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나마 윤동주를 사랑하지 않은 소녀가 몇이나 있을까. 해사하고 맑은 얼굴에 학사모를 쓴 흑백사진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던 '서시'의 시인 윤동주. 동시대를 호흡하지 않은 시인의 시가 교과서를 지나 읽히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특히나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자화상' 같은 일련의 대표시들은 시인의 시심을 미처 가슴으로 느낄 사이도 없이 행과 연마다 헤집어진 채로 우리와 처음 만난다.
잔뜩 밑줄 그어지고 주석 달린 채 참회니 속죄니 조국이니 하는 말들을 공식처럼 주워섬기며 우리는 윤동주를 익혔던 것이다. 와중에도 그의 시에(혹은 이미지에) 사로잡힌 우리 중 몇몇은 생애 첫 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직했고, '초 한 대'니 '무서운 시간'이니 '또다른 고향'이니 '태초의 아침'이니 하는 교과서 밖의 시들을 큰 비밀이나 되는 듯이 잠 못 이루는 밤 책상머리에서 들춰보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때였다.
시와 윤동주를 사랑했던 소녀들은 또다른 시들에 매료되었고 이미지의 윤동주를 사랑했던 소녀들은 쉽게 그를 잊어갔다. 그리고 그는 광복절 즈음이 되면 공중파나 케이블에서, 의혹에 싸인 죽음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종종 복제되곤 했다.
이 책은, 윤동주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실존하는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작가가 취재한 사실을 바탕으로 매우 성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윤동주와 일생을 기묘한 인연으로 함께 한 고종사촌 송몽규의 근친이며 소설가인 작가는, 대상에 대한 절도있는 애정과 문학적 소양을 기반으로 시인의 일생을 훌륭하게 책 속에 되살려 놓았다. 사망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의 시대를 함께 보낸 사람들로부터 얻어낸 생생한 증언들은 흑백사진 속의 창백한 시인이었던 윤동주를 생동하는 인간으로 부활시켰다.
몇몇 대표시와 글로써 저항하는 순교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박제가 된 시인은, 상급학교 진학 실패라는 좌절을 맛보는 평범한 소년기를 거쳐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유학할 수 없었던 식민 조국의 현실에 몸서리치던 피 뜨거운 청년기의 갈등 속에 번민하는 살아있는 젊은이였던 것이다. 또한 윤동주의 고향이며 어린 시절의 배경인 북간도와 당시 세계 정세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세계사와 역사에 무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같은 민족임에도 우리의 의식 속에 비존재로 남아있던 간도와, 부끄러운 친일의 근대사를 잠시나마 떨쳐낼 수 있는 기개와 자존의 삶을 실천했던 그들의 삶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뿌듯함마저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움이었다. 한편 개정판에서 추가되었다는,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나오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강처중과 관련된 일화 역시 이름도 빛도 없이 묻혀버릴 뻔한 소중한 언급이라고 생각된다.
윤동주에 빠졌던 어린 시절, '어두운 시대의 시인의 길'이라는 중학교 1학년생이 감당하기엔 무척 버거웠던 책이 한 권 있었다. 아끼고 아끼며 공들여 읽어낸 책장을 덮을 때,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아려오고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었다. 10여년이 훨씬 더 지나 문득 떠오른 그 책의 행방이 묘연해 아쉬움으로 대신하게 된 이 책은, 어쩌면 여중고생용으로 어쩌면 전국민용으로 팬시처럼 취급되곤 하는..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진짜로 알지 못하는 시인 윤동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성인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2001-09-16 11:52,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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