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소설은 재미있다. 아주 가끔 생뚱맞은 전개와 비현실적인 인물이 등장해서 은희경 맞나 싶은 작품을 만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안정된 재미와 의미를 보장하는 믿을만한 구석이 있다. 게다가 그녀가 구사하는 반어와 역설의 풍자는 냉랭하지 않은 거리감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어주곤 한다.
'마이너리그'는 서로가 나머지보다는 좀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의 눈에는 그저 한 묶음의 그렇고 그런 패거리일 뿐인 이른바 '만수산 4인방'의 이야기다. 학창 시절부터 그들이 사회로 뿔뿔이 흩어진 이후까지의 드라마가 끊을 수 없는 4인방의 유기적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타고난 필력에다 세상의 이면을 통찰하는 예리한 안목을 갖춘 작가의 시선에 걸린 이들의 인생사는 마치 하나의 소극을 보는 듯이, 당사자들에게는 너무나 진지하게 제 3자인 독자에게는 너무나 우습고 한심하게 그려진다.
나는 이 작품이 '여성작가 은희경의 통렬한 남성보고서'라는 타자로서의 여성의 눈으로 본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관찰이라는 내용적 표피성보다는, 아직까지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성적 강자이며 사회적 약자인 대다수 남성들의 난망한 세상살이에 대한 희화적 소묘가 아닌가 한다. 어차피 세상은 주도권을 쥔 자와 그 영향 아래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서 생활의 주력군으로 생존의 책임을 조금 더 지고 살아내야하는 것이 남성일 뿐, 여성의 문제로 옮겨온다한들 그 지난하고 막막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재미있지만 서글프다. 전통적으로 사회적으로 잠재적 우위를 지닌 타자로서의 남성들의 무망한 고투가 통쾌하다기보다는, 성을 불문하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태생의 마이너리티를 던져버리지 못할 나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의 고단한 인생살이가 새삼 안스러운 느낌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범인의 인생을 바라보는 '마이너리그'의 시선이 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생활의 한 순간 한 순간 느끼는 삶의 의미와 가치는 그런 거시적인 관점만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점이다.
2003-02-08 18:10,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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