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흑역사”라는 주제와 범주가 너무 방대하고, 특정 시대나 지역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 지구적 인류사 전체에서 장별 테마에 해당하는 사례들을 임의적으로 기술하는 식이어서, 그런대로 흥미롭기는 하지만 무척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인간이 바보짓을 반복하는 원인으로 든 것은 대체로 뇌 활동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데,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손쉬운 판단을 내리는 편법이라고 할 수 있는 '휴리스틱', 그와 관련된 '확증 편향', 이들이 누적되고 집적되어 일어나는 '집단 사고' 등의 인지적 편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복합적 작용으로 인간은 자만심과 탐욕에 기반해 미래에 대한 '소망적 사고'를 하고 '현실 회피' 또한 곁들여진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에 분별력을 잃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반복된다는 것. 그렇게 다 함께 망하는 사례가 도처에 비일비재한 '공유지의 비극'이며 기후위기로 대표될 수 있을 것 같다.
서양 백인 남성이 중심인 기술의 한계를 프롤로그에서 밝혔지만, 예로 든 사례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서구에 치우치지 않은 점이 좋았다. 농경이 인류가 위계와 탐욕에 눈뜨고 전쟁을 일삼으며 공멸을 향해가게 되었다는 관점은, 저자의 독보적 견해는 아니고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를 참조한 것이었지만 과문한 독자의 마음에 느낌표를 남겼다. 농경과 가축 사육을 통한 정착 생활을 인류가 문명을 일구기 시작하는 초석으로 교육받았고 계급 지배와 전쟁은 그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역사에서 당연한 듯 별개로 인식했던 점을 새삼 깨달았달까. 17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무스타파 등 황제들의 이야기는 영화 [3천 년의 기다림]을 떠오르게 했고 찾아보니 정말 그 에피소드가 맞아서 반가웠고,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배경에 흑사병 창궐과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육로가 막혔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것 역시 반가웠다. 물론 당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미지의 땅에 대한 인간의 모험심과 정복욕이 맞아 떨어진 것이겠지만 말이다.
언급했던 내용들을 같은 맥락과 선상에서 비교하며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인간의 특징을 강조하는 몇몇 부분은 억지스럽게 느껴졌고(216p 1998년 NASA의 화성기후궤도선 추락과 1492년 콜럼버스의 계산 실수 비교 등), 각 장의 말미에 덧붙인 '탑 랭킹'은 마주할 때마다 의아했다. 객관적 위상이나 공신력 있는(그런 게 있을 리도 없겠지만) 자료도 아닌 듯하고 그냥 저자가 임의로 정한 걸로 보이는 내용을 서너 줄의 정보로 가볍게 다루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특히 9장의 “과학 연구로 죽은 과학자 Top 6”은 이게 농담조로 언급할 이야기일까 싶어 읽으며 매우 불편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888년 시카고의 한 감리교 선교단체의 ‘순회형 헌금함’이 ‘행운의 편지’의 탄생이었다는(255p) 부분이었는데, 영국이 아니었다니, 진심 놀랐다. 나름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생학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프랜시스 골턴에 대한 일화들, 지금도 이어지는 메탄올 중독을 떠올리게 만든 유연휘발유 발명과 확산에 기여한 토머스 미즐리의 이야기,20세기 전후 많은 과학자와 발명가들이 자신들의 발명품(다이너마이트, 기관총, 자동발사기관총, 비행기, 무선통신 등)이 전쟁 종식에 기여할 거라고 믿었다는 사실 같은 부분이었다.
단편적 요약의 사례들이 새롭고 흥미로운 경우도 많았지만 그야말로 단편적이고 너무나 많은 사례가 등장해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책의 성격상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느꼈다. 그보다 더욱 불가피한 점은 크게 위트 있게 느껴지지도 않는 사견들, 에피소드 하나 나올 때마다 따라붙는 “여기서 우리가 건질 교훈은...”, 본문 서술 중 ( )로 부연한 실없는 농담 등으로 인한 몰입의 방해였다.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면 저자가 자신의 필력에 과도한 자신감을 가진 듯 느껴졌는데, 나름 참으며 읽다가 “미안하지만 이 장은 이 책에서 그리 재미난 부분이 아니다.”(162p)에서 실소와 함께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희한하게도 그 이후부터는 내용 집중에 방해가 되는 의미없는 유머와 ‘교훈질’이 확 줄어든 느낌이어서 혹시 번역자나 편집자도 비슷하게 느꼈던 걸까 싶기도 했다.
마지막 '감사의 글'에서 비욘세, 케이트 블란쳇에 데이비드 보위의 유령까지 언급한 걸 보면서, 썰렁한 유머의 내면화는 저자 자체였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강력한 독후감은 이런 류의 책이 계속 출간되고 뒤표지에 따르면 엄청난 화제와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점이었는데, 누구나 무언가를 깊이 알고 싶어하지는 않고 그야말로 너르고 얕은 지식이 선호되는 시류가 전 세계적이기 때문일까? 8월의 모임 책이어서 읽기는 했는데, 단편적으로 몰랐다 인상적이었다 식으로 언급하는 정도 말고는 나눌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인간의 흑역사'가 궁금한 이들을 위한 마중물 같은 책을 염두했다면 그렇구나 하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대부분의 사례들을 가십처럼 다뤄야 했을까 의아하기도 하다.
톰 필립스•홍한결 옮김
2019.10.10초판1쇄, (주)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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