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1. 26. 17:52

 


잠수종과 독 _ 공과 현우, 진보적인 신문사 방화 후 자살시도했으나 의식 잃고 병원으로 후송된 용의자를 맡게 된 공 / 현우의 교통사고와 죽음 / 집중치료실, 현우를 잃고 오히려 잠수종처럼 심연으로 가라앉는 공이 용의자를 대면하는 공간 / 인간은 물리적 존재이며 모든 것은 변질된다는 믿음을 가진 공,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에 충실했던 그것이 단점이자 매력이었던 현우 

귀 이야기 _ 잠수종 다음에 잠수부, 서너 번의 만남 후 파도 속으로 사라진 십여 년 전의 연인 / 친척과 예수와의 강원도 여행 / 기능적이고 물리적인 귀의 면모와 함께 펼쳐지는 예수와 나의 다양하고 쌩뚱맞은 언쟁들, 닫을 수 없는 귀여서 들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소음들처럼 느껴지기도 / '이승복기념관' / 같은 문장의 반복이 반복되며 만들어내는 리듬이 특이한, 첫 번째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문체 

트로츠키와 야생란 _ 바이칼호 안의 섬, 연인이자 동거인이었던 이와 함께였던 시간을 회상하는 주인공 / 연인을 몰락시킨 자에게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함께였던 과거로 도피 / 멕시코시티에서 암살당한 트로츠키, 바이칼호의 섬에서 빙상차를 운영하는 트로츠키 / 소련 체제 몰락 후 섬에서 살며 온실 속의 식물을 돌보는 트로츠키와 류다, 환경단체 내부고발로 일주일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외부와의 단절과 고립 속에 식물에 탐닉하고 마침내 식물에 갇혀버린, 고원지대의 바위에서 추락해 식물인간이 된 그 / 복수(했다고 생각)한 이의 복귀 소식을 접하고 어둠 속 바이칼호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 식물들의 환상과 환영 

•• _ 떠오르려고 올라간 옥상에서 마주친 까만 길고양이 토니를 바라보다 만나게 된 경찰, 그에게 마지막 인사로 녹음을 하는 나(은영), 토니가 가버리는 모습을 보다가 / 토니가 간 쪽의 길에서 애인과 이야기하던 동네 대학생이 편의점 앞 혼자 중얼거리는 알코올중독자와 검은 고양이 앨런 목격, 앨런이 편의점 쪽으로 향하자 언젠가 자신을 천사라고 말하는 과거 도장장이였던 알코올중독자와 나눈 대화 / 알코올중독자의 이야기가 계속되다가 깜장이가 부동산 쪽으로 향하자 부동산중개인의 말들, 그속에 등장하는 길냥이 밥 주다가 해고되고 길냥이 밥 주지 말라고 중개인이 동네에 붙인 벽보를 페북에 올리고 중개인의 꿈에 나타나 복수한 아가씨 그리고 과거 군대 시절 사회에서 도장파다가 와서 뭐든 반대로 하던 고문관 이야기 / 원한감정이 쌓인 천사들이 꿈에 나타나 멱살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고 구름 위에서 막 패는 복수 / 떠드는 중개인 바라보던 길냥이가 중개인의 쫓음에 파출소 쪽으로, 층간소음 항의한다고 위층 가택침입 피의자로 온 칠십대 노인과 김순경의 대화. 자신이 사는 미래빌라 언급하다 언젠가 마주친 옆집의 아가씨가 곧 여기를 뜬다고 세상을 뜬다고 말한 걸 듣고 옥상에 가보라고 신고했던, 이야기하던 중 눈에 띈 길냥이를 나비라고 부르는 / 몸에서 떠오른 귀만 있는 존재가 되어 토니이자 앨런이자 깜둥이/깜장이자 나비인 까만 고양이가 이끄는 대로 동네 곳곳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고,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으로 동네를 배회한 고양이는 실은 자신을 챙겨주던 은영의 떠오름을 알리려던 것. 김순경이 걱정되어 찾아가지만 영물인 늙은 고양이와 천사(장)인 알코올중독자에게만 보이는, 실은 천사 은영의 떠오름?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눈앞에서 사라진 토니  

유명한 정희 _ 어릴 적 살았던 셋집의 주인집 아들이었던 단짝친구 정희,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묵념을 하고 청소를 하다가 빨간 물통에 머리를 박는 잠수놀이를 하던. 어느 날 대통령이 서거하고, 도통 이기지 못하는 잠수놀이에서 오래오래 버티는 정희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 후 멀어진 /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의대에 진학하고 동아리에서 만난 정희의 조카이자 친구에게서 그의 소식을 듣고, 군복무하던 사관학교에서 그를 목격하지만 알은 체하지 않고 관찰만. 노선도처럼 정해진 인생 경로를 따라 결혼하고 개업하고 예의 바른 외계인들 같은 부부 생활이 끝난, 빼돌린 약물을 스스로에게 투약하며 운영하던 변두리의 작은 신경정신과병원에 찾아온 정희의 고백.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이 살의를 느낀다는, 이후 광화문 보수집회 연단에 선 정희를 목격하고 얼마 후 청와대 앞에서의 분신사망 소식 / 병원을 정리하고 내려간 고향에서 엄마가 꺼낸 말, 대통령의 죽음 후 이름을 따라갈 운명을 걱정해 정희라는 이름을 바꿨던 주인공 / “기연가미연가”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됨, [其然-未然-]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분명하지 않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 긴가민가(동의어)  

