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에 해당되는 글 477건

  1. 2011.06.20 수면의과학
  2. 2011.06.20 오래된정원
  3. 2011.06.20 굿모닝,나잇
  4. 2011.06.20 후회하지않아
  5. 2011.06.20 싸이보그지만괜찮아
  6. 2011.06.20 라디오스타
  7. 2011.06.20 내청춘에게고함
  8. 2011.06.20 천하장사마돈나
  9. 2011.06.20 다세포소녀
  10. 2011.06.20 괴물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35







중간에 잠에서 깨면 이어서 꿈꾸는 일은 별로 없는데, 우스운 끼워맞추기처럼 '수면의 과학'을 보러 가는 날 아침 앞뒤없이 꿈이 이어졌다. 현실과 혼동할 걱정은 없지만, 언젠가 그리 됐으면 싶은 애틋함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 꿈의 잔영에 겹쳐졌다. 성남의 골목골목을 돌아 부천에 이르는 버스는 있지도 않고, 언제적인지도 마땅히 가려낼 수 없는 그의 모습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결국 사라져버렸다. 끝나지 않은 숨바꼭질처럼, 오늘밤에도 찾아와줬으면 싶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창밖을 보면서도, 어인 일인지 서울행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꼭 보고 싶었는데 늦잠을 자버렸고. 그저 좀 상쾌하자고 '수면의 과학'을 찍고, 오래전 예매해 둔 '커피와 담배'를 보고 올 참이었다. 
 

혁명의 이름이 되기 전 낡은 모터싸이클에 몸을 싣고 남미를 떠돌던 에르네스토는, 일곱 살짜리에게나 딱 어울릴 것 같은 뜨개모자를 쓴 파리의 이방인이 되었다. 머리만 처박으면 사라지는 줄 아는 멍청한 꿩처럼, 난감한 상황에서는 얼굴을 처박거나 뜨개모자로 눈을 가리며 현실과 몽환의 경계를 지우며 살아가는 서른 즈음의 스테판. 인류의 재앙을 기록한 '파멸학'의 달력을 만들고 싶은 이 독특한 예술혼의 소유자는, 그렇고 그런 달력회사의 식자공이 될 운명에 휩쓸려 파리에 당도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농담과 희롱을 일삼는 상사와 불쾌할 것 까지는 없지만 걷잡을 수 없이 엉뚱한 동료들 그리고 평균적인 속됨과 계산형 인간인 사장은 첫 만남으로도 그의 삶에 재난의 소재로, 악몽의 소재로 자리잡아 버렸다.
 

달력회사의 취업이 그랬듯, 엄마가 행사하는 애증의 지배와 구속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유아적 청년이 일상을 견디는 방식은 오로지 공상의 복수와 징징거리기다. 마침 앞집으로 이사온 스테파니에게 마음이 끌리는 스테판은 어쩐지 아빠같은 그녀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좋은 손재주에도 무엇이건 끝내는 법은 없는 그러나 아들의 인생에는 끊임없이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엄마와 어딘가 닮았다. 그녀를 향한 이끌림은 은근하고도 지독한 핏줄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도착된 양가감정일까.
 

토요일 저녁이기는 했지만, 극장은 송송 튀어나온 부드러운 요철처럼 좌석을 채운 머리들로 그야말로 '스폰지' 하우스. 시덥잖은 코미디 프로의 효과음처럼 우르르 터지는 웃음들이 어쩐지 영 낯설었다. 며칠 후까지, 영화의 잔상으로 남은 공상은 이미 들어섰지만 2007년 달력을 만들어볼까 하는 것. 1월은 김광석, 4월은 커트 코베인, 8월은 정은임, 11월은 김현식 아저씨, 12월은 존 레논 ... 그러나, 아 우울하다. 아멜리에 메일버전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도 역시, 나의 음울한 상상력은 이 정도에서 멎고 말다니.  



2007-01-11 01:29,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법사들  (0) 2011.06.20
커피와담배  (0) 2011.06.20
오래된정원  (0) 2011.06.20
굿모닝,나잇  (0) 2011.06.20
후회하지않아  (0) 2011.06.20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32






퇴근 길 '오래된 정원'을 봤다. 오랜 감옥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온 오현우가, 부모의 지인을 가장해 낯 모르는 딸과 나누는 전화 통화에서 딸이 묻는다. 아빠는 행복했냐고. '혼자만 행복하면 나쁜 놈이 되는 시절'이었다고 그는 에둘러 대답한다. 광주, 건대항쟁, 구로동맹파업... 영화는 그런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절의 공기와 무관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의식하지 않을 뿐 호흡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프고 피눈물 나는 시대에 정면승부하지 않더라도, 유전자만큼이나 깊이 시대의 대기는 삶에 개입한다.
 

6,70년대적 낭만에 번지없는 향수를 느낄 때마다 74년생 나의 시절이 안타까웠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아날로그의 끝자락이나마 붙들고 살았던 세대였다는 게 다행스럽다. 존재가 하나이듯 삶을 실어 흐르는 시절도 어쩌면 하나,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모든 것이 '소비'로만 치닫는 세상이 가끔 무섭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결국 감내한 자의 웃음으로 피어오르기도 하지만, 벗어날 길도 없이 너무 멀리 실려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혼자만 행복하면 나쁜 놈이 되는 시절, 막막하고 절망적이지만... 가끔은 이제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 무섭다.




2007-01-05 21:46,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피와담배  (0) 2011.06.20
수면의과학  (0) 2011.06.20
굿모닝,나잇  (0) 2011.06.20
후회하지않아  (0) 2011.06.20
싸이보그지만괜찮아  (0) 2011.06.20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29






다짐도 다이어리도 없이 맞은 새해, 이제는 좀 무연해지고 싶다는 생각이었지만 아닌 척 꽤 기념주의자인 내가 온전히 그럴 리 없어 어제 집에 다녀오는 길 영화를 봤다, '굿모닝, 나잇'. 1978년 로마에서 실제로 있었던 지하혁명조직 붉은여단의, 우파와의 연정을 구성한 기독민주당수 알도 모로 납치 살해 사건을 다룬 영화. 베르톨루치와 비견되는 고집스런 좌파 감독이라는 마르코 벨로키오의 이름도 처음 접했고 삼십 년 전 이탈리아를 뒤흔들었다는 사건 역시 모르는 바 였지만, '잔혹하고 비참한 비극의 결말에서 무엇인가 발견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전언에 혹해버렸다. 새해 벽두에 보기엔 꽤 심란한 영화겠다 싶었지만, 일상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나름 의지 어린 선택이기도 했다.
 

