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봤다. '막판에 뜨는 사나이'. 제목이 좀 구려서(?) 아주 땡기는 건 아니었지만, 친한 언니가 기획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박광정 아저씨의 연출이어서 보고왔다. 거의 2년 만에 보는 연극. 인터미션 포함 꽉 채운 3시간의 긴 작품이었는데, 초반에는 살짝 지루한 감이 있었지만 아주 재미있게 보고 왔다. 역시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박광정 아저씨의 연출과 대체적으로 고른 배우들의 연기 덕에 후반부에는 그야말로 몰입. 17년 전 은행강도와 의로운 시민이었던 두 주인공이 '그때 그 사건'이라는 프로그램을 계기로 만남을 갖게 되는데, 그 과정을 통해 매스컴의 영웅만들기와 보여지는 선과 악의 허구를 꽤나 냉소적으로 보여주는 무대였다. 내용 자체가 관심을 확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었지만, 실제 상황과 프로그램의 연출 상황이 한 무대에서 대비되면서 각 캐릭터가 갖고 있는 입장이 매우 선명히 부각되고 배우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들이 꽤나 우리 인생과 닮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종종 많이 공감이 됐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강렬했던 건 '내가 연극을 본다'는 것 자체. 연극을 보면서 자꾸만 추억이 보이고 꿈이 보이고... 해서 조금 난감하기도 했지만 그 난감마저도 진정 행복했다. 마지막 공연이라 커튼콜때 박광정 아저씨도 무대 인사를 하셨는데 추레한 고독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 각종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여전히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정말이지 브라운관의 그의 이미지는, 나로서는 억울하기(?) 그지 없다. 너무나 마르고 피폐해 보이는 그를 보자니, 마치 내가 연극을 외면하고 있어 그랬던 것 같은 어이없는 착각이 일 정도. 그러면서 또, '마술가게'와 '저 별이 위험하다'와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와 '비언소'와... 그런 무대를 바라보던 시절이 떠올라 괜한 상념에 젖기도. 우리 영화도 참 좋기는 하지만, 여전히 무대를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 참 고맙고 미안하고... 그랬다. 아무려나, 작품 자체가 재미있고 좋기도 했지만 그냥 연극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행복한 마음이 되어 '가지 않은 길'을 되뇌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광화문 곳곳에 붙어있어 화들짝 놀랐던 김현식 아저씨의 포스터도 한 장 뜯어 고이 모셔왔다. 벌써 15년 전. 본격적으로 찬 바람이 불면, 김현식 아저씨의 기일이 돌아온다. 내 인생 첫 번째 죽음의 기억. 나는 생전의 그를 단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었지만, 그의 죽음은 여고시절의 내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어떤 위안을 안겨준 독특한 경험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지만, 다시는 변하지도 않는 고인의 존재. 그리고 2년이 지난 어느 겨울 어렵사리 찾아간 에덴동산에서 나는,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고 믿고 있다. 온 거리에 '내 사랑 내 곁에'가 차고 넘치게 울려퍼지던 시절에는, 아무런 의미없이 사람들의 귓전으로 흐르는 그의 노래가 안타까웠고 누구나 함부로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나는 정말 싫었다. 한 동안 '김현식'이라는 이름을 단 함량 미달의 음반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싫었고, 언젠가부터는 그런 상업 기획조차 아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는 조용히 잊혀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를 위해 무대를 오르는 사람들. 어쩌면 살아 숨쉬며 노래하면서도 망자 만큼이나 그 존재가 잊혀져가고 있는 그들, 신촌블루스 정경화 최이철 김동환... 이 공연이 어떻게 만들어져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참 고맙다. 하필 엄마의 환갑 생신날이어서 직접 가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주제 넘게도 아직 기억되고 추모되고 있음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