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1. 17. 22:52



서양사 관련 책들을 읽으며 간혹 마주쳤던 제목이어서 궁금했었는데 '국내 최초 중세 프랑스어 원전 완역본'이라는 소개를 달고 지난해에 출간됐다. 반가워서 사두고는 살짝 엄두가 안 나서 묵혀뒀지만, 책장을 펼치자 생각보다 훨씬 쉽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였다. 원전은 총 291연 4,002행의 서사시인데, 첫 장부터 빼곡히 달린 413개의 각주가 내용과 번역, 당대 서사시의 관례와 올바른(?) 이해의 관점은 물론 일개 독자로서는 알 수 없는 운율과 자모 사용 등 형식에 대한 부분까지 그야말로 하나하나 짚어주듯 친절히 설명해준 덕분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보면서 당시의 세계관이나 생활상, 기사도에 근거한 모험과 전투 등 많은 부분에서 거리감과 막연함을 느꼈었는데,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는 알게 되고 때로는 감정 이입이 되어 즐거웠다. 처음 목차를 살펴보며 제목에 등장하는 주인공 롤랑이 너무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게 의아했는데, 중반 이후 펼쳐지는 샤를마뉴의 복수와 마르실과 발리강이 합작한 이교도의 패배 그리고 롤랑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계략을 꾸민 배신자 가늘롱의 처단까지가 롤랑의 삶을 완결하는 사건인 것 같았다. 

 

중세 무훈시라는 장르는 낯설었지만, 음유시인의 박진감 넘치는 낭독에 귀기울이며 희노애락에 빠져들었을 옛 청중들을 상상하면서 나도 그중 하나가 된 듯한 마음이 되어 읽었다. 활자뿐인 페이지를 읽으면서도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전투가 벌어지는 벌판에, 음유시인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어느 극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전기도 영화도 인터넷도 없던 세계에서 대중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했을, 천 년의 시간을 건너 살아남아 전해진 이야기라는 사실이 주는 어떤 고양감과 옅은 흥분도 은은히 감돌았던 것 같다. 

 

과거의 사람들이라고 감정이나 인지 면에서 지금보다 둔하고 무딜 리만은 없지만, 기술과 문명의 발전과 함께 감응과 표현의 디테일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해졌을 거라는 내맘대로의 오해를 깔고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야기가 꽤 유치할 거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던 건데, 읽으며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몰입했던 걸 보면 현대인의 오만이었지 싶다. 명예와 신앙과 의리로 집약되는 정복자들의 서사는 때로 머나먼 이동과 행군을 과감히 생략하고 때로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며 메시지를 강조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아군의 전투와 승리를 위해 바람대로 해가 멈추고 대천사가 몇 번씩 내려오는 판타지가 당연한듯 섞여들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갑자기 이만이 기절하는 식의 귀엽고도 민망한 상황도 벌어지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른 조건과 환경, 지금 익숙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서술에서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는 삶은 시대를 막론하고 깊은 감흥을 선사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작품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부분은 해제였다. 중세 프랑스어를 전공하며 오랫동안 이 작품의 완역에 공들였다는 번역자가 들려주는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 최고의 무훈시로 자리잡은 작품의 위상과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수용과 연구, 작품 속 큰 반전인 '샤를마뉴의 큰죄'에 대한 설명, 배경이 되는 중세 기사 시대의 여러 면모 및 발흥과 몰락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겨 있다. 한 번 읽는 것으로 모두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천 년을 이어온 작품의 역사와 그속에 담긴 여러 요소들이 어떻게 현재에까지 의미를 갖게 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독자 북펀딩의 결과라는 걸 읽은 후에 알게 되었는데, 출간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게임 마니아들과 천 년 전 이야기를 친절히 건네준 번역자에게 고맙다.   


김준한 옮김
1판1쇄발행일2022.4.11. (주)휴머니스트출판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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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