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작가의 두 번째 문장이 “나는 10시쯤 눈을 뜬다.” 였다. 일요일의 기록이었지만 6시나 7시쯤 눈을 뜨는 사람보다는 가깝게 느껴져 일단 호감. 그다음엔 책이 “나의 강박증을 어떻게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시도에서 쓴 작품”이며 “어떻게 이 애정이, 무관심과 비애 그리고 아주 지독한 증오로 주기적으로 바뀌는 감정의 사이클을 모두 견뎌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일까?” 라는 자문과 “팬이 된다는 것에 관한 책”이라는 서술에서 마음이 열렸다. 축구에 관심 없고 경기 중계를 제대로 본 적도 없는 내게는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 축구가 아닌 다른 키워드가 필요했는데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졌다. 9월의 모임 책이어서 마주하게 된 무관심한 분야에 관련된 두꺼운 책이었는데, 읽기의 부담을 덜어주는 도입부였다.
축구와의 사랑이 시작된 1968년 9월 14일, 즈음의 작가는 별거하던 부모가 이혼하고 이사한 작은 집에 문제가 생겨 이웃집에 얹혀 살던 중학생이었다. 축구팀 아스널의 홈구장 하이버리는 이혼하고 따로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주기적으로 만나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누구나 겪는 성장통에 누구나 겪지는 않는 가정사를 감당하며 자라나는 소년에게 펼쳐진 새로운 세계였다. 차원이 다른 몰입감으로 축구에 빠져들면서 극대화된 ‘고통으로서의 오락’ 개념(“바로 그 개념이 내 인생을 형성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축구는 물론이거니와 책이나 음반도-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대한다는 비난을 들어왔고, 후진 음반을 듣거나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을 미적지근한 태도로 대하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분노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24p)이 작가의 기질 그리고 삶의 과정과 결합해 축구와 일체화된 독특한 일생으로 승화된 듯 했다. 20년 넘도록 축구와 함께한, 동일시와 의미부여 끝판왕의 남다른 일대기는 간략히 연도와 기간이 표기된 세 장의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8~1975", 열한 살의 첫 번째 직관부터 성년이 된 열여덟 살 시절까지를 기록한 첫 장은 축구와 더불어 명랑과 우울을 오가는 성장기다. 이혼 후 새 가정을 꾸려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아버지는 사춘기 아들을 위해 구하기 힘든 경기의 입장권을 마련해 함께하고, 어머니는 아직은 위험할지 모르는 원정 축구 관람을 당사자도 의아할 만큼 어렵지 않게 허락해준다. 부모의 배려와 지지 속에서 남부럽지 않은 아스널 팬으로서의 역사를 쌓기 시작한 소년의 정체성은 아스널과 하이버리와 축구장 팬 문화와 더불어 형성되어 간다. 대체로 폭력적이고 혐오발언을 일삼는 열성 축구팬들의 행태를 때로는 관찰하고 때로는 휩쓸리지만 과거의 거대한 참사를 알게 되고 '작은' 폭력을 직접 겪으며 자신만의 응원 방식과 철학을 정립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인생에 드리운 그늘과 컴플렉스, 다양한 감정과 고충을 소화하면서 성숙해가는 소년에게 축구의 모든 것이 삶과 사회를 이해하는 거대한 배경이자 자양분이 된다.
소년은 1975년 10월 4일, 경기장에 함께 간 사촌 동생 마이클을 통해 자신의 지난 모습을 반추하며 "축구여, 안녕" 나름 감상적인 작별 인사로 축구장을 떠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된 작가에게 6~7년을 열광했던 아스널과 축구와의 이별은 조금 슬프지만 유년기를 마감하는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고, 바로 다음 챕터에서는 "제2의 아동기"라는 제목으로 열 달만에 자연스럽게 해후한다. 1년 가까운 권태기의 원인은 아스널의 부진한 성적과 진부한 플레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신상의 변화, 운명적인 재회의 이유는 새로운 감독의 부임과 여러 가지 신상의 변화였다. 대학 시험을 치르고 입학 전까지 런던 근교에서 일을 하고, 공립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메리트가 되어 케임브리지에 입학하고, 졸업 후 런던에서 4년간 외국인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도 계속된 '축구와 삶'이 두번째 장인 "1975~1986"에 담겨 있다.
