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3. 10. 28. 23:45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거친 질감의 흑백 화면 속 저택으로 한 남자가 들어선다. 저택의 주인은 그에게 소녀의 얼굴이 담긴 사진 한 장을 건네며, 중국에서 헤어진 자신의 어린 딸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감독이자 작가인 미겔 가라이가 30여 년 전 작업했던 영화의 도입부 장면이다. 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프랑코 역할의 배우 홀리오 아레나스는 촬영 중 실종됐고 작품은 중단됐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배우를 둘러싸고 억측이 난무했고, 친구이기도 했던 홀리오가 실종된 충격으로 미겔은 영화계를 떠났다. 

 

과거의 미제 사건을 재조명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다루면서 홀리오의 흔적을 좇는 미겔의 여정이 시작된다. 방송을 준비하며 검토하는 자료들에는 수십 년 전 홀리오의 모습과 더불어 미겔의 지난 날 그리고 이제는 퇴물이 되어 버린 영화의 유산들이 있다. 미겔은 창고에 보관하며 방치했던 옛 물건들, 필름보관소에 쌓여 있는 무수한 릴 테이프들을 다시 마주하며 감회에 젖는다. 오랜 친구이자 중단된 영화의 촬영감독이었던 막스, 홀리오의 딸 아나, 젊은 시절 잠시 연정을 나눴던 탱고가수 롤로와도 다시 만나며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빠져든다. 

 

감독 은퇴 후 미겔은 청춘의 혼돈을 담은 첫 소설을 발표하며 작가로 등단했다. 창고에서 발견한 작은 상자 속 사진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존재가 드러나지만,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문 닫은 지 오래고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리조트 ‘마리나 링컨’ 한구석 컨테이너를 연결한 공간에 거하는 미겔은 그곳에서 ‘마이크’로 불리며 이웃의 젊은 부부, 마을 어부와 이따금 어울린다. 소박한 살림으로 반려견과 함께하며 글을 쓰고 번역하는 미겔의 현재는 평온하지만 은둔과 체념의 분위기를 풍긴다. 

 

방송 출연 이후 미겔에게, 홀리오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시청자가 자신이 일하는 요양원에 홀리오가 있다는 제보를 한 것이다. 3년 전쯤 거리에서 발견됐다는 그는 기억을 모두 잃은 상태였고 돌봐준 수녀들이 붙여준 이름 ‘가르델’로 불리며 잡일을 도우며 살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더해졌지만 틀림없는 외모, 수첩에 보관하며 이따금 유심히 주시한다는 실종 직전 촬영한 영화 속 소녀의 흑백 사진이 그가 홀리오임을 증명한다. 요양원에 며칠 머물며 그를 관찰하고 조금씩 접근하는 미겔을 홀리오는 알아보지 못한다. 

 

안타까운 미겔은 홀리오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의 딸 아나와도 만나게 하지만, 과거를 통째로 잃어버린 홀리오는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없지만 미겔은, 예전 모습 그대로 폐관한 마을의 극장을 빌려 촬영감독 막스가 보관 중이던 실종 당시 촬영 중이었던 영화의 미완성 필름을 상영하기로 한다. 과거를 잊은 채 살아가던 친구의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 되살아난 영화 속, 수십 년 전 프랑크로 분한 홀리오와 연유를 모른 채 보관 중이던 익숙한 흑백 사진이 등장한다. 화면을 지켜보는 홀리오의 목울대가 꿈틀대고 미세하게 변화하는 표정, 눈을 감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마지막 영화를 고심하다 경의와 찬사 가득한 소개를 믿어보기로 하고 선택한 작품. 감독의 이름도 [벌집의 정령]도 처음 들어본 내게 프로그램 노트가 발산하는 감격과 환희는 낯설었지만, 존재를 전혀 몰랐던 다른 세계의 전설적인 감독이 30여 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라니 영화제 프리미엄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관객으로 살고 있지만 영화를 공부하듯 판 적은 없기 때문에 명작을 알아보는 배경 지식과 안목이 없는 터라, 영화를 본 후에도 감독과 작품의 영화사적 의미와 위상을 크게 실감하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지만 말이다.

 

친구와 더불어 영화와도 이별한 주인공이 친구와 더불어 과거의 영화와도 다시 만나는 영화를, 영화 속 영화 그리고 기술의 고도화로 처치 곤란이 되어버린 영화의 유물들과 함께 보여주는 노감독의 영화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좇는 애잔함이 진하게 느껴졌다. 미겔이 창고에서 발견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프레임 공책을 넘겨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극장에서 안방과 휴대폰으로 형식과 장소를 바꾸며 불가역적으로 변화한 영화의 기념비적인 시작을 기억하려는 감독의 의지였을까 싶었다. 인트로와 엔딩 타이틀 장면에 길게 나오는 야누스 조각상의 의미를 이래저래 생각해봤는데, 도저한 의도를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아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를 실감하며, 올해 나의 부국제가 끝났다. 

 

 

10/12 영화의전당 중극장

 

 

 

 

 

[Close Your Eyes]

 

국가/지역Spain/Argentina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169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Director: Víctor ERICE 빅토르 에리세

Cast: Manolo SOLO, José CORONADO, Ana TORRENT, Petra MARTÍNEZ, María LEÓN, Mario PARDO, Helena MIQUEL, Antonio DECHENT

 

Program Note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귀하고, 지극히 사적이며 또 가장 감동적인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50년간 단 세 편의 걸작 <벌집의 정령>(1973), <남쪽>(1983),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를 만든 빅토르 에리세의 네 번째 장편이다. 미겔 가레이 감독은 33년 전인 1990년에 그의 친구이자 주연인 훌리오 아레나스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촬영을 중단한다. 어느날 그는 편집용 필름을 보다가 훌리오를 찾아 나선다. 이 아름다운 탐색의 서사에서 감독이 찾아 헤매는 것은 사라진 친구의 행방일 뿐 아니라 본인 내면에서 점차 소멸한 열정, 바로 시네마의 정령이다. 에리세는 전통적인 시네마가 사라지는 모습을 소리 없이 지켜본다. 필름, 편집실, 버려진 낡은 극장.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일곱 살에 <벌집의 정령>의 주연을 맡았던 아나 토렌트가 감독의 카메라 앞에 귀환할 때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로 본인의 필모그래피와 영화사에 가장 시적이고 아름다운 작품 하나를 더했다. (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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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