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4. 2. 6. 14:41

 

 

1920년대 초반 아일랜드의 한 시골 마을, 동네 청년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헐링 경기를 벌이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경기를 마치고 몇몇 청년들이 몰려간 시네드의 집으로 얼마 후 영국 주둔군들이 들이닥친다. 불법집회 운운하며 청년들을 벽으로 몰아세우고 한 명씩 이름을 말하라고 위협하던 영국군들은, 입을 떼지 않는 열일곱 소년 미하일을 닭장으로 끌고 가 죽인다.  

이유 불문의 일방적인 폭력과 살인은 영국군들이 주둔하는 아일랜드 마을에서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비극은 영국이 지배하는 아일랜드에서 일상의 한 부분이고, 청년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저항의 이유다. 청년 무리에 있던 데미언은 이제 막 의사가 되어 영국의 병원에 자리를 얻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영국으로 떠나기 위해 나섰던 데미언은 기차역에서도 무장한 영국군들의 폭력을 목도하고 발길을 돌린다. 

영국행을 포기하고 돌아온 데미언은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단체 IRA에 가입한다. 동네 청년 대부분이 단원이고 부모 없이 자란 데미언의 친형 테드는 지역 조직의 리더 격이다. 낮에는 각자의 일을 하고 동네 펍에서 당구를 치는 평범한 청년들은 밤이 되면 영국군의 무기를 탈취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에 모여 열악한 무기로 훈련하고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영국군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싸운다.  

얼핏 고요해 보이는 마을에 잠복한 긴장과 위험은 느닷없는 돌발 사태와 무력 충돌로 비화되곤 한다. 주둔군 숙소를 공격해 무기를 탈취한 청년들이 체포되고 테드는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한다. 수감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던 데미언과 댄 등 단원들은 아버지가 아일랜드인이라며, 감옥문을 열어준 영국군 쟈니 로건과 함께 탈주에 성공한다. 투쟁이 가속화되고, 위장한 일상을 탈피한 단원들은 파르티잔으로 변모한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IRA의 저항과 영국군의 폭압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영국 지배에 협력하는 부유층의 밀고와 동지의 배신이 드러나고, 그들을 직접 처단하는 데미언의 내면은 점차 냉정하고 단단해진다. 배신한 단원의 무덤 자리를 안내하는 데미언에게, 오랜 이웃인 그의 엄마는 너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내적 갈등과 슬픔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선 데미언을 흔들지 못한다. 연인인 시네드를 고문하고 집을 불태우며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영국군의 만행은, 독립을 향한 데미언의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1922년 12월,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지역의 자치를 인정하는 평화 협정이 발표된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고 영국군은 철수하지만,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던 이들은 찬반 입장으로 분열한다. 치열한 토론에도 양측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는다. 조약을 수용한 테드는 자유국 군인이 되어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활동에 앞장선다. 허울뿐인 자치령과 함께했던 투쟁의 목적을 저버리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데미언과 댄, 시네드 등은 완전한 독립을 위한 싸움을 택한다.  

평화 협정이 남긴 상흔은 영국군과 싸울 때보다 더 복잡한 갈등으로 이어지고, 독립 전쟁은 내전으로 탈바꿈한다. 저항 활동에 매진하던 데미언은 체포되고 전향을 거부하자 처형될 위기에 놓인다. 영국군에게 잡혀 수감되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영국군의 자리를 동지였던 자유국 군인이 대신한다. 과거에 단원들을 구해줬던 쟈니 로건은 죽었고, 적진에 선 형제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끝내 신념을 고수한 데미언은 시네드가 건넸던 정표와 편지를 남기고, 테드의 발사 구호를 마지막으로 처형된다. 


영화는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와 1922년의 평화 협정이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서 함께 싸우던 형과 동생이 극단의 입장으로 치닫는 비극을 그려낸다.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비교적 간략한 서사로 전개되는 영화는, 스펙터클과 영웅 캐릭터를 배제한 연출로 강점된 지역의 민중들이 겪는 다중의 고통과 투쟁의 면면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전쟁과 권력의 이면, 이데올로기와 삶의 의미를 환기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싸움에는 얼마나 많은 변수와 양상이 동반되는지, 신념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인접한 강대국의 강제 점령이라는 유사한 현대사를 가진 한국인의 입장에서, 영화에서는 얼핏 의미 없는 죽음처럼 보이기도 하는 데미언의 최후에 대해 숙고하게도 됐다.  

오래 전 영화를 뒤늦게 보았지만, 켄 로치 감독이 영국인이라는 점에도 새삼 생각이 미쳤다. 20세기 북아일랜드 분쟁은 1998년 평화 협정으로 종식되었다고 하니, 데미언과 테드가 겪은 갈등과 비극은 지난 세기 막바지까지 이어진 셈이다. 평화 협정이 체결된 지 10년이 안 된 시점에 어쩌면 오랜 전쟁의 원인 제공자격인 영국 출신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라니. 이런 소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켄 로치 감독이 견지해온 일관성이 작품에 진정성을 더했겠지만 아일랜드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싶기도 했다. 국적과 인물을 동일시하는 인식에 함정이 있다는 건 알지만, 만약 일본인 감독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 투쟁과 광복 이후 국내 좌우 진영의 대립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쩐지 달갑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나의 올드 오크] 개봉과 켄 로치 특별전 덕분에, 예전에 놓친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볼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언젠가 dvd도 사뒀지만 극장에서 보는 건 차원이 다르니까. 접근성 문제만 없었다면 좋았던 [지미스홀]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아쉽기는 하다. 약 20년 후 오펜하이머가 되는 데미언 역의 킬리언 머피는 반가웠고, 대부분 모르는 배우들이었지만 주요 역할을 맡은 이들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걸 알고 약간 감동했다.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억양의 변별성 같은 실용적인 이유만은 아닌 캐스팅일 것 같아서 말이다. 킬리언 머피의 존재감을 빼면 흐른 세월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묵직하게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1/3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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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