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외치는 저나 여러분 모두 오늘 밤 죽기는 싫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커지는 총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깜깜한 밤중에 광주를 뒤덮은 공수부대의 총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광주시민을 어둠 속에 몰아넣고 총질을 해대는 살인마들을 저대로 내버려둬야 옳습니까. 광주시민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광주시민은 오늘밤 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 몇 시간 후, 아니 30분 뒤에라도 여러분과 저는 영영 이별을 할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아서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광주시민이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있는 역사로 기록될 겁니다. 광주와 광주시민들은 결코 오늘밤을 잊지 않을 겁니다. 오늘밤 도청에 있는 우리를 영원히 기억할겁니다. …… ."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사수하다 전사한 광주민중항쟁 지도부 대변인 윤상원이 계엄군의 진격 소식에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며 시민군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솔직히 좀은 불퉁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는 중이었지만, 이 대목에서 양팔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 마음 한 번 달리 먹으면 피해갈 수 있음에도 그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 그 강함과 그 의지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윤상원을 생각할 때 곧잘 아옌데를 떠올린다. 전장이되 전장이 아닌, 투항과 삶을 얼마든지 맞바꿀 수 있는 상황에서 선택하는 죽음.
지독히도 가난한 집안의 장남, 줄줄이 딸린 동생들의 양보와 부모의 온갖 바라지를 독차지하고 도시에 유학하며 가세를 일으킬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전후 세대의 많은 농촌 출신 장남들의 운명이었고 갈 길이었으며, 양 어깨에 매달린 책임감으로 내달려 자수성가한 뒤에는 집안의 어엿한 기둥으로 오직 가족에 복무한 우리의 아버지 삼촌들이 있었다.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마을 곤궁한 농가에서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의 장남으로 태어난 윤상원 역시 마찬가지.
열심히 공부하고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장남의 무게에 짓눌리며 중학시절부터 도시에서 유학한 그는, 그러나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보다는 사춘기의 방황과 반항으로 학창시절을 보낸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담배로 시름을 날리면서도 저 하나 바라보고 뼈빠지게 일하는 부모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소년. 끼도 많고 재주도 많고 입심도 좋아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늘 함께였던, 그러나 도시 친구들 사이에서 유달리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늘 마음 한켠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던 소년이었다.
삼수를 하고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1971년, 박정희의 독재가 서슬 퍼렇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억압의 기운 가득한 캠퍼스에서 걱정거리 주렁주렁 달린 지난한 현실 대신 연극반에서 맛보는 무대 위의 희열에 열정을 태운다. 그 시절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던 유신의 공기를 느끼면서도, 대학에 가서는 사람 구실 하리라는 온 집안의 기대를 배반할 수 없었던 그는 군생활을 끝내고 복학한 후에 외무고시 준비에 매달렸다.
그리고 어느 날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선배 김상윤과의 만남, 말 그대로 운명을 바꾼 그 만남으로 그의 삶은 갈등 속에서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긴급조치가 난무하는 폭압의 정치 속에서 어렴풋이 유혹처럼 다가오곤했던 저항의 의지와 시대에 헌신하고자 하는 신념을 막아섰던 것은 언제나, 극도의 가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가족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부모와 동생들이었다. 청춘의 혈기와 솟구치는 의협심, 양심의 소리 속에서 끝없이 번민하며 그는 '마지막 효도'로 졸업과 취업을 선택해 상경했지만, 어렵사리 합격한 은행에서의 직장생활은 육개월로 끝이 났다.
