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4. 2. 6. 14:14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리안은 파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캉으로 왔다. 작가인 그는 정체를 숨기고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과 노동을 경험하고 생생한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려 한다. 고용센터에서 상담을 기다리던 그의 눈에 한 여성이 들어온다. 화가 잔뜩 난 강단 있어 보이는 여성은, 고용센터 담당자의 잘못된 서류 처리를 따지러 왔지만 미리 예약하지 않은 탓에 제지당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업수당을 받지 못하면 아이들은 어떡하냐는 절박한 항의는 절차에 밀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주부로 살다가 이혼 후 청소 일을 구하는 중년 여성으로 위장한 마리안의 이력서는 비어 있다. 상담사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장점을 추가해 이력서를 수정한 마리안은 고용박람회 부스를 기웃거리다 세드릭을 알게 된다. 점심을 청하는 세드릭을 따라 그의 집에 가서 피자를 먹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캉에서의 첫 인연을 만든다. 청소 일을 지망하는 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마리안은 2인 1조로 현장에 투입된다. 어디든 일은 급하게 진행되고 깐깐한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을 무시하며 마리안은 아직 서툴다.  

적당한 동료의식과 친절을 갖춘 노동자들 속으로 마리안은 조금씩 침투해간다. 캉을 떠나고 싶은 어린 마릴루, 피자 트럭 사업을 꿈꾸는 세드릭, 세 아이의 싱글맘 크리스텔 등 마리안이 관계를 맺는 이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그래서 허세 없이 어울리고 서로를 존중하며 자주 웃음을 보인다. 친목 모임으로 함께 볼링을 치고 나온 주차장에 서서, 볼링장의 비싼 음료 대신 집에서 챙겨온 모히또를 나눠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정겹다. 각자 꿈꾸는 미래가 있고 현실은 버겁지만, 삶의 무게는 이미 그런 일상에 적응된 이들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용센터와 교육장, 볼링장에서 거듭 마주치며 안면을 튼 크리스텔이 궁금해진 마리안은 위스트르앙 항구 여객선 청소에 지원한다. 하루 세 번 영국을 오가는 여객선이 정박하는 짧은 시간 동안 배에 올라 전투적으로 청소를 하고 빠지는 일이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먼 길을 걸어 출근하는 크리스텔에게 카풀을 제안한 마리안은 출퇴근을 함께하며 그와 서서히 가까워진다.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며 크리스텔의 집에서 커피를 나누기도 하고 아이들과 더불어 해변의 여유를 즐기기도 하면서, 마리안의 마음속에는 그를 속이고 있다는 불편함이 조금씩 자라난다.  

마릴루, 크리스텔과 함께 여객선에 오른 어느 날, 청소 후 객실에 두고 온 마릴루의 점퍼를 찾으러 갔다가 세 사람은 하선하지 못한다. 꼼짝없이 영국까지 가야 하는 상황에서 비어 있는 1등석 객실에 숨어들고, 야릇한 해방감에 젖은 세 사람은 샴페인을 마시고 진심의 대화를 나눈다. 나이도 처지도 다르지만 함께 일하며 피어난 신뢰와 우정이 적당한 취기와 함께 폭발해 1년에 한 번 이곳에서 만나자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크리스텔과 함께 선창으로 나가는 마리안을 알아본, 여객선 탑승객 지인이 건넨 몇 마디로 마리안이 감춰온 진실이 밝혀진다. 

1년 후 파리의 한 서점에서 열린 북 토크 객석에는 마리안이 캉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 마리안과 잠깐씩 인연을 맺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책에 담겨 나온 사실이 흔쾌하고, 마리안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작가로서 그들에게 받은 도움에 감사한다.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서점 밖을 서성이던 마릴루를 발견한 마리안이 그와 함께 도착한 위스트르앙 항구에는 크리스텔이 기다리고 있다. 1년 전 함께였던 그곳에서 여전히 청소 일을 하고 있는 크리스텔과 멀끔한 정장 차림으로 마주 선 마리안의 대비는 선명하다. 


시작부터 줄곧 깔리는 마리안의 내레이션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관객에게 조금씩 고조되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크리스텔과 가까워지면서 은연중에 나오는 마리안의 본래 언행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거리감과 문화적 격차 표현 그리고 카풀로 가까워진 크리스텔이 잠시 혼자인 차 안에서 마리안의 지갑을 뒤지는 장면 - 정체 발각과 크리스텔의 절도를 동시에 의심하는 마리안의 내면 - 그렇게 알아낸 마리안의 생일을 축하하는 크리스텔의 깜짝 파티와 네잎클로버 목걸이 선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마리안에 이입하며 영화를 따라가는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가 가진 선입견과 편견, 그가 느끼는 낯섦과 생소함에 공명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영화는 막바지까지 이어지는 마리안의 이중적 존재감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영리하게 비껴가면서,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한다. 마리안에게 이웃의 차를 빌려주는 지인, 여객선 청소 현장의 스타이자 트렌스젠더인 쥐스틴 캐릭터와 이별 파티, 혼돈의 현장을 엄격히 지휘하면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 관리자 나데주 등 잠시 등장하는 인물과 에피소드 덕분에 풍성한 박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세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진실을 가리는 일이 온당한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지만, 청소 후 빠져나가지 못한 여객선 일등석에서의 시간과 약속과 두 사람이 느꼈을 배신감 그리고 북토크에 모인 사람들과 나누는 마리안의 우아한 웃음 사이의 간극은 자명하다. 1년 후에도 여전히 차고 있는 네잎클로버 목걸이에도 불구하고, 동질감을 확인하고팠을 크리스텔의 마지막 제안을 거절하는 마리안의 선택은 냉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마릴루와 크리스텔이 받았을 깊은 상처가 마음에 걸렸지만 엔딩을 판타지로 만들지 않은 점은 좋았다. 각자의 삶의 객관적 조건으로부터 파생된, 결국 치유될 수 없는 상처는 영화가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시놉시스와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한다는 것만 확인하고 큰 기대 없이 선택한 영화였는데, 참 좋았다. 한정된 공간에서 많지 않은 수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임에도 극적 효과를 위한 작위적인 요소가 없었다. 서사 전개에 있어 부드러운 생략과 분위기 전환이 편안했고, 감각적이고 세련된 연출력이 몰입감을 더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영화의 원제인 [위스트르앙 부두]라는 르포르타주가 2010년에 한국에도 출간됐던데, 그 책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이라면 나중에 한 번 봐도 좋겠다 싶다. 경제 위기와 비정규직 파견 노동은 이미 익숙해진 현실이지만,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시의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 영화였다. 


1/3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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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