붉은여단의 당수 납치 살해 사건의 전말이라는 간략한 줄거리에 실린 영화는, 스크린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도의 긴장이 객석에 앉은 나까지 이따금 바튼 한숨을 몰아쉬게 만들만큼 농밀한 공기를 담고 있었다. 각자의 신념으로 감금하고 감금당한 자들의 갈등과 고뇌 그리고 암중모색의 과정이,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몽환과 상상으로 버무려져 내내 가위에 눌린 듯 가슴이 답답했다. 극도의 긴장으로 터질 듯한 밀실의 고립을 극대화하는 풍경들과 대비되는, 윤리를 무화하는 전도된 살풍경 속의 대의와 당위, 그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는 주인공 키아라의 시선과 감정이입. 두근거리는 심장을 찢을 듯 초현실적으로 폭발하는 음악들. 심호흡이 필요한 영화였다.
 

신혼부부를 가장해 빈 아파트를 보러 간 조직원들에게 방백처럼 그러나 사무적으로 집안 곳곳을 설명하는 중개인의 목소리로 영화는 시작된다. 집중적이지만 형식적으로 계약의 성사여부에 사활을 건 중개인의 관심과 아지트로써의 효용을 남 몰래 가늠하는 두 주인공의 예리하고 긴장된 시선, 딱 그 거리만큼 영화는 공고하고 복합적으로 세계를 나눈다. 미궁의 큐브와도 같은 아파트에 갇혀 이념의 호흡을 고르는 붉은여단의 사인방, 그들은 목숨과도 같은 혁명의 대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계획을 수행하고 성공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무시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윗층의 이웃, 여유로이 베란다 밖을 바라보는 정원 너머의 이웃,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일터의 동료 그리고 아버지의 기일에 모인 일가친척 사이에서도 키아라는 불안한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강박적인 경계의 촉수를 곤두세울 뿐이다. 심지어 알도 모로를 가둔 가벽 책장 뒤의 감금실보다 그들이 활보하며 생활을 가장하는 너른 거실의 공기가 더욱 팽팽히 당겨져 폭발 직전의 고압을 머금고 있다. '당신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어요' 유유히 담배를 물고 베란다 너머 관음의 시선을 보내던 이웃의 비밀스런 발설은, 허탈하리만큼 섬뜩하게 그들이 살고 있는 다른 세상을 증명한다. 
 

실제와 환상을 마디없이 오가는 영화는 결국 아무 것도 웅변하지 않는다. 사건의 결말은 담담히 자막으로 정리되고,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는 객석 위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뒤에야 골치가 아파왔다. 휴머니즘에 안주하는 것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혁명의 대의와 현실의 정체 사이에서 머뭇거리거나 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비단 목숨을 둘러싼 운명적 결정처럼 극적인 순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극좌 모험주의의 반면교사라는 깨달음은 어쩌면 후대에나 가능한 것, 그들 모두가 '고결한' 이념의 제물이자 제사장으로 역사의 격동에 휘말리고 만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영화는 때로 현실보다 한결 가볍고 자유로운 것이어서, 새벽 안개 사이를 유영하듯 걸어가는 알도 모로의 뒷모습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새해 벽두용으로는 역시 무거웠다. 다짐 없는 다짐의 텍스트로 삼기에 영화는 너무 많은 질문을 던졌고, 삼십 년 전 그들의 세계와 지금의 나를 감히 하나의 맥락으로 생각할 근거도 없다. 감독이 발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알도 모로의 납치 과정에서 다섯 명이 죽었고 아직 그의 유족들은 지옥같은 죽음의 기억을 생생히 새기고 있을 것이다.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지만 다시 헤집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끔은 차원을 달리 하는 갖은 것들이 '나'에게로 와 하나의 상징으로 포개지기도 하는 법. 집을 나서기 전 읽은, 아침부터 심사를 복잡하게 만든 한 통의 메일이 떠올랐다. 기억에서 지운 지 3년하고도 8개월, '부디 읽어주기를 바래'라는 제목을 한참 바라봤었다. 2년이 넘도록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용기를 냈다는 그의 편지는, 고해성사하듯 진심의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오랜 자학의 흔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긴 독백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었지만, '잘 살아' 제목을 붙여 짧은 답장을 보냈다. 담담하고 냉정하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간들을 이제야 끊어냈다,고 생각했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이었던,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나는 '거대한' 무엇 아래 묻어버리고 싶었던 걸까. 잘 살아, 내게 쓰는 편지에도 달아주고 싶은 제목이다.




2007-01-03 00:44,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면의과학  (0) 2011.06.20
오래된정원  (0) 2011.06.20
후회하지않아  (0) 2011.06.20
싸이보그지만괜찮아  (0) 2011.06.20
라디오스타  (0) 2011.06.20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26







해 떨어진 뒤의 필름포럼은 언제나 충분히 스산하다. 옥상 난간에 다가서면 시선이 닿는 곳에는 하늘을 조각낸 반짝이는 마천루들이, 고개를 떨구면 퇴락한 악기점과 텅 빈 짐칸을 허옇게 드러낸 쓸쓸한 용달이 즐비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꾸역꾸역 모여들어 담배를 피워무는 청춘들 속에 잠시 섞여있자면, 어쩐지 내남없이 휘황한 서울의 찌끄러기들만 같아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이상한 친밀감이 번지기도 하는 곳. 그리고 어쩌면 거기 낙원에서는 무척이나 어울리는 영화들을 줄창 틀어댄다.  
 

한 청년이 있다. 시골 보육원 출신의 갈 곳 없는 천애고아. 물놀이하던 친구의 반짝거리는 등허리가 눈부셨던, 물가의 추억을 뒤로 하고 서울로 상경한 청년의 이름은 수민. 부빌 언덕이라고는 가족뿐인 철옹성의 자본주의 이성애 질서 속에 던져진, 가족도 돈도 없고 심지어 동성애자인 해사한 스무 살의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한눈에 봐도 '재수 없는', 번듯하나 소심한 또 한 청년이 있다. 빽 좋고 교양 있고 허세 가득한 부모 밑에서 좋은 차에 많은 돈 남 부럽잖은 낙하산까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동성애자인 그의 이름은 재민.
 

