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쓸쓸함이 덧입혀진 인물에게 끌리는 성향은 어릴 적에도 마찬가지여서,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을 테고 소 그림에 별 감흥이 없었음에도 이중섭을 그냥 좋아했던 것 같다.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의 공연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고 중학생도 혼자 입장할 수 있는지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 통영과 서귀포를 여행하며 곳곳에서 흔적들을 만나고 그가 가족들과 살았다는 퇴락한 미니어처 같은 거주지와 미술관과 거리를 둘러보고 걸으면서, 어떤 삶을 상상하며 마음이 그늘졌다가 환해졌다가 했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에 친구랑 함께 갔었고, 그때 산 "나무 위의 노란 새" 마그네틱이 현관에 붙어 있다. 예전에 그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지만 많은 걸 잊었는데, 지난주 통영과 이중섭 관련 강의를 듣고 토요일 답사를 생각하며 책장에서 오래 묵은 책을 꺼내 읽었다.
또렷하게 사진이 남은 인물은 그 생생함 때문에 생몰년도와 무관하게 시대를 초월한 존재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중섭도 내게는 그런 경우다. 그는 1916년에 태어나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 출생지는 평안남도 평원군이었고 대지주와 민족자본가 집안의 터울 큰 막내로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관심과 소질을 보였고 운 좋게 학창 시절부터 여러 미술가들의 영향과 지도로 성장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는데, 평양 외가에서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때는 집을 드나들며 친하게 지낸 친구 김병기의 아버지인 일본 유학파 유화가 김찬영이 있었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는 프랑스 유학생 출신의 부부 화가 임용련과 백남순이 교사로 부임해 도화 과목을 가르치며 이중섭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향후 프랑스 유학을 염두에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데이고쿠미술대학에 입학한다. 일본 역사가 시험 과목에 포함된 관립 도쿄미술학교를 피한 선택이었지만, 학교의 분위기나 교육 수준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연말에 스케이트를 타다가 다쳐 요양과 휴학에 들어갔다. 1936년에 복학 대신 자유롭고 개성을 존중하는 학풍의 분카가쿠잉 서양화과에 입학했는데, 분카의 교장 니시무라 이사쿠라는 미국에서 유학한 개방적 사고의 소유자로 딸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당시의 다른 교육기관들과 달리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했다고 한다. 분카에서 이중섭은 기성복을 직접 수선해 만든 작업복을 입고 다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잠을 자고 밤부터 새벽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생활을 했다.
20대의 이중섭은 도쿄의 분카와 경성, 원산 등지를 오가며 때로 요양하고 작품 활동에 몰두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운명의 사랑과도 만났다. 1938년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가들이 창립한 지유비주쓰카교카이의 두 번째 지유텐 공모전에서 협회상을 수상해 주목을 받는다. 병으로 인해 휴학하고 원산에서 요양한 뒤 돌아와 복학한 1940년에는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해 졸업 후 연구생이 되었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미술가들이 결성한 조선신미술가협회의 창립전에 작품을 출품하고 1943년에는 지유텐에 출품한 작품 "망월"로 거금의 상금과 팔레트가 부상으로 주어지는 태양상을 수상한다. 이 시기에 출품한 원작 대부분이 망실되고 도판으로만 남았지만, 1940년대 초중반 4년간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생활한 그가 마사코에게 그려 보낸 100통이 넘는 엽서 그림은 남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작품에 한글로 사인을 했던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파티에서도 조선말 노래를 곧잘 불렀다고 한다. 전통적이고 향토적인 소재와 표현의 작품과 자모의 조형적 예술성을 부각한 한글 서명은 그의 민족주의 성향과 상통하는 것이었고, 일제의 군국주의 팽창 정책이 나날이 격화되는 시기 일본 여인과의 사랑은 번민과 양가 모두의 반대 속에 지속되었다. 1944년 중반부터 심화된 미국의 일본 공습에 이중섭은 마사코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마사코는 폭격을 피해 피난을 준비하던 가족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조선에 도착한다. 그들은 1945년 5월 혼례를 치르고, 창씨개명 정책이 강행되는 중임에도 마사코는 이남덕으로 개명한다.
해방 후 이중섭은 첫 아들을 얻었으나 곧 사망했고, 고아원의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을 잠시 했다고 한다. 원산과 경성을 오가며 최재덕과 함께 미도파백화점의 실내 벽화 작업을 했고, 1946년 2월에는 조선예술동맹 산하 미술동맹의 원산지부 회화부원이 되었다. 당시 북한은 1946년 3월 실시한 토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사라지고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으로 새로운 사회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1947년 3월 당중앙위원회가 채택한 '북조선에 있어서의 민주주의 민족문화 건설에 관하여'라는 결정문을 통한 문예운동 규제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조국과 인민에 복무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문화예술 창작 활동으로 자리매김하던 이 시기 이중섭은, 구상 등이 참여한 원산문학가동맹의 시집 [응향]의 표지와 후일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한 오장환의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 그림을 그렸다. 1947년 평양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출품한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가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또 다른 작품전에서는 천재라는 인정과 함께 '인민의 적'이라는 소련 평론가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불안한 정세와 시대의 격동 속에 이중섭은 화실에 틀어박혀 그림에 집중했고, 1947년과 1949년에 두 아들이 태어나고 원산 시외의 송도원으로 이사한 후에는 연필 소묘 작업과 소 관찰 등에 골몰한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형이 행방불명되고 북한에 무차별 폭격이 이어지자 몰살을 염려한 어머니의 강권으로 이중섭은 부인과 두 아들, 조카 이영진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1950년 12월 원산항에서 후퇴하는 국군의 화물선을 타고 3일 만에 부산에 도착한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피난민 수용소에 머문다. 부산에서 만난 김병기의 주선으로 문총구국대 경남지부 회원이 되어 신분을 보장받았지만 생활은 형편 없었고, 이따금 하던 부두 하역일은 껌팔이 소년을 때리는 헌병을 제지하다 곤봉에 맞아 크게 다친 후 그만두게 된다. 다음 해 이중섭 가족은 급증한 인구로 포화 상태에 이른 부산을 떠나 피난민 분산의 대안이었던 제주도로 이주한다.
