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주의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할 건 없지만, 김영하는 신작이 나오면 '초판 1쇄' 탐증을 불러내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다. 야심 어린 긴 호흡을 선보인 '검은 꽃'도 제목도 상큼발랄한 '랄랄라하우스'도 별 감흥이 없기는 했지만, 조건반사처럼 나는 그의 신간을 사들였고 받아들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이야기는 단숨에 달려들어 읽을 만큼 예의 빠른 호흡을 자랑하고 있었고, 예전만큼의 몰입이나 떨림 같은 건 없었지만 읽는 내내 신경줄이 늘어지지 않을 만큼 흥미로왔다. 네 시간 가량 읽었을까, 새벽이었고 침대맡에 책을 밀쳐두고 바로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은 읽었다는 것도 까먹고 지내다가 여기저기서 마주치면서 다시 갸우뚱해졌다.
책이 나온 지는 보름쯤, 읽은 지는 일주일쯤이 되었다. 간혹 새로 문을 연 그의 홈피와 알라딘에서 독후감을 찾아 흘깃거렸다. 무언가를 읽고 반드시 판단(?)을 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석연찮은 느낌이 진하게 남은 게 나만 그런 건지 뭔지 궁금했다. '호출'이나 '엘리베이터..'를 읽었을 때의 가벼운 전율, 부담스럽지 않은 충격과 자극 같은 것, 그 때가 너무 멀다면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도 충분히 그랬다. 근데 뭐지, 이런 지지부진한 감상은? 작가의 변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성일까, 소설을 소설로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산만함일까, 혹은 김영하라는 이름에 걸고 있는 기대가 여전히 너무 높은 것일까.
인생의 절반을 북한에서 보내고 남파된 공작원, 남은 절반의 절반을 끈 떨어진 채 부유하며 불안한 안정을 구가하던 그에게 24시간 내 귀환명령이 떨어진다. 그리고 남은 24시간, 책의 띠지에 적힌 대로 '단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산 한 남자 이야기'가 펼쳐진다. 김기영과 아내 장마리와 외동딸 김현미 그리고 그들 세 사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이, 현상 이면에 감추어진 비밀스런 세상의 진실 비슷한 것을 공히 연상시키며 중첩되어 있다.
엄청난 자료 조사를 짐작케하는 박진감 넘치는 묘사와 진부하지 않게 잘 짜여진 구성, 예전 단편들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녹록지 않은 필력을 보여주는 재기 어린 문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작가세계' 가을호에 기고했다는 작가의 글을 살짝 엿봤는데, 그는 이 소설이 여태껏 자신이 쓴 작품 중 가장 현대적이고 모험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부연을 짧지 않게 덧붙였는데, 그의 홈피 게시물에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소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다. 아니 있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지워나간다. 마치 에셔의 판화 같은 구석이 있다. <검은 꽃>을 쓸 당시 나는 이런 고민을 했었다. 과연 인간들이 먼 곳에서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것, 그래서 완전히 잊혀진다는 것, 그 허무함을 지문이나 대사로서가 아닌, 형식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까? <검은 꽃>은 1부가 2부보다, 2부가 3부보다 짧다. 특히 3부는 극단적으로 짧다. 그런 기우뚱함, 불균형, 뭔가 더 얘기되어야할 것들이 되지 않은 듯한 느낌은 어떤 면에서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빛의 제국> 역시 주인공의 의도와 의지, 그의 소통은 보이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 즉 주인공이 의식할 수 없는, 그에게는 4차원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주인공의 외부에 위치한 소설의 구성과 형식을 통해 서서히 허물어져나간다. 소설적 현대성에 대한 이런 지향이 제대로 실현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소설을 읽음에 있어 ‘이야기’에만 집중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바람이다. 물론 이 소설은 ‘잘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음... 이 소설에 대해 남파간첩의 이야기다, 운동권 얘기다 라며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사실 작가의 위와 같은 글은 내게 좀 낭패스러웠다. 그는 예전에 꽤 잘 나가는 컬트 홈페이지의 얼리어답터 주인장으로 마니아들과의 평등한 소통을 일삼던 신세대 작가였고, 영화와 방송 등 다방면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전혀 경박스럽지 않게 어쩌면 그야말로 우아하게 존재감을 발하는 선택 받은 재간꾼이다. 물론 작가로서의 본분 역시 잃지 않고, 갈수록 긴 호흡의 이야기를 시도하면서도 당장 이 책이 읽힐까가 아니라 스스로 말하는 바와 같이 독자에게 일종의 실험을 제안할 만한 주도권을 가진 몇 안 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뜬금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의 무감흥의 이유가 짐작됐다. 미끈하고 세련된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모두 고뇌한다. 24시간 이내 귀환 명령을 받은 김기영은 자신이 어느 정도나 노출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십 수년 전의 동물적 감각을 되살려내며 서울 바닥을 종횡무진 뛰어다닌다. 한참 어린 잘난 애인과의 사랑(?)으로 일상의 권태를 억누르면서도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돌아보며 억울해하는 장마리 역시 나름대로는 간절하다. 겉보기에는 멀끔한 부모의 외동딸인 현미는 그 또릿한 영민함에도 불구하고 왕따인 친구를 단짝 삼고 존재하지도 않는 철이를 향한 관심을 저버리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좀 과장하자면 모두 참 간절하고도 간절하다.
