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4. 7. 22. 16:18



어학사전을 찾아보니 '다짐'에는 이런 뜻이 있다.
1.어떤 일을 반드시 행하겠다는 굳건한 마음가짐
2.이미 한 일이나 앞으로 할 일에 틀림이 없음을 단단히 강조하거나 확인함
대충 알고 있었지만 찾아본 이유는 한 달하고도 열흘 넘게, 생각만 하며 시간만 흘려보낸 스스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일을 그만둔 후 미미하게나마 존재하던 사회적 네트워크도 다 끊겨버리고 없는 사람처럼 혼자 사는 동안 나만의 다짐을 무시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3년을 넘다보니 세상 제일 편하지만 세상 제일 한심한, 그러나 나 말고는 모르는 게으른 현존에 익숙해지다 못해 잠식되었다.

 

져나오는 것도 내 몫이지만 쉽지 않아, 그런 날들의 고리를 끊어보고자 봄에 큰맘 먹고 여행을 다녀왔다. 팬데믹 국면이 진정되면서 막연히 꿈꾸고 있었지만 무기력에 젖어 용기를 내지 못했던 유럽행. 함께 여행할 정도는 되는 지인의 장기 여행 소식에 동하는 마음을 실행으로 옮겼고, 4월 18일부터 6월 13일까지 한국을 떠나 있었다. 급하게 결정한 데다 이미 여행 중인 동행의 사정에 맞춰 띄엄띄엄 일정을 맞춰야 하는 터라 3월부터 4월 초까지는 이것저것 알아보고 결정하고 예약하느라 많이 바빴다.

 

2000년 가을 5주간 유럽 배낭여행을 했었는데 거의 사반세기 전이니 그때의 기억은 추억일 뿐. 준비하던 초반에는 너무 비싼 물가에 가는 게 맞나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온전히 혼자 떠날 자신도 없고 물가가 이러하다면 지금 가는 게 제일 싼 거라는 생각으로 놀란 마음을 달랬다. 가고 싶은 많은 곳들 중 여러 여건을 고려해 갈 수 있는 곳을 추리고 각종 블로그와 체크인유럽 카페와 유레일패스 공홈과 부킹닷컴을 들락거리며 3월이 다 갔다. 4월 초순까지 8주간 여행의 루트와 숙소 등을 열심히 채우며 나중엔 진이 빠졌지만 간만의 몰입은 나쁘지 않았고, 출발 일주일 전부터는 카프카의 장편소설들을 읽으며 나만의 워밍업을 할 수 있었다.

 

4월 18일 입국한 마드리드부터 4월 27일 바르셀로나에서 마르세유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스페인 여행은 너무 오랜만의 해외 체류와 동행/들과 함께하는 상황에 적응하며 여행하느라, 뭔가를 매일 기록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혼자 여행을 시작한 마르세유에서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포스트 만들어 놓고 대충 메모하고 넘어가는 게 버릇이 되어 마무리가 어려웠다. 기록과 기억을 위해 찍은 사진들이 나날이 쌓이고 정리되지 않는 텍스트들과 더불어 갈수록 부담스러워졌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스트레스 받기보다 귀가 후 정리하며 일상도 함께 정돈되기를 바라며 여행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 며칠은 바짝 부지런을 떨며 짐을 정리하고 내친 김에 내년 초의 이사를 생각하며 책장까지 손을 댔는데, 차분히 앉아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미루기 위한 핑계이기도 했다. 좁아 터진 노트북으로는 사진들을 감당할 수 없어 몇 년 전부터 생각만 했던 아이패드까지 장만했음에도,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일의 부담은 자꾸만 게으름을 피우는 걸로 이어졌다. 와중에 이따금 사진첩을 넘겨보며 내가 여기 있었다니 싶어 가슴이 뛰는 순간이 있어 새삼스럽기도 했는데, 덕분에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추석 전까지 꼭 여행 기록을 정리하자고 시작일로 정한 디데이가 오늘이다. 새벽 6시 넘어 잠들었다가 정오쯤 일어났고 또 망했나 싶었지만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아 정말 오랜만에 노트북을 펼쳤다.

 

어제 저녁 세상을 떠나셨다는 김민기 선생님의 부고를 접했다. 중학교 때 우연히 해금 후 그가 출연한 방송을 보고 그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은 책을 읽으며 감동하고 노래들을 들으며 깊이 빠졌었다. 고등학교 때는 막 개관한 학전 소극장을 들락거리며 이런저런 공연에 벅찬 날들이 많았고, 지금은 탁 트인 차로가 된 좁은 골목에서 그를 마주쳐 혼자 설렜던 기억이 난다. 이후 그를 선생님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시간들이 있었고 아주 옅은 인연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추억이다. 그 시간들을 끝으로 나는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었다. 이번 여행 중에는 sbs의 김민기 다큐 보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오래 연락이 끊겼던 초등학교 친구가 톡을 보냈고, 덕분에 여행 다녀와서 오랜만에 통화하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부고에 기대어 알량한 추억을 떠올리는 게 민망하지만, 선생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각양각색의 수많은 마음들이 존재할 테니 나는 이렇게 소소하게 기억하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그의 작품에서 받았던 진한 감응을 많이 잊고 살았지만, 수렁에라도 빠진 듯 침잠한 일상에서 빠져나와야겠다는 마음을 다지던 중 만난 부고가 내게는 여전히 유효한 자장 같기도 하다.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사람들의 슬픔은 너무나 클 것인데, 나는 너무 담담해 죄송한 마음도 든다. 생의 종착점인 죽음은 늘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할 일을 마쳤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전하고 가셨다는 기사와 환한 웃음의 영정사진을 보니 감사한 마음으로, 평안하시길 바라게 된다. 그리고 진심의 인사,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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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