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스 서점의 프랭크 도엘이 세상을 떠난 뒤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묶어낸 저자는 판권을 산 런던 도이치 출판사의 출간 계획에 맞춰 런던을 방문한다. 20년간 나눈 편지에서 몇 번이나 거론됐지만 지연됐던 여행은 그들의 편지를 엮은 [채링크로스 84번가]로 인해 현실이 됐고, 1971년 6월 17일부터 7월 26일까지 저자의 런던 체류기가 [마침내 런던]으로 묶였다. 수술을 받고 퇴원한 직후의 혼자 여행을 앞두고 저자는 전작에서의 까칠하고 대찬 모습과 달리 온갖 버전의 불상사를 상상하며 도착 첫날 묵을 호텔을 이중으로 예약하는 등 갖은 걱정과 대비를 하지만, 마크스 서점의 인연들과 지인의 지인들과 [채링크로스 84번가]의 독자들은 공항에서부터 에스코트와 가이드를 자처하며 40일을 꽉 채워준다.
런던에 도착한 저자는 출판계에서 퇴직하고 런던공항에서 일하는 대령, 프랭크의 아내인 노라와 딸 실라의 마중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숙소인 케닐워스 호텔에 도착해 실내를 둘러보며 실라와 저자가 나눈 대화, "너무 좋아요, 헬렌(Helen)." "내 이름은 헬레인(Helene)이잖아요." ... "나는 당신을 20년 동안 '헬렌'이라고 불러 왔거든요." 전작과 노라의 실례를 이 책은 바로잡아 저자의 이름을 '헬레인' 한프로 명기하고 있다. 헬레인의 여행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기간으로 나뉜 다섯 부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출판사의 공식 일정 몇 가지를 제외하면 온통 [채링크로스 84번가]를 통해 인연이 닿은 이들의 호의에 기댄 여정이다.
뉴욕의 헬레인은 흰색 현관 계단의 좁은 벽돌집들이 단아하게 늘어선, 이전 세기의 규격화된 주택 단지의 런던 풍경을 보고 싶어 영국 영화를 보러 가곤 했었다. 눈이 닿는 런던의 모든 것에 설레는 헬레인이 무엇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방문한 곳은 마크스 서점이다. 문을 닫아 서점이었던 흔적만 남은 그곳은 방들이 뜯기고 서가가 철거되고 창문에 붙였던 간판 글자도 일부의 흔적만 남았지만, 헬레인은 프랭크가 오갔을 난간에 속삭이듯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런던 생활의 대부분은 스스로 '공작부인'이라고 칭할 만큼 수많은 이들의 환대와 뉴욕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꿈만 같은 다채로운 경험으로, 화양연화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다양한 경로로 연결된 다양한 사람들이 그를 가이드하며 다양한 곳으로 이끈다. 드물게 넘치는 정과 의욕의 수위 조절에 실패해 "우리는 언제 내가 보고 싶은 걸 보러 가게 될까요?"라는 말을 끌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문학적 관심사와 교양을 갖춘 이들이 선사하는 풍성한 여행이다. 전작에서 헬레인이 찾던 책들의 저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관련 현장에 방문할 때 감회는 배가된다. 특히 존 던, 존 헨리 뉴먼, 아서 퀼러-카우치(Q)처럼 헬레인이 사랑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가 덧붙여져 흥미를 끈다. 수십 곳의 장소가 나오고, 헬레인이 혼자 멀리까지 움직인 경우는 없으니 함께한 이들도 적지 않다. 런던에 가본 적이 없어 공간적 상상이 불가능하고 그들과의 대화나 일화가 자세히 기록된 덕분에, 여행지의 풍광과 문화적인 발견 못지 않게 동행한 이들의 개성과 매력도 크게 다가왔다.
