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4. 1. 19. 18:1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냉전 시기였던 1957년, 동유럽 여러 나라와 러시아를 여행한 기록이다. 작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접경이자 최전선인 베를린에서 시작해 사회주의의 심장부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반소련 혁명에 실패했지만 그 맹아는 살아 있는 헝가리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충동적으로 결행한 여행이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닿을 때쯤 마침 모스크바에서는 ‘세계청년축전’이 열린다. 조국의 군사독재로 유럽에 머물며 사회주의에 대해 호의적 궁금증을 가졌던 작가는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현실과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의 긴장과 괴리를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출신의 언론계 동료들과 함께 ‘철의 장막’을 통과해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시작이다. 어렵사리 검문을 통과한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외부의 힘으로 부자연스럽게 복구된 도시 풍경이다. 급조된 자본주의의 활력이 넘치는 서베를린과 조잡하고 압도적인 러시아풍으로 단장된 동베를린의 겉모습은 대조적이지만 재건의 방식과 목적은 다르지 않다. 인민의 삶을 통해 사회주의의 민낯을 보고자 했던 작가는 사회주의 수립 후 해외로 도피하지 못하고 체제를 혐오하며 살아가는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들, 소비에트가 이식한 동독의 혁명을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 학생들, 독일의 통일과 외국 주둔군의 철수를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기계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러시아 주둔군들 등 장막 뒤에 가려진 다양한 군상을 통해 편린의 진실을 전한다.   

동서 유럽의 여러 나라는 물론 소비에트 연방에도 기계류를 수출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넘기는 유연하고, 기차에서 만난 시민들은 정치에 초연한 듯 보인다. 작가는 프라하를 ‘가장 소화하기 힘든 영향들을 너무 살찌지도 않고 위궤양에 걸리지도 않고서 잘 흡수한 도시’라 칭하며 고대와 현대의 균형, 군과 시민의 통합이 유지되는 현상을 인상적으로 기록한다. 괴멸된 바르샤바에 우뚝한 소비에트 연방의 선물 문화궁전에 대한 위화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주민들의 공산주의와 가톨릭에 대한 열정이 공존하는 폴란드에서는,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사진들 속에서 자신을 안내하던 젊은 통역사의 아버지를 마주하기도 한다. 기차가 국경을 지날 때마다 제각각인 관세와 환율, 출입국 정책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은 전쟁이 끝난 후 거대한 두 우산 아래 복속된 작은 나라들의 격차와 혼란을 보여준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나는 돋보기 너머에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라는 세계학생축전 영국 대표단원을 인용하며 작가는 모스크바를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고 표현한다. 오차 없이 운행되는 정확한 시간표와 버튼이 하나뿐인 라디오 수신기가 장착된 러시아의 기차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존재하지만 독특한 획일성을 보여주는 광활한 대국의 첫인상이다. 러시아에 진입한 후 며칠간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각지의 주민들은 놀랄 만한 환영 의례를 선보이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 선물과 인사를 참가단에게 전하는데, 그 격렬함은 모스크바에서 절정에 달한다. 광기라고도 할 만한 반응을 작가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아온 이들이 발하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해석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자발적인 것인지 배후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한다. 고도로 조직된 거대한 축제의 한복판에서 그 어떤 것도 분명히 알아낼 수 없었다고 인정하지만, 잠시 열린 러시아에서 만난 내부인과 외부인 모두가 서로와 세계에 대해 열렬히 알고 싶어 하는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축전에 참가하고 싶어 6개월간 스페인어를 공부한 30년 경력의 푸주한 남성이 증인이 될 수 있겠다.  

작가는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생각이 특히 궁금했고 수없이 질문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는데, 통역사를 자청하며 고리키 극장에 동행한 중년의 연극 무대 디자이너에게서만은 명확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공포 정치 하에서 수많은 예술가 동료를 잃은 그녀는 극장에 이르러 “우리는 이곳을 ‘감자 극장’이라고 불러요. 이곳에서 연기한 최고의 배우들은 모두 땅 밑에 있거든요.” 라고 말한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와 최악의 전체주의 국가를 이끈 두 인물, 레닌과 스탈린의 영묘를 둘러보고 떠나기까지 공식적으로 전시되지 않은 현실을 열심히 탐색한 작가에게 가장 강력하게 다가온 러시아의 현재는 만연한 관료주의의 폐해다. 체제 경쟁과 공포 정치, 극심한 불균형 발전과 양극화 등은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열광한 축전의 화려함에도 감춰지지 않았고, ‘관료주의자’라는 말이 새로운 욕설로 통한다는 그곳에서 프라하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프란츠 카프카가 소환된다. 이어 계엄령 하의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넘어간 작가가 여행기를 마무리하는 지점은 10개월 전 소련의 종속에 반대하는 혁명의 시발점이 된 장소다.   
 
이름의 무게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내가 모르는 시대의 비밀과 인문학적인 깊이가 상당할 거라는 피상적인 기대와 우려가 있었는데, 모르는 사실이 많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잘 읽혔다. 극심한 냉전과 체제 경쟁이 가른 세상 저 편을 탐험하며 제한되고 차단된 정보의 조각들로 그곳과 그들을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 덕인 것 같다. 여행 당시에도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이유를 알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차이를 그대로 남겨두는 선택이 마음에 들었고, 멀지 않은 과거지만 완전히 사라져버린 감각과 세계를 엿보는 아련함을 느꼈다. 유명한 몇 작품의 제목을 알고 있을 뿐 책을 읽어본 적은 없고 작가가 콜롬비아 출신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야 제대로 알았는데, 거장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의 작가의 면모도 조금은 알게 된 기분이다.

 

전체적으로 인상기에 가깝지만 당시의 정치사회적 격변이 주효한 글이어서 관련된 해설이 있었다면 이해에 좀 더 도움이 됐을 텐데 책에는 옮긴 이의 말도 따로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 게시된 출판사 제공 책 소개를 읽으면서 모호하게 느껴졌던 부분이 좀은 선명해지는 듯했는데, 콜롬비아 문화부의 지원으로 출간되었다고 책 서두에 적혀 있기는 하지만 출판사의 위상을 생각하면 해설이 없는 점은 아쉽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송병선 옮김
2022.5.25.1판1쇄찍음 2022.5.31.1판1쇄펴냄, (주)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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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