퀴어-멜로라는 아직은 극단의 수용성을 보이는 두 이름을 나란히 걸치고 있는 영화는 새롭고도 뻔했다. 극장 개봉을 거친 영화 중에서는 가장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또한 당당(혹은 담담)하게 동성애를 그려내고 있지만, 갈등의 골간을 이루는 가족, 계급, 감정, 이성애 혹은 동성애라는 맥락 위에서 이야기는 사정없이 통속적이고 진부하며 한편 톤을 달리하는 후반부는 좀 당황스럽고 이물감이 느껴졌다. 이성애자 수북한 세상에서 연애의 현장을 목도하는 일은 그야말로 다반사, 그러나 동성애자를 아무리 친숙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해도 그 내밀한 현장을 시퍼렇게 눈 뜨고 구경할 길은 없었던 탓일까. 주인공 청년을 이성애적인 관계로 치환한다면 그렇고 그런 삼류멜로쯤에서 그치고 말았을지 모를 이야기가, 어쩌면 그 적나라한 묘사로 인해 빛나는 생동감을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데, 참 이상하지. 현실을 위해 사랑을 버리고 몸을 파는 수민과 사랑을 위해 현실을 뒤로 하고 매달리는 재민이 마침내 연인이 되었을 때 나는 너무 설레었고, 그들이 사랑을 나누며 짓는 웃음이 너무나 싱그럽게 느껴져 온몸이 간질거리기까지 했다. 절묘하게 어긋나는 타이밍과 서로를 가로지르는 단단한 오해의 목격자가 된 나는 스크린에 빤히 비치는 주인공을 향해 마음 속으로 '말해, 말해' 외쳐댔다. 좀은 뜬금없이 '귀향'과 '파고'의 이미지를 불러내며 어수선한 희비극의 기운을 잔뜩 드리운 후반부, 이렇게 끝나면 정말 너무하잖아 안타까운 눈물이 어른거렸고 마침내 해피엔딩에서는 마음이 환해졌다. 
 

그들 사랑이 그리는 좌표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서 나는 계급을 떠올리며 적의를 품고 사랑을 떠올리며 희망을 품는, 아주아주 촌스러운 관객의 역할을 성실히 완수했다. 하염없는 감정이입에 좀 머쓱해져서 머리 속으로 허접스런 핑계같은 감상들을 다 떠올리다보니... 아무리 아닌 척 해도 반 이상은 관음증, 마이너리티를 향한 오리엔탈리즘, 의식적이거나 위선적인 역차별의 옹호. 찔끔찔끔 찔리는 거 인정. 게다가 실은 요즘 며칠, 쨍한 사랑 이야기에 취하고 싶던 참이기도. 뜬금없이 '사랑' 비슷한 게 궁금하기도 하고 그 사랑 때문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는 애타는 마음이 땡기기도 하던 차, 잘도 걸렸다. 그래서 보는 내가 그렇게도 애가 달아 어쩔 줄 몰랐던 걸까. 
 

아무려나, 둘러싸거나 가득 채운 모든 것들을 다 응원하고 축복해주고 싶은 영화를 오랜만에 만나버린 것이다. 편파적인 김에 덧붙이자면... 서울을 '싹 다' 돌아다니고 싶다던 가람, 그렇게 바라던 차가 생겼지만 작은 옥탑방에 사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드라이브 한 번 못하고 떠나버린 어린 죽음. 감히 계급모순 씩이나 떠올리게 만든, 그의 영혼이 흩뿌려지던 삭막하고 차가운 서울 거리에 흐르던 음악의 여운. 'Oh, Jesus. Hallelujah...' 정말이지, 그 대목에서 성속의 경계를 가볍게 허물고 하나로 엮어버린 방준석의 목소리는 나를 죽일 셈이었던 게지. 그리고 아무리 뒤져도 사진을 구할 길 없는, 조용한 잔상으로 강렬히 남은 구덩이 속 수민과 재민의 모습. 오늘 참 고마워, 너무 추웠지만 나 역시 후회하지 않아. 'Oh, Jesus. Hallelujah...'




2006-12-28 01:48,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래된정원  (0) 2011.06.20
굿모닝,나잇  (0) 2011.06.20
싸이보그지만괜찮아  (0) 2011.06.20
라디오스타  (0) 2011.06.20
내청춘에게고함  (0) 2011.06.20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24





꽤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싸이보그니까 괜찮아'. 평일 낮이기는 하지만, 세 명이라도 괜찮아? 관람객은 나와 어린 커플 뿐이었다. 이얼이 나온 '짧은 여행의 끝'이라는 영화가 뤼미에르에서 개봉한 때는 재수 시절이었다. 연극 '마술가게'를 여러 번 보고 대학로 골목에서 이따금 목도하며 젊은 날의 김현식 아저씨를 보는 것 같아 무척 좋아했던 그가, 마침내 영화 주인공이 된 것이다. 나름 강력한 감시망을 뚫고 학원을 빠져나와 내달린 뤼미에르, '지중해'와 '은밀한 유혹'과 함께 상영되던 그 영화를 보기 위해 나는 수표대 직원의 설득을 강경하게 거부해야 했다. '지중해'는 이미 봤고 '은밀한 유혹'은 관심 없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검표대에서는 매표소에서 표를 잘못 팔았다느니 어쩌니 하며 인터폰까지 연결해 나를 돌려보내려 했다. 오기가 난 나는 어쨌든 표를 샀으니 영화를 보겠다고 선언을 하고 버틴 끝에, 스스로 입구 커튼을 치고 예고도 없이 바로 시작된 영화의 유일한 관객이 되었다. 과정만큼 영화도 씁쓸하고 난감해서, 나올 때는 솔직히 이걸 보겠다고 굳이 우긴 스스로가 좀 민망해 커튼을 내 손으로 닫았다. 이런 영활줄 알았나, 망할.
 

이후에 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관객 중 하나가 되었던 경험은 씨네하우스에서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스카라극장에서 '지구를 지켜라' 그리고 씨어터 2.0에서 '선택'을 볼 때였다. '시간은...'을 볼 때는, 지금 생각하면 뻔뻔하고 무모했다 싶지만 영화를 보다가 너무 담배가 땡겨서 피워버렸다. 2층에 객석과 영사실이 있어 부릴 수 있는 객기였고, 아마도 그 영화여서 가능한 조용한 난장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내 손에는 마시던 음료수통도 쥐어져있어 훌륭한 재떨이가 되어주었다. '지구를 지켜라'를 보러 낯선 스카라극장을 찾은 건 정말 암담했던 스물 아홉의 일상에서 튕겨나가고픈 몸부림이었다. 연극판에서 얼굴이 익은 신하균이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으로나마 그런 격려라도 담고 있기엔 그때 내 상태가 너무 비참하고 막막했다. 하지만 발 밑으로 쥐라도 기어다닐 것 같은, 그 옛날 단성사처럼 을씨년스럽고 휑한 극장이 오히려 영화와 무척 어울렸던 것 같다. 쉴새없이 깔깔대다가, 후반부로 치달으며 참을 수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불러낸 영화가 준 카타르시스는 엄청 났다. 영화가 끝나고, 산발적인 흐느낌의 주인공들이 작은 평원처럼 도열된 의자 사이에서 하나씩 몸을 일으켜 나가던 모습까지, 고마운 감동이었다. '선택'을 볼 때는 어렵사리 찾아간 작은 극장이 너무 음침하고 스산해서, 처음에 혼자 보다가 중간에 기척을 내고 들어온 누군가가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김중기와 고동업, 안석환을 이후에 인상 깊게 마주친 적이 없다. 그들의 연기와 존재를 좀 좋아했는데.
 

