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추천된 몇 권 중 차악을 선택하게 되는 모임의 10월 책이었다. 함께 추천된 다른 책이 신간이어서 도서관에서 빌리기 어려울 것 같아 한 표를 던졌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별로 읽은 게 없으면서도 심리학 관련된 책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제목을 떠올리면 묻어두고 살았던 모멸의 기억이 환기되는 것 같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모임을 하는 한 책을 다 읽는 건 기본이라는 책임감으로 펼쳐든 책장, 헌사 첫 부분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과감히 드러낼 용기를 지니며”에서부터 거리감이 느껴졌고(왜 드러내야 하지?) 머리말 “오늘도 모멸감에 시달리는 당신에게”를 읽으며 흥미가 떨어지고 저항감이 들었다. 모멸감을 느낀 적은 있지만 ‘오늘도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데, 이 책을 읽으려면 그런 상태여야만 할 것 같은 불쾌한 기분도 밀려왔다.
본문을 시작하며 소개하는 2장의 여섯 가지 사례는 비교적 잘 읽히고 서두 부분보다는 나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심리적 고찰의 중심이 되는 ‘사적 생활 환경 속 인간들 사이에서 맺어진 관계’가 전혀 없는 내게는 별로 와닿지 않기도 했다. 60쪽 전후, 자신을 피해자로 위치짓는 모멸의 당사자가 지원군을 찾고 편을 만들고 하는 식의 행위는 너무 극단적이고 이 정도면 “모멸감이 만드는 감정의 폭풍”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되는 병적 상황 아닌가 싶고, 일반적으로 모멸감을 느꼈다고 이렇게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싶어 이상하게 여겨졌다. 91쪽 “피해자 역할을 두고 벌이는 이 경쟁과 같은 비참한 운명을 ‘훈장’으로 여기는 상황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라는 부분에 이르자 책을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모멸감을 드러내고 공동체 내에서 반응 행동이나 타인에 대한 비난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당연히 그렇다고 가정하는가? 저자가 자신의 일과 삶의 배경을 너무나 보편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내가 살아온 배경과 환경이 표현에 너무 인색하거나 혹은 감정을 감추는 데에 익숙했던 것인가? 내게 배우자나 연인 같은 물리적으로 친밀한 관계의 상대가 없기 때문인 것인가? 이 책을 읽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진한 저항감과 얕은 반론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모멸감은 불쾌감, 수치감과 어떻게 다른가? 모멸감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무겁고 큰, 돌이킬 수 없는 낙인 같은 느낌인 데다 곰곰 생각해봐도 정확히 어떤 감정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어학사전을 찾아봤다. * 모멸감侮蔑感: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스러운 느낌, * 업신여기다: 교만한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다, * 깔보다: 만만하고 다루기 쉽게 여기어 얕잡아 보다. * 불쾌감不快感: 마음이 거슬리고 언짢은 느낌, * 수치감羞恥感: 자신의 잘못이나 약점 따위로 인하여 부끄러운 느낌. 불쾌감이나 수치감과 사전적 의미가 다르고,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된 감정 역시 다르다는 건 알겠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모멸감'이라는 단어의 분명한 정체는 모르겠다에 가깝다. 신기한 것은 侮(업신여길 모)와 蔑(업신여길 멸)이라는 두 개의 자동사가 합쳐져 피동의 의미가 되는 단어라는 점.
