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몸에 맞지 않아 마시지 않는다. 이십 대 초반에는 시절의 분위기에 휩쓸려 마셔대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인정해야 했다.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팔다리 관절이 쑤시고 저리고 끊어질 듯 아파 잠자리에 들 때마다 엄청 고생을 했고, 그런 고통을 감수하며 마실 이유가 없었다. 서른 즈음부터는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가더라도 그저 잔을 들었다 놓는 게 당연해졌고, 마흔 즈음부터는 술자리 자체를 싫어하고 기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드물게 극소량을 섭취하면 몸은 귀신같이 알아챘고, 관절만이 아니라 온몸이 두드려맞은 듯 아파서 잠들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마신 게 지난해 이른 봄 사촌이 집에 놀러오며 가져온 화이트와인 한두 모금이었는데, 스산한 날씨에 돌아다니며 스며든 몸살기 탓인지 며칠을 고생했다.
[안녕 주정뱅이]의 인물들은 모두 술을 마신다. 생을 집어삼킬 만큼 많이 마시기도 하고, 일요일 저녁에만 상을 주듯 마시기도 하고, 매일 식후의 커피처럼 마시기도 하고, 안주와 주종의 조화 따위 무시하며 되는 대로 마시기도 한다. 그 어떤 음주도 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지만, 일곱 단편에 등장하는 이들의 인생은 일상이 된 음주와 드라마틱함의 정도를 양해한다면 나와 아주 다르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허구의 인물이라도 그의 고통을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들은 삶의 무게와 번뇌의 깊이에 비례하는 만큼 술에 의지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작가 역시 오래 술을 마셔온 주당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술은 이 책과 연루된 모두에게 밥이나 물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생존에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봄밤'은 한때 즐겨봤던 드라마 제목이기도 했다. 밝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레이첼 야마가타의 숨결이 느껴지는 음악들에 낭만과 애수가 드리운 분위기가 ‘봄밤’의 이미지로 남았다. 첫 번째 수록작 <봄밤>은 사뭇 달랐다. 각자의 이유로 삶이 무너진 수환과 영경이 지인의 결혼 뒤풀이에서 만나 당연한 듯 단단한 연인이 된다. 류마티스 관절염 합병증이 깊어가지만 신용불량자인 수환은 병을 적시에 치료할 수 없었고, 그가 요양원에 입원하자 영경의 알콜릭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중증이 되어 같은 요양원에 입원한다. 감당할 수 없이 술을 마시는 것이 나쁜 습관이 아니라 영경의 고질병이라는 걸 이해하는 건 수환뿐이었다. 영경이 음주를 위한 외출을 감행한 밤 수환은 세상을 떠나고, 의식불명으로 돌아온 영경은 알콜성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는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39쪽) 타인들이 알아준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마지막 성찬을 위해 술을 사들고 모텔에 입성하던 영경이 낭송하는 김수영의 "봄밤"은 아이를 빼앗겼던 그가 사랑하는 수환마저 떠나보내는 잔인한 밤의 송가였다.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소박한 다정함과 피할 수 없는 비극이 강렬하고 처연해 심장이 툭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런 삶이라니, 이런 죽음이라니. 대단한 판타지였지만 온전히 사랑한 두 사람이 부럽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소설이어서, 이야기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삼인행>의 인물들은 1박 2일 속초로 떠난다. 별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부 주란과 규의 대화는 서로를 향하지 않을 때도 뾰족하고, 그나마 평화롭게 만나는 지점은 식탐과 완전한 남의 일에 말을 얹을 때다. 어디선가 숙박권이 생기지 않았다면 떠나지 않았을, 매사 피곤하게 티격태격하는 자신들을 잘 아는 둘 사이의 완충지대로 훈이 동행한 여행은 시종일관 삐걱댄다. "자연이든 관계든 오래 지속되어온 것이 파괴되는 데는 번갯불의 찰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들 부부나 케이블카 커플이나 파괴된 논밭에 서 있던 크고 작은 크레인들처럼 가엾고 기괴한 잔여물에 불과하다고 훈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하나의 크레인처럼 여윈 어깨를 으쓱."(62쪽)할 만큼 부부에게서 거리를 두던 훈도, 규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며 나누는 별 것 아닌 대화를 통해 위태로운 소용돌이 속으로 순식간에 휩쓸린다. 주란과 규가 갈등하는 닮은 꼴인 것은 그들이 부부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쩌면 누구랄 것 없이 내면에 자리한 강박과 불안이, 긴밀하지만 반복적으로 어긋나는 관계의 자극으로 발현되고 단절이 아니라면 끝낼 수 없는 불화를 만들고 마는 것인지도.
