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4. 1. 25. 02:32

 


[파리 스케치]를 읽고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 알게 된, 헤밍웨이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시를 전공한 학자이자 소설가인 저자 폴라 매클레인이 헤밍웨이의 책에서 “해들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구절을 발견한 후 해들리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다가 쓰게 된 책이라고 한다. 책 말미 ‘저자의 말’에는 “그들의 삶을 최대한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데 만전을 기울였다”는 말과 함께 참고한 도서와 자료의 긴 목록이 나열된다. 제목처럼 ‘파리의 아내’ 시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작지 않은 판형에 500쪽에 이르는 분량 속에 헤밍웨이의 글에서는 알 수 없었던 해들리의 어린 시절, 헤밍웨이와의 만남과 결혼, 파리 생활, 기묘하고 지난한 이혼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먼 훗날 헤밍웨이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 ‘에필로그’에 담겨 있다. 

몇 장의 흑백사진들로 시작되는 책은 본문에 앞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말을 새겨 놓았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가 당신에게 선물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빼앗아가지 않고 남긴 것이다. - 거트루드 스타인”, “단 한 가지 진실이란 없다. 모두가 진실이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어 “파리는 대책이 없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프롤로그’에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1920년대 파리의 풍경, 아들 범비와 함께 돌아온 파리에서의 가난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일상 그리고 시류에 맞지 않는 결혼 생활에 대한 당시의 믿음과 그 모든 것을 끝내게 만든 “나중에 등장해 모든 것을 망쳐놓을 그 아가씨”에 대한 짧은 언급이 담겨 있다. 작가는 해들리를 주인공이자 1인칭 화자로 내세워 이야기를 전개한다. 3인칭 해들리에 대한 글을 읽은 직후여선지, 다른 사람이 빙의라도 한듯 ‘내가’, ‘우리가’라고 말하는 문장을 읽자니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읽다 보니 적응이 됐다.   

해들리는 세인트루이스 출신으로 어렸을 때 다리를 크게 다친 후 원치 않는 과잉보호 속에 성장했다. 잘 회복해 문제가 없었지만 자신을 가엾은 존재로 여기며 언니와 차별하는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아픈 척하는 일이 잦았다. 엄마는 충고와 비판을 달고 사는 집안의 지배자였고, 밖으로만 돌던 아빠는 어느 날 지하실에서 총기로 자살했다. 아빠의 죽음 이후 우울감에 시달리던 해들리는 잦은 결석으로 동기들보다 1년 늦게 학교를 졸업한 뒤 이모가 사는 필라델피아의 브린 마 대학에 진학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휴학한다. 대학에 입학한 여름 큰 언니가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지병이 있던 엄마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자 해들리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를 돌보고 임종을 지킨다. 친할아버지는 공립도서관과 제약회사, 외할아버지는 학원과 사립 고등학교 설립자였던 건전하고 모범적인 청교도 집안의 후손이었지만 해들리는 이십대 후반에 엄마가 돌아가시기까지 가족의 그늘 아래 자신의 가능성이나 미래를 접어둔 채 살아가는 ‘노처녀’였다.  

헤밍웨이와 해들리가 처음 만난 건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얼마 후다. 절친 케이트와 함께 그의 동생 켄리가 사는 시카고로 여행을 떠난 해들리는 밤마다 열리는 파티에서, 켄리의 아파트에 세든 헤밍웨이를 알게 된다. 29살의 해들리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듯 사교계와 연애 경험이 없고 자신의 외적 매력도 잘 모르는 수수한 여성이었고, 7살 연하의 헤밍웨이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작가로서의 미래를 꿈꾸는 자신만만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해들리가 집으로 돌아간 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지고, 1921년 결혼해 시카고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언론사 기고를 그만두고 창작에 매진하며 때로 부상 트라우마와 우울에 시달리던 헤밍웨이의 작품을 검토한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의 작가 셔우드 앤더슨이 관심을 갖는다. 낯선 가난에 적응하며 불안정한 헤밍웨이를 돕는 데에 집중하던 해들리에게는 돌아가신 외삼촌이 팔천 달러의 유산을 남긴다. 오랜 유럽 여행을 다녀온 셔우드 앤더슨이 전하는 파리 생활 정보와 “검증은 안 됐지만 언론계 너머로 지평을 넓힐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갖춘 상당히 젊고 훌륭한 신문기자”라는 헤밍웨이에 대한 소개장을 안고, 두 사람은 1921년 12월 파리로 떠난다.  

파리로 이주한 이후의 생활 부분에서는 헤밍웨이의 글에서보다 많은 주요 인물이 등장하고 여러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된다. 셔우드 앤더슨의 소개장 덕분에 교류하게 된 예의 유명 인사들은 물론, 스위스와 스페인 등지로 떠난 몇 차례의 여행에서 만나거나 함께했던 지인들, 헤밍웨이는 싫어했지만 해들리에게는 중요한 친구였던 키티, 두 사람 모두에게 다정하고 특별한 친구였지만 부부관계 파탄의 주인공이 되는 폴린 등 대부분이 파리의 문화예술계와 사교계에서 화려하게 살아가는 이들이다. 두 사람만의 일상에서 일어났던 소소한 싸움과 인상적인 에피소드, 해들리가 리옹역에서 헤밍웨이의 원고들을 잃어버린 일의 전말, 모든 것을 철저히 기록하고 관리하던 헤밍웨이가 생리주기까지 따져가며 막으려 했던 해들리의 임신, 혹독한 파리의 겨울을 피하고 당시 최고 수준이었던 병원에서 범비를 출산하기 위해 감행한 캐나다행과 계획보다 이른 파리 귀환, 헤밍웨이와 폴린의 불륜과 그 사실이 알려진 후 예정대로 강행한 지인들과의 스페인행, 폴린까지 합세해 세 사람이 함께한 기묘한 날들과 두 사람의 마지막 순간 등의 기록은 [파리 스케치]에 대한 답장이자 긴 주석 같기도 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배어 나왔던 깊은 회한을 떠올리게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초반에 느꼈던 1인칭 서술의 거북함이 사라지고, 헤밍웨이와 해들리의 내면과 외면을 아우르는 이야기들에 빠져들어 읽었다. 헤밍웨이의 글에서는 간략히 다뤄졌거나 누락되었던 정황의 세부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많았고, 헤밍웨이의 입장에서 기록된 사건과 현상에 대한 다른 관점이 드러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물론 결말을 알고 있는 자의 과도한 암시나 복선처럼 느껴지는 지점도 있어서, 너무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거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것만큼이나 시대상에 대한 설명들도 흥미롭게 읽었다. 과거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의 오래 전 회상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져 생략하거나 염두에 둘 수 없는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간 세상에 나온 많은 자료들을 참조한 2010년대의 저자가 현재적 시점에서 구현해낸 과거가 알려주는 사실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다른 맥락이지만 [스토너]를 읽으며 이디스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서사가 있었다면 했던 마음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소 호사가스러운 관심에서 선택한 책이었지만 어떤 표준이 수립되기 이전의 세계와 인물이 선사하는 향수를 전해준 독서였다. 


폴라 매클레인•이은선 옮김
2012.1.30.1판1쇄인쇄 2012.2.3.1판1쇄발행,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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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