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수련연못'이 노을인 양 온통 불타고 있는 책표지가 마음에 든다. 이제 잔치가 끝난 서른에 접어든 나는, 그녀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거리낄 것 없는 비밀의 그림자만을 드러내는 듯한 그녀의 시는 부담스러웠고, 평범 속의 비범이 느껴지는 그녀의 글은 내 속의 우울함을 끄집어내는 듯 해서 만날 때마다 반갑지가 않았다. 아마도 노란 시선 속으로 먼저 들어왔던 그녀의 개인사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었던 것 같다. 주제 넘게도 책장을 덮고나서야 불혹을 넘긴 그녀의 내적 성숙과 순하게 차오른 밀도가 느껴지는 듯 했다.
스무 개 쯤의 소재를 시대순으로 묶어 나열한 작가와 작품은 미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은 스쳐가며 만났을 법한 것들이다. 그래서 일단은 친근한 느낌으로 책장을 넘길 수 있다. 각 장의 서두에 붙여진 본문과 관련 문헌에서 뽑아낸 몇 줄의 글은 붙여진 소제목과 함께 대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예감케 하고, 책장을 넘기기 전 독자에게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한다. 화가의 우연한 시선에 포착되어 그림으로 옮겨진 대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인간과 인생에 대한 사려깊은 통찰과 반성이다.
또한 이 책의 미덕은 사람을 향한 저자의 관심과 애정이다. 저자는 하나의 작품을 설명하면서 작가와 인물에 대한 전기적 요소를 성의있게 삽입해놓았다. 그림이나 음악이나 글이나, 한 개인의 정신 활동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 작품을 잉태한 사람과 그의 삶에 대해 알기를 즐기는 편이다. 작품에 대한 과잉한 해석을 불러일으킬 소지에도 불구하고, 오해석의 여지를 감수하고라도 말이다. 전기주의적 관점의 오류가 얼마간 있다해도 이 책에서 접한 화가들의 면면은 내게 흥미롭고 의미있었다.
그림을 놓고 저자는 설명하거나 분석하려 하지 않는다. 감상에 젖어 수 백년 전의 인물을 상상해보고 조심스레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예민한 감수성과 예술가적인 감성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사유를 넘어 인간 보편의 문제로 전이되고 공감을 끌어낸다. 예나 지금이나 남다른 성정과 재능을 타고난 예술가의 삶은 일상인의 평균적인 삶을 벗어난 쓴 맛의 깊이가 있었을 터이다. 인생사의 고통을 다른 차원의 환희로 이끌어냈던 그들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추고 다시 한 번 그림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다리 역할을 저자는 충실히 해주고 있다.
책 말미에 덧붙은 고백대로 저자는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변하지 않는 건 모두 변한다는 것 뿐이라는 말처럼, 실은 그녀도 나도 세상 모든 것도 다 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심지처럼 굳게 자리한 인간과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진행형의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믿음을 전해준다. 가슴 속에 사람이라는 빛을 간직한 그녀에게는 이제 나날이 작은 잔치일런지도 모르겠다. 새삼 그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3-02-08 16:43,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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