그리고 작가는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너무 고전적인 독자의 자세지만, 혹은 진부한 드라마 시청자의 자세일런지도 모르지만, 나는 주도권을 가진 명민한 작가가 휘두르는 전지적 권능이 솔직히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기분대로 말하자면 약간 불쾌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모든 소설가들이 천편일률, 이야기 속으로 돌진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간절한 주인공들을 세상에 내보냈다고 작가 역시 울며불며 그들 뒤치다꺼리에만 골몰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기실 김영하와 그런 것은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럼 어쩌라고? 실은 나도 모르겠다. 다분히 내 기분일 수도 있지만, 행간에서 느껴지는 어떤 냉랭한 거리감 같은 것. 촌스러운 독자의 티를 벗지 못하는 내게는 답도 없이 그게 아쉬웠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장면은, 소지와 김기영 그리고 장마리와 김기영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뭔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듯한 사내에게 끌렸던 젊은 시절의 마음이 분명 아주 없지는 않은, 술에 취하고 추억에 취한 채로는 당신을 따라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역시 아주 없지는 않은, 그러나 소지와 김기영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소지는 그것을 통해 조용히 자신의 결심을 알리고 있었다. 기영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더는 개입하지 않기로, 그런 위험한 모험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마지막에라도 좀 현명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 아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할 뻔했네. 그래, 그럼 잘 있어." "그래요. 나도 그만 자야 될 것 같아요. 내일 다시 통화해요." "이 전화는 곧 버릴 거야. 아마 오래 통화 안 될 거다. 좋은 작품 써라." "...... 형도 몸조심하세요."
그리고 장마리와의 마지막 장면은 좀더 극적이고 끔찍하다. "돌아가라구. 그게 답이야. 미안해. 난 지금이 좋아. 당신이 안 가면 북에서 누군가가 내려올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난, 당신은 서운해하겠지만, 이제 와서 이름도 바꾸고 처음 보는 동네에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나는 없어." "믿든 안 믿든 당신 자유야.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오늘 아침에 당신이 만난 그 여자가 아니야. 난 배웠어. 인생에선 노, 라고 말해야 할 순간이 있는 거야. 지금이 바로 그때야." "신고할 거야. 112에 신고할 거야. 농담 아니야. 내 앞에서 당장 꺼져." 대여섯 쪽에 걸쳐,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고, 하루 종일 갈등한 문제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실은 자신을 잡아주기를 바라는 김기영과 그에 대응하는 장마리의 대화는 읽다보면 심지어 '거울에 대한 명상'의 우울하고 잔혹한 이미지마저 떠올리게 만든다.
'빛의 제국'을 어떤 소설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작가의 말을 들으니 더욱 그건 별 의미가 없는 일인 것도 같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공들인 표지와 작가가 말하는 운명적일만큼 그럴싸한 제목 선정에 대해 크게 공감을 하지는 못했다. 세상의 수많은 색깔이 빛으로 섞이면 검게 혹은 희게 수렴되듯이, 혹시나 그도 남과 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재와 부재 같은 모순된 것들의 일치 혹은 무별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게 이야기를 따라가 책장을 덮고 그나마 내가 얻은 감상은, 아귀같은 현실에 사로잡힌 채 발버둥치면서도 결국 그로부터 떠날 수 없는 불가항의 존재 양식 같은 거였다.
결국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저 상황에 휘둘리고마는 인간의 적나라함 같은 것. 그리고 간절한 그들을 조종하는, 독자의 시선마저도 장악하고자 하는 작가의 유연한 능수능란함 같은 것. 하지만 이제는 사는 일만도 너무 피곤하여 책 한 권을 읽으며 행간의 미로를 따라 작위의 열광을 만들어내는 일 같은 건 내게 너무 도저하다. 다시 한 번 마음을 열고 읽어본다면 미처 느끼지 못한 또다른 감상이 덧붙여질런지 모르지만, 아마 그럴 리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시대착오적 절실함'을 이 책에서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까 싶다. 난 이제 그에게 흡족한 독자는 아니게 된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2006-08-23 00:46,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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