노라는 확고한 주관과 솔직하고 너른 인간미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저녁 식사를 위해 헬레인과 집으로 가던 중 카를 마르크스의 묘역에 차를 세웠던 그는 딸기 디저트를 먹으며 다시 결혼할 수 있을지 점을 치고 '절대로 못 해'가 나오자 비통한 얼굴로 딸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프랭크가 살아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서적상 부부의 파티 차림에 러시아 스파이처럼 보인다고 농담을 했는데, 몇 달 후 그들이 정말 러시아 스파이로 밝혀졌다는 이야기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프랭크 부부의 품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부는 특종을 잡기 위해 돈다발을 들고 몰려온 기자들을 물리치고 "좋은 사람들인" 그들을 면회하고 재판을 참관하면서 과거를 속인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후 풀려나 폴란드에 살고 있는 그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다. 헬레인의 편지가 도착할 때마다 프랭크가 기뻐하며 집으로 가져와 낭독했고 그럴 때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는 노라는, 헬레인에게 마크스 서점과 프랭크의 사진 그리고 마지막 남은 정원의 장미들을 선물로 전한다.
"거두절미하고"로 편지를 시작하는 팻 버클리는, 지인이 부탁한 헬레인과의 첫 만남을 앞두고 일행이 있냐는 질문에 만찬회가 아니라고 답해 당황시키지만 처음의 인상과 달리 점차 마음을 사로잡는다. 성마르고 군더더기 없는 언행에 박식한 교양인인 그는 디킨스와 셰익스피어의 흔적이 남은 곳들, 너무 늦어 닫혀 있었던 런던타워, 윈저성과 자신이 졸업한 이튼 칼리지, 사이언 하우스와 오스털리 파크, 로즐리 하우스 등을 몇 차례에 걸쳐 안내한다. 셰익스피어가 드나들던 펍 '조지'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짜증스러워 하는 헬레인의 말에 "천만에요. 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라고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특별하게 생각하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고유성을 확신하며 저지르는 실수에 간명하게 현실을 환기하는 댄디함이 매력적이었다. 윈저성에 함께 갔던 헬레인은 "나는 그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20세기 초반 영국의 빛나던 시기인 에드워드 왕조 스타일의 끝손질이 따른다."고 쓰고, 여행이 끝나갈 무렵 그는 빨강과 하양의 런던시 문장과 표어("주여 우리를 인도하소서")가 새겨진 금 십자가 장식핀을 선물한다. 동경하는 런던에서 취향과 호감을 나눈 우정의 표식은 뉴욕의 헬레인에게 오랫동안 감동으로 남았을 것 같다.
도이치 출판사로 도착한 편지를 통해 만난 마크스 서점 사장의 아들 레오 마크스와 엘레나 부부는 영화감독과 초상화가다. 첫 만남에서 소울메이트라고 느낀 헬레인은 다정하고 세심한 그들에게 감기에 좋은 음식들을 선물받고 화려한 해물식당에서 식사를 대접받고 집에도 방문해 레오의 자부심이 담긴 음료와 함께 즐거운 담소를 나눈다. 그리고 러셀 스퀘어에서 그릴 것과 완성된 작품을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난생처음 초상화 모델이 되기도 한다. 몸집보다 훨씬 큰 이젤과 화구들에 모델인 헬레인이 심심할까봐 커다란 휴대용 라디오까지 준비한 엘레나와의 초상화 작업은 즐겁게 진행되고, 함께 국립 초상화 갤러리에 방문해 문학 작품을 통해 익숙했던 인물들을 새롭게 만나는 기회도 갖는다. 관광할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을까봐 염려하며 사려 깊게 작업을 이어갔던 엘레나는 헬레인의 귀국을 아쉬워하며 진주 두 알이 박힌 반지를 선물하고 런던을 떠나는 날 대령과 함께 비행기까지 배웅한다.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출판사에, 궁금해하는 독자에게 연락처를 아무 조건 없이 공개하라고 전했던 헬레인은 유명인사부터 무명의 독자까지 많은 이들을 만나고 기록했다. 