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9. 3. 15:57

 

 

베트남, 방글라데시, 네팔, 미얀마, 스리랑카, 필리핀 출신 이주활동가들을 인터뷰한 구술 기록을 엮은 책이다. ‘차별에 맞서 삶을 일궈내는 이주활동가들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대표 저자격인 이은주는 책 출간의 계기와 문제의식 등을 서술한 서문에서 “부끄러움과 반성으로 시작한” 작업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주노동자의 한국 이입 역사가 30년을 넘었고 그사이 차별적인 정책과 제도에 저항하는 당사자들의 조직과 투쟁이 명멸했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 세대가 성장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주노동자의 온전한 자리는 없고, 그들의 존재감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때는 혹독한 노동과 극심한 차별의 피해자로서 부각될 때다. 그럼에도 많은 제약을 감내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권리 침해에 취약한 이주노동자들의 곁을 지키는 이주활동가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책에는 그들 중 여섯 명의 사연이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에 두 페이지 정도의 간략한 소개글, 후에는 한국에 오게 된 사연과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과 삶, 현재의 활동에 대한 구술이 입말로 기록되어 있다. 인터뷰이 대부분 20대 초반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지금보다 전반적으로 열악했던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 20년 이상 한국에서 생활하며 이주활동가로 성장한 과정은 다르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성공한 이주노동자로서의 모국 귀환 대신 자신과 동료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삶의 방향을 전환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인과 결혼하고 국적 취득에 개명도 했지만 끝나지 않은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며 후배 이주민들과 함께하는 활동에 매진하는 김나현.  
기회를 찾아 온 한국에서 고된 노동과 모든 것을 건 투쟁으로 청춘을 보내고, 노동조합 활동과 영화 작업을 통해 이주노동의 현실을 기록하고 질문을 던지는 마문.  
한국에서 10년간 체류하며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앞장서다가 2004년 강제 출국된 이후 네팔노총에서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이주노동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네팔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샤말 타파.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고향을 떠나온 한국에서 위험한 노동 환경을 경험하며 오랜 미등록 생활을 견디고, 단체 활동을 통해 이주노동자 조직과 지원 및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헌신하는 또뚜야.  
산업연수생 체류를 마친 후 미등록으로 일하기 시작한 대구 성서공단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노동조합의 4년차 전임 활동가로 살아가는 차민다.  
모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중 신변의 위협을 피해 입국한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 공동체를 조직하고 권리를 위해 투쟁하며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놀리. 

 

이주노동이 사회경제적 성취와 안정된 미래를 위한 가장 유력한 선택지인 아시아 국가의 현실을 배경으로 이들은 오래 전 한국에 왔다. 제도의 세부가 바뀌어도 이주노동자를 값싼 노동력으로만 인식하는 점은 변치 않은 한국 사회가, 이들을 이주활동가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한 사람이 성인으로 성장할 만큼의 기간 동안 일하며 살아도 안정적 정주의 방법은 한국인과의 결혼뿐인 배타적인 조건에서, 여러 어려움을 딛고 정착한 이들의 경험과 삶이 성공이 아닌 연대의 서사로 기록될 수 있었다는 점이 소중한 것 같다.    


이은주 ․ 박희정 ․ 홍세미
초판1쇄펴낸날 2023.4.3, 도서출판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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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