<이모> 윤경호 씨는 일찍이 가장 역할을 떠맡아 가족 부양은 물론 남동생의 빚까지 갚아주곤 하다가 나이 오십에야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5년 동안 돈을 모아 독립하며 가족과 결별했지만 2년 후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결혼할 때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시이모님의 병문안을 간 '나'는, 피붙이가 아니고 또 글을 쓴다는 이유로 '수녀처럼' 살고 있는 그의 집의 첫 번째 초대자가 되고 이후 규칙적으로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원가족 누구도 듣지 못한 윤경호의 살아온 이야기와 현재를 알게 된다.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있더라도 막막한 어둠처럼 아무 의미나 무늬도 없지. 그때 나는 방탕하게 돈을 다 써버리고 얼른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밖에 안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변해서 지금처럼 살게 됐는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밤 이후부터인 것 같구나."(89-90쪽) 네 개비의 담배와 휴관일을 제외하고 반복하는 두 번의 도서관행, 집중해 준비하는 소량의 요리로 보내는 하루, 낭비도 사치도 없이 65만 원으로 살아가는 한 달, 자신만의 정확한 루틴으로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생활을 지속하는 윤경호의 젊은 날은 무겁고 쓸쓸했다.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을 추적하고 사라진 뒤에도 끊어내지 못하는 긴 시간이 있었고, 더 오랜 과거에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마음을 무참히 짓밟은 기억도 있었다. 그는 먼훗날 비밀스럽고 공평한 '참회'를 스스로에게 돌려주었다. 우물 같은 과거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난 떨리는데 넌 심드렁하잖니?"(81쪽) 쉽게 나올 리 없는 말이었겠지만, 솔직하고 담백하게 마음을 열 줄 알았던 윤경호는 말년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끝까지 혼자서만 간직했다면 그건 정말 쓸쓸한 삶이었을 것 같고 말이다.
우연은 가책과 후회 속에서 때로 필연이 된다. 관희를 통해 문정에게 전달된 관주의 <카메라>가 그렇다.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136쪽)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도 술 한 잔을 청한 관희가 정말 '김문기'를 곧이곧대로 믿었거나, 관주와 문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자신이 급속도로 나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인식하면서도 '불법체류자'에 대한 부당한 망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자랑스러운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가져온 트라우마일 테지만, "비록 거짓이지만, 문정에게 한뼘이라도 허구의 간격을 만들어주려는"(134쪽) '빤한 연극'을 하는 딱 그만큼은 온전하지 않았을까. 누구의 책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우발적인 상황으로 어떤 우주는 끝이 나고 어떤 세계는 파괴되고, 그럼에도 카메라는 최초의 발설자에게 돌아가고야 마는 이상한 필연은 정말 소설적으로 느껴졌다. 악의적인 선입견을 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을 거라고 이해하면서도 굳이 '불법체류자'였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은 짙게 남았다.
"그들은 전체적으로는 견딜 수 없이 고집 세고 지루한 인물들의 진열장이었지만 개별적으로는 각자 고귀해 보였다. 그 고귀함은 시간을 감내하는 고독의 능력으로 빛이 났다. 그러니 그녀도 그렇게 고독하게 견뎌야만 했다"(143쪽) 예술인 레지덴스에 처음 입주한 등단 2년차 소설가, 그녀는 괴롭고 두렵고 혼란스럽다. 적당히 어울려 공동 생활을 하면서 식사 후에는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고, 무시로 동료 예술가들을 관찰하고 품평하는 것이 그녀의 일처럼 보인다. 새로 입주한 여배우 달과 작가 위현은 그녀의 주의를 온통 집중시킨다. 번역가였던 위현은 시력을 잃어가는 중에 소설가로 데뷔했고, 개인적인 시련을 티내지 않으며 레지덴스의 예술가들과 활달하게 어울린다. 미처 몰랐던 존재의 운명적 '비극'은 그를 주시하는 그녀에게 와서 한껏 증폭되고 타자화된다. 그녀는 위현에 대한 다른 이들의 '무례한' 언사에 '무력한 다짐'을 보태고, 보지 못하는 위현을 의식하며 외모를 단장하고, 전과 달리 산책하는 무리에 합류해 위현을 지켜본다. 날아든 새로 소란한 식당에서 위현을 챙기고 단둘이 술을 마시게 된 그녀는, 문어체로 문학적인 대화를 구사하는 위현에 보조를 맞추며 자신이 타인을 평가하던 기준에 어긋나지 않도록 말을 고른다. 주변을 오가는 달의 참견에도 술자리의 대화는 이어지고, 도취된 듯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던 위현의 환심은 무례의 경계를 향한다. 위현을 둘러싼/향한 탁월한 심리 묘사에 흠뻑 빠져 읽었고 조금 애매했지만 설마했는데,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해설에 약간 맥이 빠졌다.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제 막 소설가가 된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무신경한 존재들에 대한 순수한 혐오감을 작가적 자산으로 키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무심한 사람들이 연약한 타인에게 함부로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는 이 세계 안에서 자신만이 그 연약한 타인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온전히 배려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윤리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해야 할까."(255쪽) 라는 언급과 함께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에 나오는 '카타르시스 스토커'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해당 각주에는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면서 자기애를 강화하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라는 설명도 등장하는데,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생략하는 게 좋겠다. <역광>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았는데, "역광을 이용하면 피사체의 윤곽은 또렷해지되 그 경계선의 내부는 어둡게 가려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이 사진이 드라마틱한 느낌을 주는 까닭을 심리학적으로 말해보자면 그 피사체에 내 환상을 마음껏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255쪽) 라는 해설에 수긍이 됐다.