아무려나 고역의 전반부를 지나니 중반부터는 그래도 전보다 읽을만 해졌고, 관계의 당사자들을 가해자, 피해자, 구원자 등으로 나누지 않고 모멸감에 대해 다루는 점은 신선했다. 고통이나 모멸감을 신체화하는 언어 표현이 부정적 감정을 증폭하거나 현실을 왜곡하는 효과에 대한 지적 그리고 욕구 대신 소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타인 혹은 자신에 대한 바람이 즉각 충족되어야만 한다는 전제 혹은 집착을 완화하는 효과 등도 기억할 만한 부분이었다. 저자의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모멸감은 대부분 상호작용 과정에서의 '해석'이 문제시된다는 것, 언행 당사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상대가 모멸로 받아들이고 감정에 빠져들수록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문화적 틀에 크게 기인한다는 것이다. 서두에서 마지막까지 ‘우리 문화’를 강조하는 부분이 종종 등장하는데, 저자의 주장대로 독일에서 유독 ‘가해자-피해자’ 구도가 강력하고 뿌리 깊다면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책에서는 사적 관계에 국한했지만 현대 사회가 아니라 ‘우리 문화’를 꼽은 데에는 나치즘의 영향도 있는 것일까?
후반부에서는 모멸감을 줄일 수 있는 행동 양식 등에 대해 제안하는데 15장에서 모멸 현상이 일어났을 때 당사자들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솔직히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졌고 대단히 지적인 사람들이거나 심리학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과연 전문가의 개입 없이 가능할까 싶어졌다. 16장에서 설명하는 모멸을 유발하지 않고 민감성을 줄이는 방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거칠게 정리하자면 세뇌와 최면, 명상과 수련에 가까운 느낌이어서 역시 사람/마음의 일에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물론 내게 달라져야 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되새겨볼 만한 이야기들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맺음말에서 심리치료사의 역할에 인간의 고통에 기여하는 문화적 현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포함된다는 말은 인상적이었고, 다 읽은 후 돌이켜보니 관계와 심리를 다루면서도 문제적 상황에 봉착한 개인에만 초점을 두지 않은 점은 괜찮았던 것 같다. 주리를 틀며 읽을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본문의 구성 방식도 한 몫했다. 주요 서술, 여담, 인용, 각주, 미주, 괄호 속 안내(때로는 한참 뒤의 내용을 참고하라는) 등 본문이 너무 여러 차원으로 산만하게 정리되어 있어 읽을 때 집중이 안 되고 정신이 없었다. 여담 부분의 글자를 초록색으로 표기한 것도 가독성 떨어졌고, ㅇ로 표시한 각주는 본문의 ㅇ표시를 너무 흐리게 처리해 가끔은 찾아 읽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써야 했다. 책이 타겟으로 삼는 독자가 모멸감 등 관계의 고통으로 스트레스 상태라면, 이런 부분에 대한 고려도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원래 제목이 뭐였을지, ‘모멸감’이라는 단어가 독일어에서도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일지 궁금해지긴 했다. 관계에서 주고받는 감정의 해석으로 자신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문제를 다루는 저자가 강조하는 것 중 다른 하나는,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이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단어에 꽂힌 의문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언젠가부터 불쾌감이나 수치감 같은 단어를 대체(?)하는 느낌의 ‘모멸감’이라는 키워드가 회자되는 이유가, 여러 겹의 스트레스로 일상이 힘든 이들을 향한 심리학이나 자기계발서 출판계의 마케팅 결과는 아닐까 하는 불손한 상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무려나, 다 읽고 나니 읽는 과정에서 느꼈던 고통스러움은 어느 정도 상쇄되고 새겨볼 만한 이야기들이 남기는 했다.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고 나면, 잠시나마 마음과 시간을 내어 관계 맺은 결과로 내게 남겨지는 부분이 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지간히 회피 성향인 내게는 부작용도 남았는데 나의 모멸감과 관련된 지난 사건과 인물의 기억이 환기되었다는 점. 지난 일이라는 생각을 따로 할 일이 없을 만큼 뇌리에서 지우고 살고 있었는데, 책을 읽고 모임을 하며 별로 달갑지 않은 기억이 소환되었다. 책에서 이야기한 '반추'의 부정적 의미를 책 덕분에 실감하고 있는 셈. 요즘 책 모임 참 애매하다.
프랑크 M. 슈템러 지음•장윤경 옮김
2022.7.1초판1쇄인쇄 7.8발행, 유영(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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