1951년 봄 제주에 도착해 여러 날을 걸어 도착한 서귀포에서 이중섭 가족은 12월까지 머물렀다. '이중섭 거주지'로 남은 1.3평짜리 방에서 생활하며, 도움을 받은 이들에게 답례로 주거나 가족을 잃은 이들이 부탁한 초상화를 비롯해 계속 그림을 그렸다. 북에 있을 때부터 꿈꿨다는 벽화 작업을 위해 조개껍데기를 모아두기도 했다고 한다.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같은 그림에서는 전쟁 중인 현실을 초월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고, 훗날 일본의 가족들에게 보낸 "그리운 제주도 풍경"의 환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는 서귀포에서의 생활이 가족을 지극히 사랑했던 이중섭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오히려 애틋한 느낌을 준다.
1951년 부산으로 돌아온 다음 해 2월에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에 가입했고,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생활고는 여전했고 아이들과 아내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데다 일본의 장인까지 돌아가시자, 일본인 수용소에서 지내던 가족들은 1952년 여름 3차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지인의 소개로 남포동 어딘가에서 노래극 <콩쥐와 팥쥐>의 무대장치와 소도구 등을 만들기도 하고, 월남 미술가들이 꾸린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으며, 나빠진 건강에도 그림을 꾸준히 그렸다. 이중섭은 아내와 주고받는 편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처참한 생활을 견뎠고, 아내는 일본 서적을 한국에 보내는 사업으로 그의 생활비와 제작비를 보태고자 했지만 큰 사기를 당해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중섭이 남쪽에서 겪은 어려움은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었다. 부산에 당도해 신원조사에서부터 곤란을 겪었던 그는, 1953년 6월 3회 신사실파전에 출품한 "굴뚝"으로 조사를 받고 작품이 철거당했다. 분단 이후 고향인 북에 머물다가 월남한 이중섭의 신변은 불안했고, 전쟁과 체제 경쟁으로 과민한 당국은 북에서 내려온 이들을 수상히 여겼으며 그 역시 예외가 되지 못했다. 가족들을 그리워하던 이중섭은 그해 7월 어렵사리 일본에 건너가 일주일 정도 지내다 돌아오는데,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고 경상남도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에서 일하던 유강렬의 권유로 넘어간 통영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대표작인 "달과 까마귀", "부부", "황소", "흰 소" 등의 많은 그림을 그렸고,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통영 수원지", "통영 풍경", "충렬사 풍경" 등 풍경화를 여러 점 남겼다.
이후 진주와 대구를 거쳐 1954년 7월 서울로 올라간 이중섭은 1955년에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에 출품한 은지화 세 작품은 당시 책임자 맥타카트에 의해 뉴욕 모던아트뮤지엄에 기증되기도 했지만, 전시회를 통해 재기해 빚을 갚고 가족들과도 다시 함께하는 꿈은 물거품이 됐고 이중섭의 심신은 극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왜관의 구상 시인 집에서 그린 "구상네 가족" 속 자신의 모습이나, 대구 성가병원 정신과에 입원해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렸다는 "자화상"에는 당시 그의 불안이 녹아 있는 것 같다.
이후 돌아온 서울에서 그는 지인의 집을 전전하거나 신경쇠약과 영양실조 등으로 여러 병원의 입퇴원을 반복했고, 미쳤다는 소문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극심한 간염으로 음식을 거부하는 일이 잦았고 1956년 한 달여 입원했던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9월 6일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은 사망한 지 사흘 만에 알려져 친구들이 장례를 치렀고, 화장한 유해가 망우리 공동묘지와 일본의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다음 해 후배 조각가 차근호가 작업한 묘비가 망우리 묘소에 세워졌고 1965년 어린 시절 친구였던 김병기가 그에 대한 약전을 발표했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고 쓸쓸히 세상을 떠난 이중섭이 '신화로서 부활'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저자는 이 책이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한 최초의 편년 작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 목록이 6쪽에 걸쳐 빽빽하고 3쪽에 이르는 저자 후기에는 5년 동안 집필하며 도움을 받은 많은 이름들이 등장한다. 엄청난 조사와 취재를 통해 쓰여졌을 책에는 이중섭의 삶과 예술에 대한 세세한 기록들과 더불어 당시의 사회상과 미술계의 상황, 이중섭에게 영향을 미쳤던 다양한 요소와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가득하다. 문외한인 탓에 낯선 이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활동과 자취가 새롭고 감동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시공간을 초월한 어떤 상징처럼 이미지화된 이중섭 역시, 시대와 현실의 한계 속에서 살아간 평범한 인간이자 비범한 미술가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독서였다. 이후에도 이중섭에 대한 많은 책들이 나왔으니 새로 밝혀졌거나 수정된 내용들도 있겠지만, 20년이 넘는 시차에도 내게는 꽤 유익했다.
최석태
2000.7.5초판1쇄발행,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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