<실내화 한켤레>는 고등학교 시절 교실에 기괴한 공포를 몰고온 수학교사의 숙제 때문에 잠시 가깝게 지냈던 세 사람이 14년 만에 만나 어울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시인 혜련이 멀리 미용실 텔레비전 화면에 잡힌 경안을 알아보고,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내 선미와 함께 원룸에 들이닥친다. 특출나게 예쁘고 돈을 잘 쓰고 잘 놀았던 혜련과 단짝처럼 함께지만 어딘가 비밀스러웠던 선미, 여전히 아름다운 둘은 빈한한 원룸에서 뚝딱뚝딱 안주를 준비하고 술자리를 마련하는 능숙함 말고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주종을 바꿔가며 옛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경안의 기억 속에서는 두 사람과 관련된 과거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불쑥 시작된 회합은 나이트클럽과 선미의 지인이 운영하는 방배동 카페로 이어지고, 카페 주인의 애인까지 합류해 잔뜩 흥이 오른 술자리는 경안의 원룸에서 마무리된다. 다음 날 가물한 기억으로 깨어난 세 사람의 화제에 오른 이는 카페 주인의 애인, 원룸까지 왔었던 그는 어느새 사라졌고 선미는 그의 지독한 성병으로 카페 주인이 자궁을 들어냈다는 사실을 전한다. 홀린 듯한 숙취가 싹 달아나고 신경이 곤두선 경안이 욕실로 달려가 청소하는 사이, 해장 운운하던 혜련은 말없이 떠났다. 갑작스런 만남에 들떠 자주 보자 했던 혜련은 이후 소식이 없고, 거듭 연락하는 선미의 집에 경안이 잠시 방문하는 것으로 이들의 인연은 그친다. 순진하고 솔직한 혜련과 그 곁에 안개처럼 붙어 있던, 14년 전 경안이 두 사람의 뒷모습과 실내화 한켤레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선미는 그렇게 다시 한 번 기억 속의 사람들이 되었다. 선미의 집에서 나오며 경안은 "선미를 휘감고 있는 묘한 분위기가 비밀스러운 안개라기보다 치명적인 가스에 가깝다"(209쪽) 생각했고, 해설은 "인생이 농담을 하면 인간은 병드는데, 농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병들지만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아서 늘 배달만 하려 드는 사람도 그 자체로 환자"(252쪽)라고 선미를 진단한다. 어렸을 때 오빠 둘이 한꺼번에 죽었고, 이제는 '병실처럼 청결한 집'에서 매일 새것처럼 쌍둥이의 축구화를 닦는 선미의 남모르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어떤 여지를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5년간의 영업 종료를 앞둔 인태초밥과 신도시와 구도시를 잇는 국도변의 장어집, 과거의 헬스클럽과 일식집과 신도시의 아파트를 오가는 <층>의 인물들은 12년의 시간 안에서 서로 매혹되고 오해하고 실망하고 어긋나며, 타인의 기억과 모르는 우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그의 삶이 궁금했다. 그의 삶에 매혹되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어떤 건지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219쪽)와 "한때 그녀는 그가 발라준 남미 대륙 모양의 굴비를 먹으며 그와 함께 남미를 여행하면 어떨까 상상한 적이 있었다. 어리석고 어리석었다. 아무려나, 그녀는 더이상 그의 삶이 궁금하지 않았다. 거칠고 팍팍했을 것이 분명한 그의 삶이 무섭게 느껴졌다."(237쪽) 사이에 예연에게 일어난 일은, 인태의 탓이 아니었지만 인태의 탓이기도 한 거친 욕설로 가득한 통화를 엿들은 것이었다. '초추의 양광'과 '꼬추의 발광'의 낙차만큼이나 다른 세계에 속했던 두 사람을 가른 것이, 그 순간만 넘기면 그만이었을 운명의 장난이나 찰나의 불운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덜컥 임신한 인희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삶에 따라붙는 그림자들은 어느 순간 예연에게 인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잘잘못의 문제나 도움을 줄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결여된 무언가를 상대에게 투사하며 빠져든 이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떤 벽이 아니었을까. 그 벽을 넘어서는 것은 나의 영역이자 의지이고, 상대는 잘못이나 책임이 없는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의 의미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지만 사전을 찾아보니 "층(層) 겹치다, 계급, 수준 / 물체가 거듭 포개져 생긴 켜, 나이나 재산이나 사물 따위가 서로 같지 아니하거나 수평을 이루지 못하여 나는 차이, 위로 높이 포개어 짓는 건물에서 같은 높이를 이루는 부분" 등의 뜻풀이가 나왔다.
