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41


국가보훈처는 8일 8.15 광복 61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313명에게 포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된 포상대상자에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가 다수 포함돼 있어 주목된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이재유, 생존해 있는 최고령 여성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93세)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이재유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던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국내에서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는 이현상, 김삼룡, 정태식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으며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자유자재로 뚫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재유가 일제에 검거됐을 당시 언론은 '신화적 인물이 드디어 잡혔다'라며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 하략, <프레시안> 2006년 8월 11일자 기사
 

광복절을 앞 둔 어느 날 우연히 기사를 보고서 뒤늦게 이 책의 존재를 알게되었다. 소설이 어차피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실명소설'이니 '기록소설'이니 하는 쪽은 어쩐지 조작된(?) 리얼리티에 혹하는 느낌이어서 별로 손이 안 가는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라는 구절이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그러고보니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같은 이름도 아주 낯설지는 않다. 무심코 지나친 길을 되돌아가 보물을 발견한 심정으로 책을 집어들었다. 기사에 나온 대로, 책의 제목이기도 한 '경성트로이카'는 1930년대 지하조직이었던 공산주의 혁명 결사의 이름, 오랜 동안 반편으로만 기억되고 기록되어 온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을 해 온 남한 공산주의 운동의 마지막 보루 '경성꼼그룹'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십 여 년의 노동운동 경력을 가진, '파업'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던, 농번기에 농사 짓고 농한기에 생계형 잡일을 하며 가끔 쑥스럽게 끄적이는 일을 계속하던 저자는 인사동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운명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단 서문에서 짧지 않게 그 우연한 만남과 남북 어디에서도 대우받지 못하고 죽어 간 그들을 위해 진혼곡을 연주하리라는 내 마음의 약속에 대해 밝히고 있다. 책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이효정 할머니와의 조우와 그녀로부터 받은 순정한 영감, 한편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신념으로 인한 경도의 우려와 실제 인물과 사건을 소설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빚어질 지 모르는 왜곡에 대한 부담감. 그러나 남과 북에서 공히 잊혀지거나 고의적으로 삭제된 그들의 존재를 되살려내려는 저자의 사명감으로 이 책은 완성되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내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아나키스트'의 창백하고 푸른 이미지였다.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라는 표지의 문장도 그렇고, 사전지식 없이 '경성트로이카'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처음 받았던 지배적인 인상은 고답적인 세련미 혹은 복고풍의 낭만에 가까운 감상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 속에 부유하던 겉멋(!) 대신에 일제하 경성 젊은이들의 헌신적인 삶이 생생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경성 트로이카'를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제도교육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된 일제시대 좌파 독립운동 역사 전체를 망라하고 있다. 광주학생운동과 삼일운동 그리고 신간회와 상해임시정부로 대표되었던 단어 나열식의 일제시대 역사 뒤 편에서 핏빛으로 물들었던 반쪽의 역사를, 소설은 수십 년 전 생동하던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광주학생운동으로 고무되어 수업거부와 동맹휴업을 주도한 동덕여고생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등의 여성 혁명가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후에 가장 신실한 혁명가로 변신하는 동덕여고 교사 이관술 그리고 탁월한 혁명가로 국내파 공산주의 혁명 결사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한 개마고원의 아들 이재유. 혁명과 관계 없으면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는 후에 남부군 최후의 총대장으로 죽어간 이현상, 해방 후 남과 북 모두에서 버려진 남로당의 처지를 '허무한 일이요'라며 피끓는 심사로 토해내고 모진 고문과 총살로 죽어간 김삼룡과 이주하, 일본인 교수 신분으로 남한 공산주의 운동의 든든한 동반자였던 미야케 그리고 '조선소설사'로 잘 알려진 경성제대 교수 출신의 김태준. 그밖에도 후대에는 이름을 전하지 못한 수많은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구체제의 봉건성을 벗어나지 못한 생활 세계와 일제의 식민통치 그리고 혁명적 공산주의와 갖은 서구 신문물의 유입이 뒤섞인 혼란스럽고도 싱그러운 근대의 풍경 속에서 그들은 오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하고 조국의 해방을 모색하는 일에 청춘을 바친다. 민족과 조국을 내건 독립운동의 명망가들이 국외로 떠나 일신의 안락과 함께 지도부를 자처하고 있던 시절에도 그들은 하나뿐인 목숨을 내걸고 구속과 고문의 일상적인 위협을 실천으로 돌파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한반도 전체가 병참기지화되면서 일제의 악랄한 탄압 속에 거의 모든 운동세력의 명맥이 끊어졌을 때조차 그들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물리치며 버텨내고 마침내 해방을 맞는다.
 

그러나 승리의 확신도 장밋빛 미래도 오로지 자신에게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핍진한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일으켜세운 그들의 강인한 정신과 생명력은, 해방된 조국에서 무참히 짓밟혀버리고 만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공산당 탄압 속에 많은 사람들이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을 받고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경성 트로이카'의 구심이었던 이재유는 해방을 한 해 앞두고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경성꼼그룹'을 재건한 이관술은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처형을 당한다. 결혼과 함께 운동을 떠났던 이효정 할머니만이 오늘 날까지 살아남아 역사의 산증인으로, '경성 트로이카'를 복원하는 산파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책의 앞 장에는 이효정 할머니의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 이효정 '약속'
 

물론 저자의 윤색을 거친 소설이기는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그들의 삶에 빚지고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라는 생각에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현실이 되자마자 변질되거나 끝내 성취되지 못한 채 금단으로 무화되어버린 여럿이 꾸던 꿈의 매혹이기도 하면서, 여전히 저 멀리 있는 어쩌면 우리가 이어가야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거창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명 어느 정도 미화된 부분이 있을 것이고 이르게 폐기된 자료를 구하는 일 역시 꽤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므로 100%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역사라도 결국 기록하는 자의 선택임을 생각하면, 군내 나는 이야기 속에 담긴 그들의 삶과 죽음에 무참한 마음이 되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그리고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그들을 향한 너무 늦은 진혼에, 나 역시 작은 마음 하나를 보탤 수 있다면 좋겠다.


2006-08-31 04:46, 알라딘



경성트로이카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역사/대하소설
지은이 안재성 (사회평론,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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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