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34


신간 묶음 판매의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공중그네'와 '인더풀'을 재미있게 읽었고 한 권 값으로 두 권을 챙길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일단 사놓고 봤다. '레디앙'에 실린 기사를 보고 혹해서 집어들어 단숨에 읽었는데, 재미있었다고 책 얘기를 꺼내니 프레시안에 김민웅 선생님도 글을 썼더라며 친구가 귀띔을 해줬다. 고작 두 권을 읽었지만 작가의 전작에 비하면, 운동권 가족 이야기를 다룬 두툼한 장편 소설이라는 변별점 외에 크게 의미부여를 할 건 없을 것도 같은데, 혼자 생각에 이 책에 대한 빨간 미디어의 반김이 좀은 이례적이다 싶어 이유가 궁금해진다.
 

열두 살 생일을 몇 달 앞 둔 사춘기 소년 지로의 눈과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도쿄의 기찻길 옆 허름한 이층집에 사는 주인공은 커다란 덩치와 목소리에 맞지 않게 주로 집구석에서 뒹구는 아버지와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살리는 어머니, 단지 수면공간으로 집을 이용하며 가족에 속한다는 것을 과히 반가워하지 않는 나이 차 많은 누나 그리고 두 살 터울의 남매다. 유난스러울 것 없는 사춘기 소년의 성장 과정을 밟고 있는 지로는, 어려서부터 가장 노릇을 일찌감치 내려놓은 아버지 덕에 좀 일찍 철이 든 편이고 아이답지 않은 고도의 냉소를 늘 품고 있다. 읽다보면 툭툭 튀어나오는 조숙과 위악에 '새의 선물'의 주인공이 떠오르기도 하고, 소위 '정상적인 가정'의 바깥에 놓인 아이들 특유의 자조스런 사색이 좀은 짠하다. 
 

전설적인 운동권 과격파였던 아버지 이치로. 그러나 국가와 자본의 개가 될 수 없다며 도쿄의 집구석에 들어앉아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신문을 뒤적거리며 코딱지를 파며 데굴데굴 구르는 것, 물론 곧 작가가 될 예정이라며 무언가 쓰는 것도 같지만 어찌 될런지는 알 수 없다. 가끔 못마땅한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심란한 현실로 인해 존재론적 갈등에 휩싸인 아들 지로가 던지는 질문에 허망한 대꾸를 내뱉으며 프로레슬링이나 권하는 형편이다. 이벤트라면 국민연금 가입이나 가정방문 등의 용무로 찾아오는 공무원과 선생님을 향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민망한 연설을 늘어놓는 것이며, 불량한 중학생에게 위협받고 있는 아들의 위기상황에도 혈친적 우려보다는 세계관에 입각한 격려로 투지를 북돋우는 나름의 일관성을 보이는 인물이다.
 

도저히 아버지와 왜 결혼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사쿠라는, 집이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살림을 챙긴다. 아버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좀처럼 화 내는 일도 없는 마냥 좋기만 한 엄마, 알고 보니 그녀도 한 때 잔다르크라 불릴 만큼 열성인 운동권이었으며 나름의 상처를 안고 자신을 '받아준 ' 남편을 따라 부잣집 친정을 야반도주한 보통은 아닌 여성이다.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상류층 외가집의 존재가 잠시 지로와 모모코를 들뜨게도 혼란스럽게도 하지만, 권유와 간청보다 진한 피의 힘 덕분에 그들 역시 그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으로 남겨질 뿐이다.
 

도쿄에서의 생활을 다룬 1권은, 사춘기 지로의 일상을 따라 흘러간다. 그리고 지로를 괴롭히는 불량 중학생 가쓰와 아버지 중 하나 만이었다면... 이라고 되뇌일만큼 불감당인 문제적 인간 이치로의 행태가 지로의 관찰을 통해 묘사된다. 그 외 크게 축을 이루는 이야기라면,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아버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남자어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며 지로와 모모코를 사로잡았다가 테러의 주범으로 유치장에 갇혀버린 아키라 아저씨, 가정방문으로 독특한 연을 맺게 되었지만 계속된 아버지의 투서와 난감한 행각으로 결국 지로의 마음에 무거운 상처를 남겨준 미나미 선생님, 지로와 일상을 함께하는 친구들 준, 무카이, 린조와 만들어가는 자질구레한 사건들과 가쓰의 괴로운 심복 구로키와의 애증어린 우정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장난처럼 어느 날 문득, 찻집을 정리하고 가재도구를 처분하고 가족은 도쿄의 저 남쪽으로 떠나게 된다. 물론 외할머니의 등장으로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의 피가 한층 묽어졌다고 안도한 누나는 홀로 도쿄에 남았지만, 이제 겨우 열두 살. 더구나 인터넷 검색으로 경찰 싸이트에 버젓이 이름이 오르내리는 운동권 과격파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된, 자신은 이미 보통 집안의 아이가 아니란 걸 깨달아버린 지로는 자포자기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순순히 따라나선다. 앞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는 오키나와에서도 남쪽으로 더 내려간 작은 섬, 이리오모테. 믿었던 엄마마저 아빠와 한통속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정신적 소년가장인 지로는 꽤 심란하지만 이제 곧 열두 살. 하루하루 몸이 변해가는 걸 느끼는, 인생 최초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실감에 사로잡힌 소년은 담담히 새로운 세계로 걸음을 내딛는다.


2006-08-22 15:00,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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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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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