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의 독서는 그 이후 어느 시기의 그것보다도 강렬한 기억을 많이 남겨준다. 그 즈음의 독서가 내가 누구이고 사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인생 최초의 철학적 자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심각한(?) 사명과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 그 시절의 기억은 범우 사루비아 문고의 빛바랜 책장과 함께 떠오른다. '수레바퀴 밑에서'니 '좁은 문'이니 '폭풍의 언덕'이니 따위의 이른바 서양 고전들의 세계를 접하며, 혹시나 우려했던 고리타분함이나 지루함이 아닌 다른 시대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 사이를 가득 채웠던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은 고민의 흔적들을 읽는 일은 적잖은 위로로 가슴에 각인되었다. 그 시절 만나 내 인생의 책이 되어버린 또 한 권이 바로 '회색 노트'다.
처음 만났던 이 책의 출판사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떨리는 가슴으로 책장을 덮고, 말미의 해설에서 이 책은 '티보가의 사람들'이라는 연작 소설의 첫 부분이며 2부가 되는 '소년원' 이후의 내용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무척이나 아쉬워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10여년이 지나 민음사에서 다섯 권의 양장본으로 완간된 '티보가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 다시 살아나던 그 시절 '회색노트'의 기억. 그 방대하고 유장한 티보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있고 감동적이었지만, 어린 시절 '회색노트'의 강렬함을 상쇄시키지는 못했다.
두터운 책장, 양장본의 부담을 덜고 가볍게 지니고 자주 펼쳐보고 싶은 마음에 뒤늦게 다시 구한 작은 '회색노트'. 다니엘과 자끄의 애틋한 우정이 담겨있는 이 책은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은 경험했을 법한 시공을 초월한 우정의 가슴앓이를 내게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어정쩡하고 어찌할 수 없는 시기에 찾아오는 자아와 세상을 향한 불안과 혼돈은 결국 또래와의 교감으로 탈출구를 찾고, 그들이 마르세이유로의 가출을 결행하듯 우리 역시 어디론가 마음을 멀리 떠나보낸다. 하지만 몸이건 마음이건 그것이 닿은 자리에 남는 것은 내가 꿈꾸던 먼 곳의 그 무엇이 아니라, 떠날 때와 다름 없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져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상이라는 그물망이다. 떠난다고 떠날 수 없고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 혹독한 시련은 결국 그 시기를 견디고 버텨내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모든 인간의 통과 의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고 나니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너와 나만의 '회색노트'를 가질 수 있었던 그 시절은, 한없이 희고 싶고 또 가끔은 한없이 검고 싶었던 어린 마음에 그리고 그 시절에만 향유할 수 있는 선물이었다는 것을. 난마처럼 얽혀 도저히 풀 길 없는 내 속의 문제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 헤집고 다니며 부딪치고 깨지고 아파할 수 있는 시간도 인생에서 그리 길지는 않다는 사실을. 그렇게 고통스런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우리는 결국 조금 더 자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2003-02-08 13:21, 알라딘
회색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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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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