아무려나, 오늘은 셋이었다. 모르는 둘이었지만. 박찬욱의 영화에 나는 언제나 부분 공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실은 꽤나 뻔하게 짐작 가능한 인과관계를 활용하는 그의 솜씨는, 솔직히 말하면 그의 정치적 지향과 존재감에 대한 기대로 인해서, 응원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말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어쩌면, 영민한 그가 자기 영화를 만들 밑천 삼아 무척이나 정도(?)를 지키며 만든 발돋움용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복수는 나의 것'을 보며 느꼈던 소름 끼치는 이물감과 심지어 불쾌함은 보통을 넘었고, '올드보이'나 '친절한 금자씨' 역시 나름 서사라면 서사랄 수 있는 백스토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찬사를 받을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가 연출한 '여섯 개의 시선'의 한 꼭지 역시, 난 그저 그랬다. 너무 앞서가는 건지 뒤쳐져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현재적이거나 최소한 별로 동시대적이지 않은 그의 상상 혹은 표현들이, 먹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좀 의심스럽기도 하다. 물론 스타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는 비공식 라이센스를 그는 이미 얻었고, 그 라이센스가 몇 작품쯤은 더 프리미엄으로 작용하겠지만.
 

내가 영화를 단순히 취미가 아닌 영화로 열심히 보기 시작한 건 94년부터였다. 대학 1학년때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다보기 시작한 영화들, 한참 때는 비디오샵에 가면 정말이지 황홀한 비밀을 간직한 네모난 상자들이 보물선 속에 가라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마을 체인과 본격 영화잡지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마침 백두대간을 필두로 씨네마테크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계보씩이나 그려가며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그 옛날 즐겨본 손석희가 진행했던 영화퀴즈 프로그램에서 주워들은 제목과 이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따금 EBS 씨네마천국을 녹화해가며 한나래니 한울에서 나온 영화책들을 뒤적여가며 참 즐거웠다. 구회영이었던 김홍준의 영화책을 눈이 빠지도록 탐독하고 이효인의 '영화여 침을 뱉어라'에 가슴이 뛰었으며 지난날 잠시 혹했던 하재봉의 구라에 눈을 흘기기도 했다. 물론 정은임을 벗 삼아 새벽 영화의 꿈 속으로 빠져들었고 정성일의 비장한 언설에 매료됐다. 그렇게 영화를 보던 시절 적었던 영화일기에는, 당시 신문의 하단을 장식했던 개봉작의 빛바랜 광고들이 붙어있고 알건 모르건 열심히 적었던 감독과 배우, 영화음악가의 이름 그리고 어설픈 감상이 빼곡하다. 
 

좋았던 옛날,을 이야기하다보면 누구에게나 그 시절은 스스로에게만 특별하지만 사실 다들 엇비슷하게 시대의 조류 위에 놓여져 변해온 것일 뿐이다. 그리고 조금 더 먼 시간은 조금 더 아련하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은 언제나 아름답게 기억될 뿐이다. 어차피 지금은 곧 과거가 되고, 돌아갈 수 없다는 일회성이 뿜어내는 향수는 그리움을 짙게 풍긴다. 이제는 먼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라면 더욱 더. 무엇이든 갈수록 영악해지고 기민해지는, 내 좋아하던 무언가 남아있다해도 복잡하고 어지러운 미로를 통해서나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지금이라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렇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그래 뭐. 괜찮았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는 산업이었고 어차피 내 기억이 놓인 자리로 주목하는 것만이 애틋한 추억으로 살아날 뿐이니까. 피프철이 되면 씨네21을 사들고 부록으로 받은 시간표를 보며 수강신청보다 더 공을 들이던 때는 이제 너무 아득하다. 나다니 필름포럼, 스폰지, 씨네큐브 역시 가깝지 않기는 마찬가지. 정한수라도 떠놓고 빌어볼까? 부천에 씨네마테크 하나만 문 열어달라고.




2006-12-18 21:58,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굿모닝,나잇  (0) 2011.06.20
후회하지않아  (0) 2011.06.20
라디오스타  (0) 2011.06.20
내청춘에게고함  (0) 2011.06.20
천하장사마돈나  (0) 2011.06.20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13






무척 마음에 들기도 하고 한편 무척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해서, 이래저래 끄적이다가 관뒀었는데... 딱 88년도에 가수왕 먹게 생겨먹은 최곤의 '비와 당신'을 반복해서 듣다보니 영화 본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장안의 화제까지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잔잔하게 향수를 자극하며 회자되고 있는 '라디오 스타'. 서울까지 걸음해 보았던 '내 청춘에게 고함'이 영화라기보다 잊고 지냈던 지나 온 날들의 편린을 만난 것 같았던 탓인지 오랜만에 영화를 본 느낌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딘가 많이 빈 듯한 헐렁함. 거의 모든 것이 최적이었던 '천하장사 마돈나' 덕에 고무된 마음이 개연성 없는 기대를 배가한 것도 까닭이 될지 모르겠다.
 

