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도 표지도 편집도 내용도, 예쁘고 적절한 나무랄 데 없는 책이다. 그녀가 시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열심을 내어 그것들에 마음을 준 적이 없었기에, 처음 대한 사진들은 기대 없는 마음을 부드럽게 움직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책 속에 등장하는 40여개의 박물관은, 이 작은(?) 나라에 그 많은 것들이 다 있었나 싶게 생경하고 새롭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함께 나서는 길은, 말이 많지 않은 가이드의 여백을 둔 설명을 듣는 것마냥 독자에게 여유를 남겨준다.
너무 전문적이거나 앞서가지 않는 설명은 대상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담을 안기지 않는다. 어쨌건 기십년을 이 땅에서 살아오며 생겨난 막연한 집단무의식의 존재 덕인지, 포진해있는 우리 것들 속에 조금만 시선을 주면 되돌아오는 친근한 무언가를 느낄 수가 있으니 말이다. 유행처럼 떠나는 유럽 배낭여행에서 주마간산이나마 각종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을 빠뜨리지 않는 우리들이라면, 이제는 그녀가 소개하는 이 작고 소박한 시간창고에도 한 번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때로 개인적인 추억담이나 기억 속으로 매몰되곤 하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동경하는 작가의 일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반가운 덤이 될 수도 있겠고, 나처럼 별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크게 거슬리지는 않으니 그 역시 나쁘지 않다. 그녀의 길을 따라나선 사람들 중 애초에 작가적 우아함이나 범접할 수 없는 필력의 황홀을 기대한 이는 많지 않을테니 말이다. 작가에 대한 선호도와 별개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의 세상에 대한 고운 시선을 목도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언젠가 사는 일의 신산스러움에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그녀가 갔던 길을 따라 나도 한 번 가볼까 생각이 들 것 같다.
2001-09-16 13:39, 알라딘
|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히 뭔가 보탤 수 없는 물렁물렁함에 대하여 (0) | 2003.01.01 |
---|---|
그가 죽을 때 그의 직업은 무어라고 할까. (0) | 2003.01.01 |
활자 속에서 생동하는 시인 윤동주 (0) | 2003.01.01 |
미침의 황홀 (0) | 2003.01.01 |
그러나, 행복의 나라로.. (0) | 2003.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