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의 비행, 그들 가족을 반기는 낯선 사람들 그리고 넘실거리는 바다. 마침내 당도한 남쪽, 오키나와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다. 꿈결과 같은 하루를 보내고 그들은 새로운 터전 이리오모테섬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 하나도 모르겠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지로를 위로하듯, 아버지는 도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성실함 그 자체로 돌변한다. 집을 수리하고 텃밭을 가꾸고 비록 여전히 아이들의 등교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사한 첫 날부터 새로이 둥지를 튼 이주가족을 오랜 이웃처럼 살뜰히 챙기는 정다운 이웃들 속에서 아버지는 더이상 지로에게 잿빛 마음을 선사하던 그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 역시 아무런 위협 없는 자연과 사람들 속에서 타고난 본성인 양 자연스레 새 생활에 묻어간다.
청경우독, 날씨 좋은 날에는 논밭을 갈고 비오는 날에는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본디 인간이 지녀야 할 모습이라며, 만족스럽게 생활에 적응한 가족들, 아니 아버지와 어머니. 유유자적 섬생활의 여유를 누리는 부모와 달리,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던 지로와 모모코도 다행히 오래 안달하지 않고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천국과도 같은 다정한 학교에를 다니게 된다. 학교에서 새로 사귄 몇몇 친구들, 캠프장에서 먹고 자는 캐나다인 베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섬에 어울리는 마냥 선량한 경찰관, 동네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학교앞 가게 아주머니. 다 꼽아도 손가락이 모자라지 않는 이웃들과 더불어 지로와 모모코에게도 점점 섬생활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되어간다. 더구나 도쿄에 남았던 누나마저 어느 날 홀연히 돌아와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은 그렇게 팔자를 타고난 사람들답게, 천혜의 아름다움을 가진 그들이 이주한 이리오모테섬은 리조트 개발을 앞두고 지역내 갈등을 안고 있는 상태였다. 돌아온 전설속의 과격전사는 운명처럼, 리조트 개발 반대운동을 빌미삼은 '자아찾기' 집단과 리조트 개발이 고립된 섬사람들의 오랜 소망이라는 미명 하에 자기 배를 채우는 섬 출신의 건설업자 그리고 나아가 리조트 개발을 담당하는 거대자본과 조우한다. 왕년의 그 무엇도, 좌익도 우익도 이미 넘어선 단독으로 행동하는 인간 이치로는 여전히 '나는 국가와 자본가의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겠다, 단지 그것뿐이오.' 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마치 헛소동과 같은 스펙타클의 집 지키기 투쟁, 자신이 어떻게 이용될런지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이치로의 과격함은 예외없이 되살아나고, 매스컴의 집중과 호들갑으로 마침내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너나없이 같은 짓을 반복하는 선정적인 매스컴, 호기심으로 가득한 관광객들의 줄이은 방문, 사태의 곁다리를 잡고 부채질하는 아버지를 둘러싼 많은 것들. 아버지는 흥밋거리가 되었고, 뭍의 반응을 살피려 친구에게 연락을 넣으니 무카이는 예의 아이답지 않은 결론을 내린다. "내가 생각건대, 너희 아버지는 그림이 돼. 키 크지 눈썹 굵직하지. 게다가 웃으면 묘하게 애교도 있어. 그러니 매스컴이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거야."
"원래부터 여기는 누구의 땅도 아녀. 그러니까 거래를 하는 쪽이 이상한 거야."라며 자연의 섭리를 믿는 순박한 섬의 사람들, "그 자들이 우타키를 부순다면 나는 그 답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질러주지. 일이 그렇게 된다면 죄다 케이티 책임이오. 그만큼 우타키는 우리 야에야마 사람들의 정신적인 뿌리 같은 것이야!"라며 기세등등하던 아버지. 그러나 현실은 힘 있는 쪽의 뜻대로 돌아간다. 모든 것을 걸고 끝까지 저항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비극적 최후의 주인공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캐나다인 방랑자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베니였다. 하지만 진짜 최후는 그 다음에... 한 밤의 헛소동, 우중의 불꽃놀이가 끝난 후, 아이들은 파이파티로마로 떠난 이치로와 사쿠라를 생각한다.
"아니, 국가 같은 게 아니라니까. 그냥 커뮤니티야. 사람들의 모임.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지도에 실리는 것도 거부한 거야." "혼자 살더라도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들면 정치경제가 발생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가도 자본가도 필요 없는 거야. 돈이 없어도 모두가 콘스턴트하게 가난을 즐기면 얼마든지 행복하지 않을까?" "나는 낙원을 추구해. 단지 그것뿐이야." ... 현실에서는 그저 꿈같은 이야기들이 소설에서는 현실이 된다. 세계의 변화를 생각하며 미간을 좁혀 진지한 질문을 쏟아낼 필요는 없겠지만, 답답한 세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통쾌함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에 빗댈만한 은유들이 곳곳에 묻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치로의 이 말이 좋았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과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도 하고 곧잘 거대담론과 연결되는 것들이기도 했지만, 결국 세상일 모두가 내 하는 일 모두가 어쩌면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건 아닐까. 엄마는 자신은 감화당하기 쉬운 사람이니까 당분간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겠다면서 활동을 그만뒀어. 내 생각인데, 엄마는 내내 아버지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거 같아.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살겠니? 완전히 상식과는 담을 쌓은 사람인데. 그리고 이 말, 책장을 덮고 나서는 혼자서 감히 생각했다. 나, 사쿠라랑 좀 비슷한 것 같애. 역시, 소설은 사람을 꿈꾸게 한다. 허무맹랑하게도.
2006-08-22 15:15,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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