실은 며칠 전에 읽은 이준익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 눈치를 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무척이나 조건순응적인 인간이라고 순순히 인정하는 감독의 영화, 예술보다 노동이 더 신선하다고 생각한단 그의 말은 감동적이었지만 성실과 정직으로 만족하기에는 세상에 이미 영화는 너무 많고 세련되어버렸다. 게다가 나는 투톱으로 나선 것만으로도 예우적 화제에 오르는 안성기와 박중훈에게 연기로써 매료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여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88년, 물론 왕년의 가수왕 최곤의 dj 생활은 현재적이지만... 영화는 전체적으로 '88년의 정서' 쯤에 안이하게 내려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적당한 촌스러움과 적당한 편안함, 세상이 이렇게까지 영리하게 돌아가기 전의 맘 놓은 순진함 같은 것에 기대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는 '라디오'를 이야기했기 때문이고 더욱 결정적으로는 어디선가 마주친 가십성 기사, '긴급조치 19호'를 만회한다는 둥 하며 아저씨의 깜짝 출연을 알리는 기사를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면서, 미사리 어디쯤 될까 싶은 까페에서 닳고 닳은 느낌으로 수천 번은 불렀을 노래를 부르는 최곤에 비릿하게 열광하는 손님의 과장된 반응을 보며 참 난감해졌다. 이십 년쯤 전에는 환히 빛났을지 모를 미사리니 양수리니 하는 라이브 까페를 먹여살리는 그녀들, 결국 산업으로써의 '7080'을 부활시킨 시대착오적 향수의 건설자들을 보며... 아, 아직은 동감하고 싶지 않다는 나 역시 속물스러운 저항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역시 인간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내 추억은 아직 그렇게 잡되지 않단 말이지! 라고 나는 강변하고 싶었던 걸까.
 

정상에 올랐던 88년의 자의식에 붙박혀 일상을 난장으로 지속하는 최곤과 가수왕의 가오를 a/s하듯 별 일정도 없는 매니지먼트에 사력을 다하는 박민수. 철 없는 아들과 그렇게 키워버려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엄마 같기도 하고, 나이 먹어 정신 못 차린 청년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연인 같기도 한 그들의 관계 자체가 차라리 향수 어린 것이었다. 이해 앞에서는 부모나 친구를 배반하는 일도 심심찮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들은 과히 순수한 존재들도 아닌 주제에 질곡의 동고동락을 일삼는다. 가능성과 희망이 아니라 함께 한 세월과 몸에 배인 습관이 만든 깊은 정을 어렵사리 떼는 계기는, 눈물을 머금고 상대방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마치 지난 세기 마지막 인정의 관계를 증거하듯, 그들은 나름 의리 하나는 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물론 꽤나 도식적인 인물들이었지만,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윤주상과 정규수, 정석용, 조련 등의 안정된 연기와 존재 자체가 정신없음인 노브레인의 연기인지 생활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도 톡톡히 활력을 불어넣었다. 스치듯 묻어갔지만 최곤을 따르는 이스트리버 밴드의 '애비로드' 오마쥬는, 거의 한치도 어긋남 없이 전형성 속에 안주한 영화에서 유쾌한 실소를 머금게 하는 드문 장면이었던 것 같다. 일대일의 청취를 넘어 면대면의 라디오를 만드는 주인공들인 다방아가씨, 중국집 배달원, 철물점 주인 심지어 고스톱판의 중재를 맡기는 할머니들과 사랑의 메신저를 자처하는 불특정다수까지. 의도했건 아니건 이건 영화거든, 말을 건네듯 소격의 압박을 전하는 에피소드들이 즐비하고 한편 이런 어이없는 착함이 영화의 미덕으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 듯도 하다.(그래서 너무나 아쉬웠다...--;;)  
 

그리고 좀은 뜬금없지만, 배경이 된 영월이라는 소도시. 자타가 공인하는 전락의 포지션이지만, 좌충우돌의 와중에서도 공동체를 구성한 개인들의 삶결에 활기를 불어넣는 dj의 주술적인 힘이랄까. 어쩌면 변화의 관건은 규모의 문제라는 전제하에, 전파를 장악하는 선한(?) 힘과 어떤 꼬뮨의 가능성 같은 게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그러나, 어쩌면 이제 변방은 변방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결국 그 착한 영화 역시 고백하고 말지만 말이다. 끊임없이 내부를 확장하는 자극들에 의해, 또한 내부로 남아있지 않으려는 운동에 의해 결국,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 역시 추억으로 남겨질 때 아름다울 수 있을 뿐.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싶어졌다. 
 

사실 영화와 관련해 내게 가장 인상적인 건 최곤을 가수왕으로 만들어준 히트곡 '비와 당신'이었다. 그리고 음악을 담당한 방준석. 90년대 중반 가장 잘 나가는 프로듀서였던 송홍섭의 극진한 지원 속에서 꽤나 화려하게(?) 데뷔했던 '유앤미블루', 그때까지 그런 프로가 계속됐던가 의아하지만 여튼 매우 이례적으로 '신인간시대'에 나왔던 걸 봤었고 학전에서 신윤철과 함께 한 공연도 즐겁게 봤었다. 두 장의 음반을 내고 갈라선 그들 중 방준석은 때론 '이인'이라는 이름으로 어어부의 음반과 공연에 참여하며 영화 음악 작업을 계속하고 있고, 이승렬은 몇 해 전 반가운 독집 음반을 냈었다. 그야말로 88년스러운 빛 바랜 통속성으로 점철된 락발라드 '비와 당신'을 들으며, 향수 자체를 주조해내는 그의 능력에 솔직히 놀랐다. 언더그라운드의 끝물에서부터 인디씬의 중심을 거쳐 이제는 의심할 바 없이 실력있는 뮤지션으로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외곬이라 믿으며 응원하던 놈이 실은 만능임을 알아버렸을 때의 기특한 배신감 같은 것? 암튼, 방준석 화이팅이다.
 

아무려나, 영화는 지난 시절 내게 노래를 들려줬던 여럿의 얼굴을 겹쳐 떠오르게 했다. 세월이 흐른만큼 수많은 왕년의 스타들이 명멸했기 때문일 테고, 그리고 실은 단 한 번 빛나지 못했던 젊음조차도 이제는 공평하게 시들고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중학교 시절의 몇 달 밤을 함께 했던 kbs fm의 '박중훈의 인기가요'와 '내 사랑 동키호테'에서 상큼하게 삽입곡을 불렀던 그 박중훈의 기억, 그리고 그 시절에 들었던 노래와 가수들의 추억이 자꾸만 떠올라서... 며칠을 곱씹는 동안 영화에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버린 느낌이기도 하다. 그런 중에 화려했던 과거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자존심만 남은 천덕꾸러기 최곤의 고백 한 마디가 자꾸만 떠오른다. '다시 노래하고 싶어질까봐',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자기진실이 허튼 욕망이 되기는 얼마나 쉬운가. 그리고 몇 장면에서 '의미심장하게' 나타난 아저씨, 결국 살아가는 일은 각자의 자족선을 조정하고 세상과 맞춰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하물며 영화 하나에도 이렇게나 아쉬움과 할 말이 많은데, 삶은 말 할 것도 없겠거니.




