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태어나는 것만이 죽으니, 탄생은 죽음에 진 빚이다" - 테르툴리아누스
• 1장
. 내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일종의 불안장애를 겪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훗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내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 지나간 기억은 외려 생생해지기만 하는데, 새로운 경험은 그에 터무니없이 미달한다는 것을 거듭하여 깨닫게 될 때, 인생은 시시해진다. 나는 너무 일찍 그것을 알아버렸다.
. 내가 원하는 것을 제이가 알아차려준다는 것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거. 나는 고개를 끄덕여 제이가 원하는 것을 그냥 내가 원했던 것인 양 믿어버리곤 했다. 제이는 내 욕망의 수신자가 아니라 통역자였다.
. 북엇국 p41
• 2장
. 염목란, 북한 국화
• 3장
. " ... 그 무엇이든 그 존재에 합당하지 않은 고통을 겪고 있다면, 나도 그걸 느낄 수 있어."
. "신은 원래 그런 존재야.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
. 그들을 만날 때마다 제이는 간단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전했다. 너희들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로 인해 아프다. 아이들은 제이가 자기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존재라고 느꼈고, 그의 기이한 생활 태도에 외경심을 품었다.
. 제이는 물건의 소유에 대한 개념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 자신은 물건과 직접 교감을 나누는 존재이므로 물건의 뜻을 존중하기만 한다면 잠시 가져다 쓰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복잡한 금기를 지켰다.
. 제이가 다른 사람의 인생이나 사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때는 그가 사용하는 말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가 내 삶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자 그의 말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문득 깨닫게 되었다.
. 그러나 한때 내 욕망의 통역자였던 제이는 이제 나라는 인간의 내면을 읽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게 그를 더 오만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 ... 그 새벽, 나를 괴롭힌 것은 제이와 내가 다시는 하나가 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었다. 우리는 완벽한 타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 제이의 영혼은 위스키 상자로 쌓은 탑을 다시 필요로 하고 있었다. 타고 올라 자신이 떠나온 세상을 내려다볼 위태로운 탑. 그것은 필경 무너질 것이었고 나는 다시 한번 그 추락의 목격자가 될 것이었다.
. 제이는 바다의 기이함을 단숨에 파악했다. 그것은 거대한 없음이었다. 제이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존재하지 않게 될 미래를 떠올렸다. 그 순간 제이가 느낀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우주의 시간이 바다라는 형태를 빌려 나타난 것만 같았다.
. 그 안에서 나의 위치는 애매했다. 새로 합류한 제이의 추종자들은 거칠었고, 대놓고 나를 함부로 대했다. 제이가 내 존재에 관심을 기울여줄 때마다 황송함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그러는 내가 싫었다. 아이들은 제이가 나를 상대할 때만 나를 잠시 의식했다가 곧 다시 잊어버렸다.
. 인기가 권력이라는 것, 권력은 폭력이 본래 구현하려던 것을 폭력 없이 구현하는 힘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 " ... 폭주는 우리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리는 거야. 어떻게? 졸라 폭력적으로. 말로 하면 안 되냐고? 안 돼. 왜? 우리는 말을 못하니까. 말은 어른들 거니까. 하면 자기들이 이기는 거니까 자꾸 우리보고 대화로 하자고 하는 거야."
. 제이가 목란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 순간, 목란에 대한 나의 욕망도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목란에게 빠졌던 건 바로 제이가 그녀를 원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 4장
. 승태는 그 남자가 자신에게 던진 말의 그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으려 애썼다.
.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은 십대 아이들과의 관계 그 자체보다 그들에게 힘을 행사하는 자신의 말이었다. 오래 전의 자신처럼 아이들은 타인이 던진 말에 곧잘 사로잡혔다. 때로 그 말에 걸려들지 않는 아이들은 폭력과 권력으로 제압했고 그럴 때마다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은 안전하다는 느낌.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모르면서도 그는 그것에 중독되어가고 있었다.
.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염원한다는 지식인들도 폭주족만큼은 '민중'으로 고려해주지 않았다.
. 훈련된 사법경찰관은 그 어떤 복잡한 사건이든 단 한 문장으로 조서를 꾸밀 수 있어야 한다. ... 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작성된 조서는 피조사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 독점된 합법적 폭력의 정신이 이렇듯 경찰의 문체에마저 스며 있다는 것, 그 도저람은 갈수록 어떤 불편함을 불러일으켰다.
. 그러나 경찰은, 그러니까 국가는, 비록 굼뜨고 어리석을지 몰라도 집요하다. 망각을 모른다. 채증한 사진과 자료를 바탕으로 폭력의 궁극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천천히 일깨워준다. 그러니까 경찰은, 흡혈귀라기보다는 좀비다. 타인의 시선 따위 의식하지 않는다.
. 승태가 볼 때, 태주와 같은 소년들은 폭력에 늬한 굴복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이들은 패자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부분을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부분과 구별하지 못한다. 힘에서 졌기 때문에 뭐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면이 가련한 수컷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 폭주족은 국민 모두가 마음놓고 증오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집단이었다. 낮에는 조금만 배달이 늦어도 짜증을 내던 사람들이 밤에는 배달이나 하는 짱개들이 질서를 무시하고 도심을 개판으로 만든다고 욕을 퍼부었다.
. 위험하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선택한 이 지킬 박사들은 이제 안전의식과 준법정신을 입증해야만 했고 그러자면 자신들 내면에 잠복해 있는 하이드를 죽여야 했다. ... 대폭주가 언론에 오르내릴 때마다 이들이 정말로 분개하는 이유는 그들의 오토바이가 고속도로에 합법적으로 올라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 철부지 십대들이 그 존재만으로 그들을 보수 속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은 자기들의 일그러진 거울을 부수기 위해 광복절 전야의 전쟁기념관 앞에 집결해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순간의 이들 역시 대폭주를 앞둔 십대만큼이나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 감정의 숙취
.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자신이 태어난 고속버스터미널의 모습이 보였다.
•
. 그런데 소설가는 인생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자기가 소설로 쓸 수 있는 인생에 관심이 있다.
. 흥미로운 이야기는 변절자나 이탈자 들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 윤리는 둑과 같다. 어느 정도까지는 자아를 지켜주지만 한번 터지면 격렬한 방류가 뒤따른다. ... 이게 죄라는 생각이 당장은 들지 않는다. 다만 지금껏 잘 지켜온 인생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
"빛의 제국"에서부터 시큰둥해졌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의 "밀회"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었다. 그리고 장편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뒤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예약구매. 이사 전에 읽고 있던 "원더보이"의 책장을 마저 덮지 못했던 차였는데, 두 책의 주인공이 묘하게 겹쳐지면서... 자못 세기말의 아우라를 풍기는 광란의 시절을 버텨나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두 작가의 위로인가 뭐 그런 생각도 혼자 했었다. 아무려나, 김영하는 내가 열광하든 저어하든, 대단히 영민한 이야기꾼이며 부러운 감수성의 글쟁이라는 생각도 다시 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인지, 혹은 소설의 모티브와 작가의 말을 대신한 것인지, 아니면 그 모두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세계를 취재만으로 알 수 있을까? 이런 도저한 소외와 감정의 바닥을 상상만으로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으로 책장을 넘기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소설적 장치인지 명명하지 않은 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마지막 부분에서 스포일러처럼 밝혀지는 나의 궁금증들을 확인하면서도 끝내 아무런 부연을 달지 않고 그 모든 의문들을 소설에 오롯이 맡겨두는 그의 '쿨함'은 참 여전하다는 생각도 했다. 오랜만에, 참 인상적인 소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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