혹자가 말하길 _ 어린 시절 집성촌 비슷한 고향에서 이웃해 살았던 김지우와 염과 혹자 / 어른이 되어 도시에서 지우와 염이 결혼하고 혹자를 만나게 되는, 딱히 정답고 반가워보이지는 않지만 어릴 적 고향 친구랄 수 있는 관계로 집을 오가고 먹자골목에서 술자리도 갖던 염과 혹자 / 혹자는 죽은 건가, 살아 있는 건가? 혹자는 은연중 저어하는 마음이 있는 누군가를 상징하는 건가? / 솔직히 뭔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_ 왼쪽 면과 오른쪽 면이 나뉘어 두 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은희를 클레오라고 부르는 K, 둘은 야녜스 바르다의 영화를 함께 보았고 은희가 사랑했던 사람은 영화의 배경이자 주인공이었던 파리로 떠났다. 사랑과 우울을 반복하던 클레오는 세상을 떠났고 K는 그가 뼛가루로 존재하는 춘천의 한 성당을 찾아간다. 함께하던 시절의 기억과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과 자신의 반응과 사유가 뒤범벅되어 안소니 홉킨스와 부르노 간츠를 닮은 머리를 잘라준 미용사와 성당 관리인이, 개구리를 삼킨 남자와 전철에 머물던 비둘기가, 삼켜졌던 개구리와 전철에서 벗어난 비둘기가, 클레오의 뼛가루와 혼령이... K의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진다. 문구나 문장이 반복되는 리듬은 비슷했는데 자동기술처럼 이어지는 내용과 주절주절하는 듯 느껴지는 문체가 솔직히 갑갑하고 답답하게 느껴졌고, 만약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앞에 있다면 외면하게 될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시그니처 같은 문체라는 생각도 드는데,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내게는 인내심이 요구되는 스타일이었다. 유명한 영화지만 dvd만 사두고 보지는 못했는데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 자세히 다룬 챕터를 읽어서 괜히 친숙한 덕인지 제목을 보고 가장 기대한 수록작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살짝 낭패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코끼리 고구마 그리고 오조의 발목을 잡은 손들 _ 광장의 문화사를 연구하는 사회학과 대학원생 김수, 오래된 빌라의 버려진 화단을 오래 가꿔온 대장암을 앓는 80대 노인 명, 일찌기 돈의 흐름을 파악해 재테크와 부동산 투자에 능한 오조, 그들을 연결하는 소도시 도심권의 광장맨션과 프라자맨션 / 코끼리로 고구마로 또 무엇으로 변하며 보는 자가 보고 싶은 대로 보여주는 구름, 예나 지금이나 요구를 주장하고 관철하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 그리고 법과 제도 소송을 이용하는 사람들  


노보 아모르 _ 최근작으로 대(소)중의 비난을 받고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의사에게 요양을 권고 받고 지방 소도시로 내려온 나, 희소성으로 단골 주점이 된 가게의 사장 자코메티와 바에 마주앉아 나누는 이야기.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는 게 특기인 나는 홀에 앉은 세 사람의 상황을 누아르로 상상하고 암 환자 빙의 등의 행복 연습을 권하며 영화에도 훈수를 두는 자코메티를 고까워하지만, 그가 2차 항암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주점을 나와 홀에 있던 청년의 접근으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노보 아모르”는 즐겨듣는 노래의 밴드명이기도 대중의 비난을 받은 작품명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나타난 새로운 인연일 수도. 여러 뮤지션과 영화감독이 언급되는데 예람과 생각의 여름은 좀 의외였고 하덕규는 정말 반가웠다.  

소설을, 실은 이제 책 자체를 많이 읽지 않지만 때로 전혀 존재를 몰랐던 한국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세계의 너름을 새삼 실감하곤 한다. 제목에 약간 끌렸고 수록작 제목들을 훑어보다가 영화를 좋아하는 듯한 작가가 궁금해져 선택. 우연 같은 언급을 통해 연결되는 서사와 인물, 내세울 것 없고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할 만한 것이 전혀 주인공들, 사색적이고 현실적인 분위기에서 갑자기 혹은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신비와 초자연적인 현상의 세계. 흡사 환상문학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어느 부분은 또 무척 현실의 디테일을 재현하고 있어 한 작가의 소설집이 맞나 싶기도 했다. 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느낌을 주는 흥미로운 소설들이어서 신선했고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까 싶어졌다.

 

작가의 말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이었는데, "아무도 진실을 소유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해받을 권리가 있는, 매혹적인 상상력의 영토"라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의에 이어 그는 이렇게 쓴다. "그렇겠습니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보면 일상사에 바쁘다가도 어이없이 한가해지고, 차가운 마음이다가도 세상 모든 것이 문득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습니다."(297쪽)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내게는 낯선 이름이었는데 찾아봤더니, 작가는 내게만 낯설 뿐인 이미 중견이었네. 몰라 뵈어서 미안합니다.  


이장욱
2022.5.20초판1쇄 발행, (주)창비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 없는 아이]  (0) 2023.01.28
[마지막 거인]  (0) 2023.01.27
[시인 아저씨, 국수 드세요]  (0) 2023.01.17
[롤랑의 노래]  (0) 2023.01.17
[변신]  (0) 2023.01.09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