2006-10-07 22:51,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회하지않아  (0) 2011.06.20
싸이보그지만괜찮아  (0) 2011.06.20
내청춘에게고함  (0) 2011.06.20
천하장사마돈나  (0) 2011.06.20
다세포소녀  (0) 2011.06.20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07






토요일, 이따금 빗방울이 날리고 바람이 겨울처럼 불었다. 그리고 낙원동,에서 고대했던 '내 청춘에게 고함'을. 주말 오후 인파로 넘쳐나는 대로를 가로질러 들어선 낙원의 골목에서 처음 마주치는 것은 급격한 이물감을 담은 냄새다. 비릿하고 역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고깃덩이들이 풍기는 냄새. 차마 하늘로 솟아올라 퍼지지도 못하고 좁은 골목 가게 처마에, 하늘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에 가둬진 진한 연기는 이방인에게 청구하는 낙원의 입장료일까. 이제는 이삿짐이건 무엇이건 실어날으며 먹고 살아야하는 낙원 상가는 십 년 전 '정글스토리'가 담아냈던 비루한 열정조차도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지만 아무나 헤집을 수도 없는 최후의 소도만 같은 낙원동, 시인이 마지막 머물렀던 이제는 없어진 극장의 전설도 이정우의 글에서 비밀스럽게 엿보았던 게이게토의 유산도 모두 잡아먹어버리고 외지인의 침입도 세월의 습격도 태연한 불협화음으로 밀어내는 듯한 그 곳. 마지막으로 남겨진 메마른 오아시스처럼 황량한 의지를 땅 속 깊이 심어놓고서, 갖가지 먹거리로 찾아드는 범속한 사람들을 눈속임하며 땅의 정체성을 감추려 애쓰고 있는 것 같다. 입구에 둥지를 튼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 아껴 틀어주는 영화처럼 애틋하게 반짝거린다. 4층까지 올라가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하는 엘리베이터가 실어날으는 사람들 역시 어쩐지 비슷한 향수를 담고 있는 느낌. 마주 보고 있는 영화관과 무도장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퇴락한 도시의 변두리 같은 옥상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종로타워와 무슨무슨 스위트라는 번듯한 레지덴스 건물에 가로막혀 버렸다. 이렇게도 버틸 수 있는 건, 그래도 '낙원'이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내 청춘에게 고함이 시작되었다. 울림을 담은 제목에 끌렸지만, 실은 그 무엇보다도 진부하고 상투적이다. 영화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청춘'이 불러내는 많은 것들. 혼란과 방황, 무모함과 대책없음 그리고 때로 무기력과 이른 환멸. 누구의 청춘에나 질료로 쓰이는 그것들이 나의 시간과 만나게 되면 '내 청춘'만은 유독 아프고 아릿하다. 상투성의 힘은 누구에게나 공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아닐까. 세 편의 에피소드는 '베티블루'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그리고 '강원도의 힘'의 어느 지점을 연상시켰다. 생물학적으로 청춘을 통과한 나의 시선은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가족도 애인도 혼란스런 일상의 구성물일 뿐인 정희와 환상에도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근우와 관계의 균열을 확인한 후에도 미련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는 인호. 불온하고 거친 숨결을 눌러줄 조르그의 베개 대신에 정희는, 현실에서 마주칠 수 있는 가장 가치전복적인 사건에 호흡을 고른다. 나날을 습격하듯 닥치는 시간을 늦추는 것으로도 모자라 먹으려 애쓰던 근우는, 시간과 무관한 비현실의 탐닉으로 빠져들지만 그렇다고 신랄한 현실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한 날들을 지난, 진심에 의뭉스러울 수 있는 나이를 살아가는 인호는 이미, 다시는 안 그럴께 라는 말을 금세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잘못 놓여진 신발 한 짝을 누군가 걷어차 잠시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리는 황망함, 쯤의 생각을 담고 영화관을 나섰다. 바람은 여전히 세차고, 아마 모든 이의 분신이었을 주인공들이 떠오른다. 청춘이 그다지 새롭지 않듯이 영화도 그랬다. 그렇지만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는 건, 그 진부함 속에서 내 청춘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옆에서는 서울영화제가 열리는 중이었다. 집어온 프로그램에서 발견한 영화, '말라 노체'. 그러나 기회는 토요일의 심야 상영뿐이다. 그것은 청춘의 놀이, 어쩔까 싶다. 오는 길 내내 '안녕, 또 다른 안녕'을 들었다. '낙원'을 뒤로 하고 와선가, 주말을 보내며 기분이 좀 그랬다.



2006-09-11 02:23,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싸이보그지만괜찮아  (0) 2011.06.20
라디오스타  (0) 2011.06.20
천하장사마돈나  (0) 2011.06.20
다세포소녀  (0) 2011.06.20
괴물  (0) 2011.06.20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04






안재환과 너무 흡사해 친근한 얼굴의 주인공, 어디서 봤나 했더니 '동막골'과 '내 나이키'의 그 소년이다. 여자가 되고픈 소년 동구, 야리한 외모와 몸매의 소유자도 아니고 그 절절한 소망을 구구절절 하소연하지도 않는데, 소년의 꿈은 가볍게도 우습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해영과 이해준, 한국의 코엔이냐 싶었는데 피는 섞이지 않았다고. 꽤 많은 영화에서 각본 작업을 함께 했었다는데, 한 씬 한 씬의 밀도를 높일 줄 아는 이들인 것 같다. 줄거리도 구성도 인물도, 그다지 새롭지 않은 이 영화가 마치 아주 색다른 이야기인 듯 신선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분명 각본과 감독을 맡은 그들의 재주 덕인 것 같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자기 역할을 해내는 연기자들도 물론이고.
 

