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4. 2. 5. 13:49

 

 

지난해 봄 세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를 올해 첫 영화로 보았다. 다큐멘터리적인 서사가 어느 정도 있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는데, 한정된 시공간에서 진행하는 연주만을 거의 실시간으로 촬영해 편집한 작품이었다. 모던한 공간 중앙에 세팅된 그랜드 피아노와 연주자를 풀샷부터 초근접샷까지 다양하게 촬영한 연주가 흑백 화면 속에 담겼다.  

내가 가본 대부분의 클래식 콘서트는 멀리 무대 중앙의 연주자를 내 자리의 시선과 거리 한계 안에서 지켜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연주자의 손과 얼굴, 전체 모습 등을 다채롭게 조명한 화면이 연주와 음악의 육체성을 더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소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집중되는 연주에 몰입하다 보니 그사이의 공백과 공명, 여운도 크게 다가왔다. 

중간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몇 마디 말이 나온다. 연주를 다시 시작하거나 잠시 쉬어가는 순간이 삽입된 거였는데 접하기 힘든 장면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어떤 곡의 초입부를 치다 중단하고, 잠시 쉬는 시퀀스에서의 세 마디 정도. “다시 합시다.” “좀 힘드네.” “지금 무지 애쓰고 있거든.” 긴장감이 고도로 집중된 상태에서의 갑작스런 이완이었는데, 소리에 더해 몸짓과 표정으로 전달되던 음악과는 또 다른 육성의 감동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아주 유명한 몇 작품만을 알고 있는 터라 그 음악이 연주될 때는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피아노 앞에 앉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습으로 가득했던 영화는 마지막에, 고인의 부재를 상징하듯 손 없는 건반의 눌림만으로 음악을 전한다. 그리고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진부한 격언이 생명력을 얻으며 엔딩에 떠오른다. 투병으로 삶의 막바지를 향하는 중에 남겨준 이 작품이, 고인의 팬들에게는 눈물겨운 선물로 기억될 것 같다. 문외한인 내게도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1/3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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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