책 모임의 이번 달 책이었고, 오늘 오전에 줌으로 모임을 했다. 제목과 작가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모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책이다.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한 <봄밤>의 인물들이 마음에 인장처럼 남아 울렁거렸고, 간만에 느껴보는 아득함에 매료되면서도 나머지 작품들이 다 이런 식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다행히 작품마다 전해지는 밀도는 조금 달랐고, 술처럼 도수가 있다면 뒤로 갈수록 약해지는 느낌이어서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다. 이미 유명한 작가를 이제야 접하고 할 말은 아니지만, 말 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놀랐고 이 양반 소설 장인이구나 싶었다. 인물들이 나누는 촌철살인의 대화에 헛웃음을 짓다가도, 구체적인 불운이나 고통 속의 인물들에 새겨진 보편성의 조각들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며 느끼는 공감과 시무룩함과 안도감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완전체로서의 인물들은 대체로 실제 주변에 있다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연과 상황과 성격이라고 느끼며 민망해졌고, 어딘가 망가지고 부서진 그들에게 잠시나마 곁을 붙여주고 괜찮은/행복한 순간을 선사하고 그들의 오늘에 이유를 만들어주는 작가의 마음씨와 솜씨에 고마웠다. 각자 믿고 있는 것들의 거리, 해소되지 않고 남겨지는 오해와 어긋남, 찰나에 느끼고 잊(는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쌓이고마는 관계의 삐걱거림을 섬세하게 포착한 진한 소설들, 어렸을 적 좋아했던 소설을 다시 읽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얼마 전 '젊은' 소설가의 작품을 읽으며 세대감성에 대해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내용과 별개로 '편안하게' 느껴지는 소설을 읽은 느낌이기도 하다.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e)에게 바치는 경의"라는 제목이 붙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해설도 좋았다. 인상적이었던 구절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반가웠고, "유사성과 인접성,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일까요?(166쪽)나 "매초 매초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오는 게 느껴집니다."(172쪽) 같은 문장들이 로만 야콥슨과 발터 벤야민의 인용이라는 걸 알려주는 친절함도 고마웠다. ‘호모 파티엔스’라는 말은 처음 접했는데 빅터 프랭클이 "인간은 이성으로 사유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먼저 고통받는 인간이며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더 중요한 측면이라고 과감하게 말하면서"(259쪽) 제안한 명칭이라고 한다. 나아가 <봄밤>과 <이모>를 예로 인간은 고통에 수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감당해내기도 하며, "환자(patient)는 견디는(patient) 사람이다. 그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인생의 비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통을 견디면서 인간의 숭고함을 입증하기도"(259쪽) 하므로 '고통하다', '고통-하는 인간'이라고 옮겨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고 쓴 부분에서는 뭔가 극진한 마음이 느껴졌다. 자신의 기존 논고를 바탕으로 '사랑은 결여의 교환'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아름답지만 도저하게 느껴졌고, "권여선의 소설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268쪽)는 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고통의 양상을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므로, 지금의 내게 가장 크게 와닿은 두 개의 문장은 266쪽에 모여 있었다.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이모>) 그리고 "자유란 고립을 견디는 능력이다."(페소아, [불안의 책])
권여선
2016.5.16초판1쇄 2017.1.19초판9쇄발행, (주)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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