곤혹스런(?) 욕망을 타고나버린 그러나 청춘의 해사함을 감출 수 없는 맑은 얼굴의 동구, 화장품으로 가득한 서랍과 사모하는 총각 선생님 사진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보석함을 가진 소년의 세계는 '나의 장밋빛 인생'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우리의 소년은, 좌절된 복싱의 꿈에 매여 자기 고통밖에 볼 줄 모르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횡포와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좀 미운 동생과 같은 지붕 아래 고역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주는 집 나간 엄마와 마주 앉아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그가 받을 수 있는 핏줄간 격려의 전부다. 그나마 다행은 '그냥 살고 싶은' 필사적인 몸부림을 온전히 알아주지는 않지만 매일 바뀌는 장래희망으로 웃음을 안겨주고 운명의 씨름부까지 소개해준 단짝 친구와 마주칠 때마다 몽환의 바람을 일깨워주는 사랑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구의 필생의 꿈인 '뒤집기'는 용도 폐기된 지 오래인 물 빠진 수영장 한 켠에 유목민의 집처럼 놓여진 씨름부 연습실에서 시작된다. 나는 왜 다를까를 고민하기보다 자신이 살고 싶은 모습으로 살기 위해 애 쓰는 일찍 철이 든 소년은, 수술비 마련을 위해 투지에 불 타 씨름에 뛰어들지만 파랑보다는 빨강 샅바를 갖고 싶고 사물함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꿈꾸는 데도 소홀하지 않는다. 다행히 몸도 이름도 '소질 있다는' 희망적인 판정을 내려준, 지도라고는 '해~봐!' 한 마디가 전부인 화장실 지킴이 감독님이 보내는 침묵의 응원과 산만한 덩치에 덩치보다 더 한심한 실력을 겸비한 삼총사의 격려 그리고 독기를 자극하는 씨름에 인생을 건 선배. 브라운관 속의 마돈나를 조우한 이래, 길지 않은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like a virgin'을 향한 동구의 '씨름'은, 정말 '씨름'으로 그리고 '뒤집기'로 해피엔딩을 향해 간다.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만큼 끊임없이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들의 재기는 물론, 갈등관계에 있는 인물들의 화해와 반전 역시 억지스럽지 않게 훈훈하다. 때때로 등장하는 상상의 장면들은 실소를 머금게 하면서도 한편 에밀 쿠스투리차의 영화를 연상시킬 만큼 몽환적이고 황홀했다. 대범하다 싶을 정도로 설명은 생략하되 상황의 반복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연출에, 거의 무방비상태가 되어 웃다보니 어느덧 동구의 꿈은 이루어져 있었다. 조잡스럽지만 신기한 마술쇼를 지켜보는 순진한 아이가 된 느낌이랄까. '천하장사 마돈나'가 되고야 만 영화의 피날레는 '풀몬티' 만큼이나 흥겹고 흐뭇했다. '동성애' 혹은 '성전환'이라는 사뭇 심각할 수 있는 이야기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자분자분 사연을 풀어놓은 솜씨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거 참, 낯설지 않으면서도 이렇게나 신선한 영화가 가능하구나.
 

영화에 푹 빠져 지내던 때가 새삼 그리워졌다. '내 청춘에게 고함'은 끝내 놓쳤나싶어 아쉽고. 그러고보니 피프철도 다가오고. '예의없는 것들'과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정도가 일간 프리머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인 듯 한데, 어떨지. 아버지역의 김윤석에게 자꾸 이얼 아저씨의 얼굴이 겹쳐지고, 오랜만에 백윤식을 보니 '지구를 지켜라'가 떠오르고, '라이방'의 무대인사로 팍 인상이 깊어버린 김해곤의 영화가 개봉하고. 그러다보니 괜히 짠했던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하던 때, 가을이 되면 부산행의 기대에 부풀어 '씨네21' 부록을 기다리던 때가 생각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고양이를 부탁해', '꽃섬' 같은 영화들 그리고 에밀 쿠스투리차와 빔 벤더스, 또 누군가의 영화들을 보고서 남포동과 수영만의 밤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녔던.
 


 

2006-09-04 03:30,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디오스타  (0) 2011.06.20
내청춘에게고함  (0) 2011.06.20
다세포소녀  (0) 2011.06.20
괴물  (0) 2011.06.20
대추리전쟁  (0) 2011.06.19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0:58






다들 한풀 꺾였다고 할 즈음부터 나는 더위를 견디기가 무지 힘들어졌다. 더위 먹었을 때의 증상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대략 내가 생각한 거랑 비슷하다면 목요일 쯤부터는 아무래도 더위를 먹어버린 것 같고. 도저히 안되겠어서 전기값도 나몰라라 연일 몇 시간씩 에어컨을 켜대고 있다. 심지어 어제는 침대에서 잘 수가 없어 에어컨이 있는 책장 밑에 자리를 펴고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그 탓인지 오늘 내내 귀는 멍멍 아프고 침 넘길 때마다 목 안쪽도 욱신거리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아, 정말 컨디션 참 아니다.
 

토요일 저녁엔 늦더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영화를 보러갔다. 다행히 집에서 5분쯤 거리에 영화관이 하나 있어, '괴물'도 여태 못(?) 본 친구에게는 미안했지만 '다세포소녀'. 원작 만화는 본 일이 없고, 그저 이재용 감독과 장영규의 음악에 기대어 어쩐지 봐줘야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제 돈 다 내고 본 영화, 무슨무슨 할인제도 없어지고 나니 내게는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사치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는... 14,000원어치 내가 착한 일을 한 듯한 느낌도 가져다주었다. 그래, 일단 작은 영화는 살려야지. 화면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주변 객석에서는 뭐 이런~ 환불~ 허허~ 무슨 영화가~ 등등의 다양하지만 한 방향을 향하는 반응이 들려왔다. 음... 그러고보니, 실은 난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줄거리나 캐릭터는 포털에 워낙 자주 등장했었는데, 그래도 다시 살짝 이야기를 꺼내자면 이렇다. 영화의 배경은 일명 종교자유시범학교라는 무쓸모고등학교, 성병으로 결근한 영어샘 대신 들어왔다며 모종의 관계를 맺은 학생은 조퇴하고 병원에 다녀올 것을 친절히 안내하는 교실 장면으로 시작된다. 자리를 지키던 스무 명 남짓 되는 학생들은 우왕좌왕 모두 빠져나가고 결국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와 외눈박이만이 남게 된다. 그나마 원조교제 약속으로 자리를 뜨는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겨진 외눈박이.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유치찬란 핑크로 무장한 무쓸모걸들의 발랄한 교가제창과 함께하는 학교와 인물 소개.
 

그리고는 다 기억하기도 힘들만큼 어지럽게 교직된 에피소드들이 때로는 유기적으로 때로는 썡뚱맞게 전개된다. 스위스전학생 안소니를 마음에 품은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의 연정과 가슴앓이, 교내 유일한 숫총각이며 왕따인 좌절인생 외눈박이의 욕망과 그를 남몰래 사랑하는 축구부주장, 어이없게도 트렌스젠더인 두눈박이에게 마음이 꽂혀버린 안소니의 방황과 갈등, 왕칼언니와의 플라토닉 원조교제(?)로 너절한 생을 위로받던 중 우여곡절 끝에 흔들녀로 유명세를 타게 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 여학생들에게만 인스턴트 모범생칩을 장착시키며 분위기를 문란케하는 이무기와 그에 맞서는 학생들, 덕 좀 볼까 싶어 어릴 때 스위스로 입양을 보냈으나 별 소득 없이 돌아온 제임스와 엄마의 상봉 그리고 지겹게 등에 업고 다녔던 가난과의 이별.
 