여행의 시작과 끝을 에스코트하고 런던 근교 여행용 가방을 선물하고 여러 시골과 옥스퍼드를 안내해 헬레인이 "이 짓을 한 달 이상 계속한다면 내 도덕의식이 크게 손상될 것 같다"고 염려하게 만든 대령, 매진이라 구하기 힘든 피터 브룩의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 초대하고 떠나기 전 만찬을 마련한 조이스 그렌펠 부부, 당시 유행인 마구간 겸 마차 헛간을 개조한 뮤즈에 초대한 독자 부부, 팻 버클리를 소개한 뉴욕의 진 일리 부부, 지배인 오토를 비롯해 40일간 묵은 케닐워스 호텔에서 오가며 마주친 사람들, 조지 버나드 쇼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좋아하게 된 배우 엘런 테리의 재를 보기 위해 코번트 가든을 찾아가는 길에 마주친 실직한 배우, 노라가 보낸 택시가 무소식이자 호텔에서 불러준 미니캡의 운전사이자 캐나다 출신의 병원 인턴인 배리 등은 런던을 무대로 한 단편 소설의 인물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장 생동감 넘치고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인물은 역시 작가 자신이다. 출국 직전 고도로 불안해하고 여행 초반에는 "아무도 나를 아는 이가 없는 외국에 오자 나는 고국에서는 결코 쓰지 않던 굴레란 굴레는 모두 쓰게 되었다."며 긴장을 놓지 않던 헬레인은 어느새 누구보다 개방적인 마인드로 여행을 즐기며 자신에 대해서도 기록한다. 오랫동안 사랑했던 많은 것이 새겨진 땅에서, 꿈꾸던 과거를 돌아보고 현실이 된 여행에 감격하고 감회에 젖는 모습이 덩달아 기쁘다. 열일곱 살에 공공 도서관에서 찾은 아서 퀼러-카우치의 글쓰기 책을 읽으며 "3쪽에 이르러 난관에 봉착"하는 수없는 반복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일주일에 평균 세 차례씩은 "여기서 잠깐만."을 외치는 바람에 내가 Q의 강의록 다섯 권을 독파하는 데는 11년이 걸렸다."는 헬레인이, 그에 대한 책 [Q's Legacy]을 내기도 했다는 부분은 감동적이었다. 타인의 독서량에 부끄러워하면서 한 권을 50번 읽어 거의 암송할 정도가 되면 몇 년간 책을 치워 둔다는 그가, 마크스 서점을 통해 구해 읽은 영문학 책들을 어떻게 탐독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동경하며 런던행을 오래 꿈꿔온 헬레인은 베일리라는 영국 퀘이커교도 가문을 포함한 조상들의 후손이다.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날 어느 공원에서, 1807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버지니아에서 세상을 떠난 메리 베일리와 몇 세대를 건너 전해진 그의 자수 견본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후손으로서 자신이 마침내 '고국'에 왔다고 쓴다. 오랫동안 읽고 사랑해온 영문학 작품들과 그 배경이 된 런던에 대한 호기심과 흠모의 기저에는, 그렇게 얼굴도 삶도 모르는 핏줄 속 먼 선조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와 개인의 상황 탓이 컸지만, 전작에서 참으로 멀게 느껴졌던 런던까지의 거리는 비행기로 5시간이었다.
가깝고도 먼 런던, 기나긴 황홀경 같은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가 이륙하자 헬레인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실재했던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조차 실제의 인물이 아니었다. 모든 일은 상상이었고 그들은 유령이었다."고 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찬 순간이 끝날 때, 현실감도 함께 사라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록은 "편히 잠드소서, 메리 베일리."로 끝을 맺는다. 그가 이후 다시 런던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아껴두었던 런던타워의 내부를 끝내 보지 못한 건가 싶어 아쉽다. 일상을 벗어나 꿈처럼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 특히 나이가 많았던 팻 버클리와 뉴욕에서라도 다시 만났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50년 전의 기록이니 꽤 많은 이들이 이제는 세상을 떠났겠구나 싶어 괜히 쓸쓸한 기분도 들었다. 생기와 온기를 담은 책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헬레인 한프•심혜경 옮김
2021.10.22.1판1쇄, 에이치비*프레스(도서출판 어떤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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