전남대의 '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되어 피신한 후배들과의 만남을 통해 결심을 굳힌 그는 1978년 여름, 광주로 내려와 공장에 취업해 노동자로 살아가며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기틀을 잡고자 모색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당시 광천공단에서 들불야학을 꾸리던 학출 노동자 박기순의 설득으로 야학에 합류하고, 김상윤과 녹두서점을 함께 운영하며 한편 그 곳에서 주민운동을 펼치던 김영철 등과도 연대활동을 이어간다. 비록 '마지막 효도'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서울로의 취업 상경에서 육개월 만에 돌아와 광주에 붙박힐 수 있었던 것은, 대학시절 김상윤과의 만남 이후 꾸준한 학습과 토론을 통해 시대와 운동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가 광주로 돌아온 후 80년 5월 항쟁까지 활동했던 광천동은 공단 인근의 빈민촌이었던 시민아파트를 중심으로 주민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인접한 들불야학은 지역의 종교단체와 노동자들의 희망으로 활기 어린 공간이었고, 김상윤이 광주의 지역운동 거점으로 삼아 문을 연 녹두서점과도 긴밀히 연계하고 있었다. 윤상원은 이 시절 광천공단노동자실태조사 등을 수행하는 지역운동과 불의의 사고로 이르게 세상을 떠난 박기순이 헌신했던 들불야학 활동 그리고 녹두서점 일 등에 동시에 관여하며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싹을 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80년 피의 광주에 앞선 서울의 봄. 학생운동을 비롯 오랜 억압 속에서 암중모색 중이던 다양한 운동이 새로운 세상을 맞을 준비로 바삐 움직이던 때, 그는 부평에서 열린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 집회에 광주전남 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위원으로 비밀리에 참여했다. 한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광주전남지부 실무자로 내정되어 합법과 비합법을 오가며 본격적인 대외 활동을 준비하던 청년운동가였다. 그와 동시에 자율적 총학생회 건설의 기회를 맞은 전남대에서 총학생회장에 출마한 박관현을 돕고 들불야학과 광천동 주민운동, 녹두서점을 챙기며 함께 활동하는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갈등과 준비 끝에 운동에 투신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토록 자신을 옭아매던 가족도 내팽개치고 혼신을 다해 매달렸던 노동운동이 채 싹을 틔우기도 전에, 광주에는 피냄새 가득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치밀한 준비와 계획 하에 일찌감치 사전 검속으로 운동권 지도부들을 연행한 군부는 저항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민들을 상대로 살육작전을 감행했고, 분노한 시민들은 처절하게 투쟁했지만 사상자만 속출하며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윤상원과 들불야학팀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외로운 항거를 지속하고 있는 광주 상황을 보며 투사회보와 민주시민회보 등을 제작해 뿌린다. 그리고 계엄군이 물러난 해방 광주의 수세적이고 타협적인 시민학생수습대책위를 보며 시민궐기대회를 조직하고 25일 마침내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꾸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노와 통한을 담아 결사항전을 각오한 항쟁지도부의 결성 역시 너무나 늦었다. 불과 이틀만에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공습을 감행한 계엄군에 의해,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까지 광주를 사수하던 시민군들은 장렬히 전사하거나 투항하고 만다.
도청 민원실 2층 창가에 총구를 대고 최후의 결전에 임했던 윤상원은, 계엄군의 총격으로 복부 관통상을 입고 죽었다. 함께 있던 김영철과 이양현이 시신을 옮기고 덮은 커튼에 불이 붙었고, 후에 외신 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그의 시신은 창자가 흘러내리고 불에 탄 처참한 상태였다고 한다. 윤상원은 성명미상으로 분류한 계엄군에 의해 시청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에 가매장되었고, 죽은 지 한 달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가 확인하고 봉분했다.
알려진 대로, 지인들에 의해 1982년 들불야학의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이 진행됐고 1997년에는 새로 조성된 망월동 신묘역에 합장되었으며, 2001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되어 '명예회복'되었다. 1991년에 나왔던 평전 '들불의 초상'의 재개정판이 지난 달에 출간되었고, 지난 해에는 불에 탔던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며칠 전 모교인 광주 사레지오고교에서는 그의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하고, 그의 일기를 묶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집도 새로이 나왔다고 들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시 '부활'하는 것일까.
사실 책을 읽으며 아쉬운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조금 다른 느낌이기는 했지만 지난 달 출간된 '윤상원 평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느낀 아쉬움은 최소한의 성의 내지는 진정성의 결여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불과 서른 해를 살다가 '영웅적인 죽음'만이 세인의 주목을 끈 한 인물의 삶을 재구성하는 일 자체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삶을 증언할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해있는 시점에서, 그의 일기와 기록들이 생가를 장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토록 평면적이고 단순한 어린이 위인전 같은 책을 만들어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이 책의 저자는(물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시리즈물이다보니, 저자는 책표지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도 없을만큼 크게 존재감을 갖지 않지만), 서두의 작가의 말에서 인물에 대한 짙은 애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아름다운 결단'의 근원을 묻는 그의 절절한 물음까지만 나는 공감했다. 책을 읽는 내내, 광대의 끼를 타고나 시름이고 걱정이고 소리 한 자락으로 잊으며 유유자적 살았던 낭만적이고 순박한 청년과 운동에 헌신해 죽음의 투쟁 한복판에 뛰어든 치열한 투사의 극적 대비에만 안이하게 머물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별로 납득되지 않는 화자의 시점 혼용과 맥락없이 뒤섞이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용은, 가뜩이나 불만스런 심정에 몰입마저 방해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구구절절 기록하고야 만 것은... 그의 저항과 그의 죽음이 어쩐지, 도처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소리 없는 아우성에 갇혀버린 듯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나 역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수없이 부르면서도, 이 노래가 그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곡이었다는 것을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기억은 사라지고 기념은 때가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 그의 삶과 죽음의 정신은 어찌되었건 '계승'하기 위해 애써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졌다.
2007-06-07 03:33, 알라딘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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