이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으며 나름의 에피소드마다 굳이 갖다붙이자면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이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만, 그건 아무래도 좀 우스꽝스럽기도 난망하기도 한 정색이 아닐까 싶다. 암튼, 이런 잡다한 에피소드들을 거치고 거쳐 마침내 졸업식날의 엔딩. 종교자유시범학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지켜낸 말 그대로 무쓸모고의 정체성은 변함없이 키치가 난무하고 어이는 사라진 광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만다. 
 

대략 어떤 영화일 것이란 짐작은 있었기 때문에, 황당하고 설득력 없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은 별로 없었다. 단, 이재용과 장영규라는 믿음직한 이름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었던 것 같기는 하다. 아니 뭐, 장영규와 복숭아의 음악에는 별 불만 없다. 그런데 이재용은 왜 굳이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까. '정사'와 '순애보'와 '스캔들'이 풍기는 각각 다른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는 다방면의 선수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차마 '록키호러픽쳐쇼'나 '크라이베이비' 까지는 아니라도, 사실 살짝 기대가 없지는 않았는데...
 

원작이 가진 키치적인 요소나 말도 안 되는 전개 같은 것은 작품의 색깔로 넘긴다지만, 대략 발랄하고 어디로 튈 지 몰라야만 할 것 같은 상황의 팔할 이상이 예측가능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진부하고 허탈한 유머(?)로 귀결되고 마는 것은 정말 아쉬웠다. 더구나 온통 과장된 설정으로 일관된 영화이기는 했지만, 이따금 관객과 눈을 맞추는 소격효과까지를 염두에 뒀다면 안소니와 테리와 우스의 경우는 아무래도 연기 연습을 좀더 시켜야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의도된 '과장된 연기'에도 결코 슬쩍 묻어넘길 수 없었던 꽃미남 3인방의 어색한 연기는 참으로 봐주기 힘들 지경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도 예전이라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록키호러..'와 '크라이베이비'를 억지로 떠올리면서, 이 어색함과 민망스러움은 외국어와 모국어의 차이인가 낯선 문화와 친숙한 문화의 차이인가를 숙고해 봤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컬트키치삐급을 표방한 영화라도 (안했을지도모르겠다만;;),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한 관객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의 조악스러움을 대령하는 센스를 겸비해야하지 않을까. 암튼, '다세포소녀' 덕에 오랫동안 들춰보지 않았던 영화 관련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장영규야 원래 그렇다치고(?), 이재용의 속내가 새삼 궁금해졌다. 내가 너무 단세포인 걸까.



2006-08-14 02:27,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청춘에게고함  (0) 2011.06.20
천하장사마돈나  (0) 2011.06.20
괴물  (0) 2011.06.20
대추리전쟁  (0) 2011.06.19
가족의탄생  (0) 2011.06.19
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11. 6. 20. 00:53






개봉 전부터 하도 여기저기서 탄성과 극찬이 자자했던 터라, 보긴 봐야겠군 했던 영환데... 기대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 선호하지 않는 단체관람 탓이었는지, 시종일관 완결된 문장의 혼잣말을 날리던 옆 사람 탓이었는지, 난 좀은 시큰둥했다. 보긴 봐야겠군 정도였지 큰 관심은 없어 영화에 대한 정보 자체도 별로 없었는데, '괴물'이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나는 은연 중에 '지구를 지켜라' 같은 은유를 상상하고 있었던 것도 같고. 또 워낙 아날로그형 인간인지라 씨지의 수준 같은 걸 가늠하고 감동할 능력이 없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현란한 공중 몇 회전에 섬광 같은 꼬리 말기를 반복하며 실물(?)의 괴물이 등장할 때마다 살짝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고, 중반부를 넘어 잠깐 쉬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재등장을 해주시는 그 끈적물렁이는 덩어리의 괴물을 보는 일이 꽤나 불감당이었다. 역시 난 스펙터클이나 스케일 같은 거랑은 거리가 먼 인간. 그냥 '플란다스의 개' 정도가 딱 재밌고 좋았는데 말이지. 보고나서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예전에 봤던 '생활의 발견'에서 반복되었던 대사,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어쩌고 하던 말이었다. 아무래도 내게 설득력있는 건 그런 괴물이다.
 

여기저기서 상찬의 말들이 들려오는 걸 보면, 나와 별로 맞지 않았을 뿐 잘 만들어진 영화는 맞는 것도 같지만... 한편 연일 포탈 사이트를 오르락 내리락한 별 영양가 없는 기사들에 생각이 미치면, 스크린쿼터 축소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언론의 거품질이 개입된 과대평가는 아닐까 싶은 느낌도 들지 않는 건 아니다.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영화였지만, 미국과 행정부와 권력과 언론과 소시민과 가족과 심지어 하수구까지, 이 모두를 아우르되 이토록 비약이 심하고 우연이 남발하는 스토리에 이렇게나 하나같이 열광과 찬사를 보내는 게 좀 이상하다. 역시 나는 아날로그형일 뿐만 아니라 심오한 '괴물'의 세계를 이해하기엔 너무 단순한 인간인가.
 

좀전엔 엄마랑 오빠네 식구들이 다녀갔다. 지난 일요일 아빠한테 들었던 말도 안되는 잔소리, 그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서로서로 괴물이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세상에서 우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가며, 별 일 없다는 듯이 쭉 살아왔던 게 아닐까. 별 것도 아닌 책에 과민반응을 하며 약빨 없을 걸 뻔히 알면서도 본인 안심용 단속을 하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내게 그렇듯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간섭하고 감시한다고 정신머리까지 바꾸어놓을 수 없다는 걸 뻔히 아는 나의 삶 역시 부모님께는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곤욕스러움일 것이다. 도처에 창궐하며 보이지도 않는 이 괴물들은 결국 내가 사라질 때까지 견뎌야만 하는 것이려니, 미친 척 하고 옐로우 에이전트라도 사들여야하나... 진정 사는 게 '괴물'스럽다.



2006-07-30 18:16, 알라딘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하장사마돈나  (0) 2011.06.20
다세포소녀  (0) 2011.06.20
대추리전쟁  (0) 2011.06.19
가족의탄생  (0) 2011.06.19
lastdays  (0) 2011.06.19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