는. 거의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어이 없는 개연성을 배경으로, 대체 뭔 일이 있었다고 저렇게나 서로 끌리고 난리냐 싶게 좀은 이입되지 않는 감정선을 그리는 듯 하더라만. 생각해 보면, 참 무서운 영화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도 버거워 어찌할 줄 모르는 일찍 결혼한 여자, 시도때도 없는 유치한 장난으로 내면의 깊은 불안을 달래고 등을 보이며 요리하는 남편에게 무시로 달라붙으며 함께 있음을 확인하고 절망하는 마고. '인생에는 수많은 빈 틈이 있고 그걸 다 메우면서 살 수는 없다.'는 술주정뱅이 시누이의 쏘아붙이는 진심도 '왜 그냥 괜찮기만 했어요?' 시큰둥한 결혼기념일 감상에 대한 데이빗의 살가운 질문도, 외롭고 외롭고 또 외로운 그녀의 영혼의 바닥을 건드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처럼 깔깔대다가도 금세 물기를 머금는,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묘연한 마고의 표정이 불안과 허무와 긴장을 내려놓은 유일한 순간은 온전히 혼자가 되어 해방감을 만끽하는 스크램블러 엔딩씬. "take this waltz" 노래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습하는 권태를, 감정과 관계의 신랄함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파헤쳐보이는 영화는, 관계와 사랑이 아니라 존재와 불안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화의 시작과 끝, 머핀을 만들며 오븐 앞에 넋 놓고 주저앉은 풍경 같은 마고와 햇살속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데이빗. 그들이 주고받는 참으로 헛헛한 "사랑해, 사랑해"에 이어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자니, 심호흡 같은 한숨이 절로 나더라. 살아가는 일의 심연을 떠올리게 하는, 무참하도록 솔직한 영화였다. 실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애매하게 끼어 있거나 붕 떠있는 관계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주인공들에 심히 공감하며, 그런 상태와 상황이 세계를 온통 뒤흔드는 불편한 삶의 토양이라는 걸 수긍하며, 저 멀리 떨어진 곳의 누군가가 영화로 만들어줬다는 게 참 반가웠다. 하여 꽤나 오-랜만에 혼자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 12월의 어느 날.
영화가 선사해 준 현실감각으로 담담히 돌아본 주말의 결론은... 해석을 통한 호감의 고양과 그 자명한 한계를 알지만 필요했던 시간들을 이제 떠나보내면 어떨까 하는 것. 교감되지 못하는 감정은 결국 이렇게 담담한 인정을 부른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7개월을 넘게 버텨준 나의 허상에게, 마음 깊은 곳의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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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