마지막 "1986~1992"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 '축구와 삶', 자칭 '아스널 사이코'(281p)로서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아스널과 축구'가 일순위인 작가의 특별함은 어떤 소수성처럼 권리로서의 위상을 획득한 느낌, 가족들도 친구들도 직장에서도 그 특수성을 인정하고 양해하는 수준에 이른다. 함께 아스널을 응원하지만 경기와 관련해 어떤 상황에서든 작가보다 더 슬플 수는 없다는 것을 상호 인지하는 여자친구가 존재하고, 아스널 홈 구장인 하이버리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집을 구해 마음껏 분노하고 분석하며 경기를 즐기는 작가의 모습은 묘하게 흐뭇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초판 본문의 마지막 글은 1992년 1월 11일 경기와 관련한 것이고, 말미에 2011/12 시즌에 대한 소고가 특별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리그의 변화와 과거에의 향수, 세월이 흐른 만큼의 안정감 정도를 빼면 달라진 건 별로 없는 느낌이었다. 아, 마지막 글에서 “하이버리에서 마지막 시즌이 시작될 때 클럽은 시즌 티켓 소지자들에게 내 책인 [피버 피치] 특별판을 증정했고”(412p)에서는, 대성덕에 대한 존경을 담은 마음의 박수를 보냈다.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하이버리 한 구석을 지키며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축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로서 ‘축구는 내 인생’인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쉽지 않은 독서이기는 했다. 장거리 버스 이동 때가 아니면 낮잠을 전혀 안 자는 편인데 읽다가 잠드는 신선한 경험이 보태졌다. 포지션의 특징이나 경기 룰, 등장하는 선수들과 팀들과 리그 등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보니 특정일의 경기 중심으로 서술되는 이야기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축구 자체에 관한 부분에서는 지루함이 몰려왔고 '글자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본문이 끝나는 381쪽까지 등장하는 수많은 선수들 중 들어본 이름은 펠레뿐이었고, 2010년대 초를 다룬 특별부록 편에서도 티에리 앙리, 웨인 루니, 리오넬 메시 정도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작가는 본인이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쓰는 미덕과 균형감각의 소유자인 듯, 궁금했던 현대 영국의 사회경제적 분위기 같은 것은 별로 엿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유머와 필력은 훌륭해서 축구 자체에 대한 부분을 빼면 재미있었다.
체감상 분량의 10% 정도인 축구 외적인 부분, 그러니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에는 좋은 것만 있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갖은 우여곡절 속에 배신감과 실망을 겪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좋아하는 마음이 새삼 궁금해졌다. 어떤 면에서는 감정적으로 실질적으로 비실용과 비효율의 집합인 좋아하는 일이, 때로는 인생의 반전을 만들어내지만 대체로는 그저 자기만족일 뿐인 그 일이, 내용과 형식은 변화할지언정 대다수에게 계속되는 이유가 뭘까. 우리는 그 무엇으로든 삶의 시간을 채워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과 무의미와 권태보다는 좋아하는 무언가에 돌진함으로써 얻는 희노애락과 그로부터 파생된 감정과 상황과 우연들을 정교화하면서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일까. 물론 대다수 사람에게 적용할 수는 없는 패턴일 테고 정도의 차이도 크겠지만 말이다.
순정과 인내 부문에서 작가에 비할 바 아니지만, 나 역시 누군가를 무언가를 참 많이 좋아하고 그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서 느껴지는 공감이 있었다. 다만, 거의 처음으로 축구의 멋진 점과 축구 관람의 매력을 언급하고 ‘전 세계의 중심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309p)을 설명하며 반례로 든 것들에는 수긍하기 어려웠다. 뮤지컬이나 콘서트 등은 계속되니 축구 경기와 같은 일회성은 없다고 했는데 축구처럼 상대편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어떤 전개와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라이브 공연의 특성상 매 공연마다의 고유성은 분명 존재한다. 어린 시절 지하 소극장 콘서트에서 같은 공연을 보고 또 보면서도 매번이 달랐던, 지금 여기여서 가능한 작은 세상의 벅찬 충만감 같은 것이 떠올랐다. 읽으며 축구에 대해 가장 긍정적으로 또 단정적으로 서술한 부분으로 다가왔는데, 그 매력을 굳이 다른 분야와 비교하며 설명해야 했을까 싶어 아쉬웠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신나다'를 거의 '신 나다'로 표기해서 잊을 만하면 의아해졌는데, 길지 않은 "옮긴이의 말"에서 91/92시즌이 “자국 리그의 부흥을 위해 대기업의 자본을 끌어들여 ‘프리미어리그’를 출범시키기 직전”이었다는 짧은 설명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주제에 집중하는 작가의 자제 덕에 본문에서는 다른 설명이 없었는데 초판이 집필된 1990년대 초반이 신자유주의가 세계의 새로운 질서로 자리잡고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스포츠 또한 더욱 상업화의 극단으로 재편되는 시기였다는 점이 상기되면서, 1990년대 초반 이미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던 팬에게 집필 당시의 변화는 꽤 의미심장한 변곡점이었겠구나 싶어졌다. 나이를 먹으면서도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은(?) 어느 한 부분을 남겨두는 일, 작가만큼은 아니지만 내게는 노래와 영화가 그런 셈이다. 어린 시절 잠깐씩은 함께 즐기는 동호인이 있었지만 무엇을 좋아하든 거의 혼자인지 한참인 터라, 오랜 아스널팬으로서 대체로 혼자가 아닌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는 작가가 부럽기도 했다. 책 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을 일 없었을 책, 좀은 버거웠지만 마음의 접점에서 피어오르는 생각들이 적지 않았다.
닉 혼비•이나경(임지현: 특별부록) 옮김
2005.2.3.1판1쇄 2014.1.15.2판1쇄, (주)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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