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2. 6. 16. 16:47

 



갑작스러운 제안과 즉흥적인 결정 후 시간이 참 잘 간다. 영등포 시절 또 통영으로 이사한 후 타인과의 짧은 동거를 한 적 있는데 별 일은 없었지만 내심 편치 않았고, 20년을 혼자 살아오며 갈수록 내맘대로가 진해지는 사람으로서 걱정이 적지 않다. 그러나 결정을 내렸고 일단 1년은 감수해야 하는 일이니 훈련이라 생각하며 버텨보려 애쓰는 중이다. 와중에 2월의 과유불급과 어떤 예감 이후 3월부터 어긋난 관계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ㄲ-ㅌ을 그리고 있고, 진의를 알 수 없는 체크성 연락에 오히려 그 ㄲ-ㅌ이 내게는 꽤 진심이라고 느끼면서, 각별했던 10년 세월이 남긴 게 인연의 허무함뿐이라는 걸 차분히 절감하고 있다. 각별함은 때로 필요하지만 그 어떤 별난 관계도 '나'보다 중요하거나 '나'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이, 누구에게나 그러한 것인지 이기적인 내게만 당위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려나, 2년 가까운 백수 생활을 마무리하며 갑자기 분주해진 일상만큼이나 마음속도 부산하고 혼란스러운 날들이었다.

 

그러한 중에 어제는 활동하던 시절 나를 나름 각별히(은근히 범용 표현) 생각해주던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어떤 활동에 집중하던 시기 그 공동체의 성원으로 만났고 활동이 일단락된 후에는 띄엄띄엄 마주쳤지만 그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연락을 하거나 우연한 만남을 조금 짙은 시간으로 만들고는 했었다. 단체를 그만두고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통영에 내려오는 몇 달을 거치면서 사람들에게 굳이 따로 알리지는 않았는데,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 전화를 몇 차례 해줬던 사람이기도 하다. 어제 그는 누군가에게 책방 이야기를 들었다며 잘 지내는지 물었고,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고 공식적으로 책방을 내는 건 연말이나 될 것 같다고 답하자 "OO아, 좋은 일이든 아닌 일이든 상의할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말했다. 실제로 뭔가 상의하며 전화할 일은 없을 테지만 알겠다고, 고맙다고 답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정말로 고마웠고 조금 울컥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장차 책방이 되고 싶은 공간에 짐을 나르고 대충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난생처음 길거리캐스팅 제안을 받았다. 일하시느냐 물으며 건너 편 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다가온 아저씨가 내민 종이에 쓰인 여러 단어 중 눈에 확 들어온 것은 '야쿠르트'. 갑작스러운 일이라 좀 당황해서 "저 가게하기로 했는데요..." 대답했더니 환하게 웃으시며 "번창하시길 바랄게요." 하고 아저씨는 사라지셨다. 야쿠르트 요원을 거리에서 곧잘 마주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아저씨가 워낙 급하셨나 생각하다가, 문득 내 옷을 보니 상의가 야쿠르트 색깔이어서 혼자 웃었다. 본인 사정으로 불쑥 말을 걸어온 것이지만, 마침 작은 이사를 마친 후에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터라 괜히 마음이 환해지기도 했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일 뿐이지만, 영향력 진정성 휘발성 같은 거랑 무관하게 흔쾌한 일이다. 어제오늘, 두 사람의 덕담을 당분간은 기억할 것 같다.

 

 

 

'산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가분  (0) 2022.06.18
신세계  (0) 2022.06.17
막차 숙제, <테이크 유어 타임>과 <바다·그 영원한 빛>  (0) 2022.05.06
하나씩 사라진다  (0) 2022.04.20
처음  (0) 2022.04.14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