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부터 거리에 날리기 시작한 배너들을 오래 마주쳤고, 통영국제음악당에 공연을 보러 오가면서 주제관을 몇 번 지나쳤다. 브로셔와 홈페이지를 살피며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방대한 규모에 괜히 위축되기도 했지만, 장기간 진행되고 전시관도 여러 곳이니 아예 52일권을 사서 찬찬히 돌아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현대미술이나 융복합 예술 같은 데에 관심도 없고 무지해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과 우려가 컸지만 그래도 통영에서 하는데 싶어 염두에 둔 거였는데, 가려고 굳게 마음을 먹고 정보를 찾아볼수록 부담스러워졌다.
돌아서면 까먹는 삶을 살고 있으니 내려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은 버리지 못한 전작주의 강박도 큰 이유였고, 주제전만으로 범위를 좁혔음에도 7층이나 되는 전시장과 30명 이상 작가의 80여 점 작품 규모라는 점을 떠올릴 때마다 동반되는 망설임과 어리석음과 욕심 속에 4월을 흘려보냈다. 어린이날까지도 갈등하다 지나간 후, 이 정도로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안 가는 게 맞지 않을까와 그랬다가 다음 주가 되면 후회하지 않을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너댓 개나 찾아본 후 집을 나섰다.
유튜브에서 큐레이터들의 설명과 도슨트 영상 등을 찾아봤지만 그래도 실제로 보면서 듣는 건 다를 것 같아서, 2시 도슨트 투어를 신청하고 70분 정도를 먼저 둘러보았다. 신아SB조선소 연구동을 리모델링해 재생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제전 <테이크 유어 타임>은 “과거로부터 얻어 현재를 만들고 미래를 설계한다.”고 표방한다. “예술의 목적은 순간적으로 아드레날린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다. 경이로움과 평온함의 점진적, 평생의 건설이다.” 글렌 굴드의 말이 전시관 1층에도 홈페이지에도 발문처럼 붙어 있는데, 멋진 말이지만 그가 온 삶을 예술에 걸고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고립된 생애을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층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문구는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지금 하고 있는 그것이 당신의 실체이다.", 승산이라는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시작부터 크게 뼈를 맞았다. 이동하는 계단에는 "반향"이라는 미디어아트 작품이 연속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트리엔날레 큐레이터인 다니엘 카펠리앙이 현각스님의 만트라 암송을 촬영해 작업한 것이고,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명상에 잠기는 경험을 의도했다는데 가능한 차원인지 잘 모르겠다. 이름만은 익숙한 강요배, 임옥상 작가의 작품, 이름도 이력도 모르지만 직관적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몇몇 작품이 있었고, 적지 않은 미디어아트 작품은 짧게는 5분 내외 보통은 10분 이상의 길이인 데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연속되고 순환되는 느낌이어서 시간을 생각하며 주마간산할 수밖에 없었다.
도슨트 덕분에 각 층마다 시간, 자연, 미래 등의 테마가 있다는 사실과 소소하지만 새로운 몇 가지 정보를 얻었는데, 7층까지를 40분에 소화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그 역시 주마간산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관심이 가는 작품은 해설을 열심히 읽었는데 해설 패널 위치가 너무 어두워 쉽지 않았고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장기 전시의 끝물이라선지 관람객이 적지 않았고 은근 연휴 기간이라선지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도 있었는데 아이들은 귀엽지만 전시에 집중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했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연출된 음악의 큰 볼륨이 오히려 거슬리기도 했고 미디어아트 작품이 많다 보니 겹치는 소음 같은 것들도 있어 좀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경이로움과 평온함의 점진적, 평생의 건설'의 한 조각으로 삼기에도 내게는 전체적으로 별 감흥이 없었고, 끝나기 전에 봤다는 것이 의미라면 의미로 남을 것 같다.
그럼에도 <바다·그 영원한 빛>을 보러 간 것은 통영에 샤갈과 피카소의 그림이 와 있다니 한 번 봐야지 싶은 단순한 마음이었다. 덕분에 전혁림 미술관에 꽤 오랜만에 가게 됐고, 갔었다는 기억만 남은 어릴 적 63빌딩에서의 전시 이후 다시 피카소의 그림을 만났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눈으로만 봤는데 사실 사진을 찍은들 얼마나 기억할 것인가. 샤갈의 "꽃다발"이라는 그림이 1973년작이라고 되어 있는 게 신기해서 찾아보니 그는 1887년에 태어나 1985년에 세상을 떠난 거의 동시대의 작가였다. 100점이 넘는 미술 작품을 접한 오늘의 가장 큰 발견이자 다소 충격적인 확인이었는데, 1990년대에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카페에 드나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마침 톡을 나누던 사촌에게 전했더니 함께 놀래줘서 고마웠다.
2층에는 전에는 본 적 없는 대형 초상화가 있어 이채로웠고 몇 번 봤다고 흔히 여길 것은 아니지만, 아무려나 통틀어 열 번은 와봤을 것이므로 잠깐 둘러보고 3층으로 향했다. 일곱 작가의 작품들이 한 점씩 있었는데, "어디든 어디도 아닌"이라는 제목이 붙은 강렬한 추상화가 눈길을 끌었고 "Self-Portrait"라는 짧은 미디어아트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조금 큰 크기와 적당한 높이로 설치되었다면 작가의 자화상이 떨어져내린 후 관객이 마주하는 자화상이 좀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1999년작이라니 한참 전이군 싶으면서도 피상적이나마 현대미술의 흥미로움을 잠시 경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예술은 무엇이고 현대미술은 무엇이고 융복합은 무엇이고, 이 모든 것은 또 무엇일까. 문외한이기 때문이지만, 사진과 영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기록과 교육과 재현과 표현과 기타 등등의 실용적이거나 비실용적이거나 한 여러 기능을 담당했던 미술 장르 중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작가와 작품과 이야기들이 내게는 그나마 미술에 대한 관심을 끄는 부분이라선지 참 어렵다. 물론 미디어가 발전을 거듭하고 첨단의 첨단을 구가해도 인간의 표현 의지와 욕구를 대신할 수는 없을 테니 미술도 예술도 존재하는 거겠지만, 해설이 없다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고 유추하는 재미도 별로 느낄 수 없는 작품들을 숙제처럼 연이어 마주하는 경험이 회의적으로 느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거대하고 방대한 스케일을 힘들어하는 성정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하여 오늘의 전시들은 막차를 놓치지 않고 숙제를 했다는 의의로 남겨진다. 이번 트리엔날레는 이후의 이벤트를 위한 씨앗을 뿌리는 것이고 농부의 마음으로 준비했다는 큐레이터의 말이 기억나고, 지금 통영에서 트리엔날레의 시작은 '지역의 밥'과 예술을 긴밀히 연결한 꽤 간절한 무엇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올해 뿌린 씨앗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3년 후의 나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 혹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에 갑자기 생각이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