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03. 1. 1. 00:30


최승호 시인의 글이 만만할 리 없건마는, 8월 초 일사의 더위 속 피서의 무리에 끼여들기를 작정하고 서해로 떠나기 전날 밤. 2박 3일의 너절한 휴가를 동반할 맞춤한 책 한 권이 아쉬워 책장 앞을 한참 서성이던 나에게 건져올려진 이유는 짐스럽지 않을 만큼 얇고 가볍다는 점과 얼핏 보니 아포리즘처럼 글씨와 여백의 비율이 조화롭다는 점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인터넷의 광고만 보고 성수기의 헐값 통나무집 민박을 예약한 대가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쏠려오는 후끈한 열기 뭉텅이들로 예감할 수 있었고, 이내 이 한 권이 나의 여름 휴가에 꽤나 유효할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이 엄습한다.

지니고 온 책이 너무 물렁물렁해서였을까. 정말로 물렁해지고 미끈해져서 종내는 녹아없어져 버릴 것만 같은 불길함을 가득 담은 땡볕은 이제껏 내가 경험하지 못한 대기의 습도와 더불어 공격을 감행해왔다. 해변이고 숙소고 도저히 어딘가에 있을 수가 없어 찾아든 까페에서, 물렁물렁한 책읽기는 시작된다.

반죽과 혼돈의 아들처럼 물렁물렁하게 태어난 시인은, 아메바처럼 자유롭게(?) 마음 먹는 모든 것으로의 변환이 가능하다. 실은 그는 스스로를 녹이지 않고 만물에 스며들기가 가능한 시인이며 그 중에서도 최승호이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해도 사용하는 언어가 꽤나 불편하기 때문에 또다시 반죽을 꿈꾸고 반죽으로 돌아가버리면 그만이다. 물론 시인의 반죽 체험이 한마디로 뒤돌아설 수 있을 만큼 나긋하거나 가벼운 무책임함은 아니다. 어차피 천형처럼, 세계를 호흡하고 세계를 감식하는 시인의 운명을 타고난 그에게 반죽되기는 근원에 대한 물음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상정할 수 있는 하나의 유효한 방법론이다.

한때 반죽이었던 시인은,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 그 형체 안에 갇혀버린 탓에 그가 사는 개포동 시장통을 구경하기도 하고 제주도에 가서 돌하루방을 보게도 되고 대도시의 '칭찬합시다'를 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인이 출발한 반죽의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반죽을 빌어 이렇게도 되어보고 저렇게도 되어보지만, 심지어 책마저도 물렁물렁하게 만들어보지만 기껏해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물렁물렁한 책에서 마저도 여전히 네모진 종이에 딱딱한 활자로 우리가 한때 같은 반죽이었음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는 일 정도인 것 같다.

어떤 희망은 잔뜩 부풀어서 허망에 이른다. 뻥 터진 풍선의 너절함, 터져서 입가에 달라붙는 풍선껌의 너절함, 그러나 어떤 희망은 끝끝내 버려지지 않고 풍선껌처럼 질겅질겅 되씹힌다.(본문 73쪽)는 시인의 자조 혹은 인정처럼, 애초에 반죽에서 태어나 생각하는 무엇이건 될 수 있다고 한들 시인이 발견할 수 있는 반죽으로의 회귀 구멍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알고 있지만, 시인이기 때문에.. 끝없이 찾고 또 찾고 있는 것 뿐이지 않을까.


2001-09-16 16:25, 알라딘



물렁물렁한책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최승호 (마음산책,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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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