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는 독보적인 것이므로, 이번을 7회차로 친다(놀고 있다.). 더 잘 놀라는 뜻인지 숙박대전 쿠폰이 나돌았고, 덕분에 40여 일만의 부산행은 2박 3일로 정했다. 일찌감치 숙소를 예약해놓고, 늘 그랬듯 영화 시간표가 뜨기를 기다렸다. [듄] 아이맥스 재개봉에 반색했으나 너무 짧기도 했고 서면은 12월 1일이라는 비보를 접했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개봉일부터 엄청 탐나는 뱃지 세트를 증정한다기에 속이 많이 쓰렸지만, 지방소도시 거주민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득함을 자찬하며 11월 3주차를 넘겼지만, 실은 아직도 아쉽고 아쉽다.
수도권에 비하면 아직 늦가을이지만 여기도 일교차가 커졌고 온수매트를 깐 잠자리는 한없이 아늑해 늦잠을 자곤 한다. 9시에 시작되는 김창완 아저씨 라디오의 오프닝이 나름 일상의 망가짐을 부축해줬는데, 요즘 며칠의 기상 시간은 심히 민망한 수준이 되었다. 몸이 좋지 않아 애드빌을 먹고 자는 일도 잦았는데, 반복되다 보니 새벽에 깼다가 다시 잠들었다가 늦게 일어나는 일이 많아졌다. 부산에 있는 이틀도 새벽 네 시를 넘어 겨우 잠들었는데, 사진으로는 번듯해보였던 숙소의 컨디션이 영 아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부산영화여행은 별 일 없는 일상에 의욕과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숙소를 예약하고 영화 시간표가 뜨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계획할 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즐거워지기도 한다. 24일, 다행히 9시 전에 일어나 빵을 챙겨 먹고 김창완 아저씨의 클로징을 들으며 집을 나섰다. 통영터미널에서 부산서부터미널까지는 1시간 20분 전후가 소요되니 먼 길은 아닌데, 터미널까지 또 극장까지 가는 길을 포함하면 3시간은 잡아야 하는 길이다. 별 것 아닌 것도 나도 모르게 머릿속 자동 시뮬레이션이 되는 스타일이라 현실에서 무언가 계획대로 되는 건 중요한데, 통영에 살면서 가장 불편한 건 버스 도착 시간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앱에는 대략의 도착 예정시간이 뜨지만 믿을 수 없고 버스정류장의 정보도 들쑥날쑥하다. 언제 버스가 올지 알 수 없는 막연함은 1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고, 버스 타고 어딘가 가기 위해 운을 바라며 집을 나설 때마다 통영에 잘못 온 걸까 싶은 마음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그래도 10분 정도만에 터미널 가는 버스가 왔다. 날짜를 맞추기 위해 좀 급하게 읽어낸 책들을 중고서점에서 팔고 첫 번째 영화 [어 굿 맨]을 보러 갔다. [아워 미드나잇]을 두고 갈등하다가 노에미 메를랑 믿고 선택했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못지 않게 영화 자체도 감동적이었다. 다음 영화까지 약간 텀이 있어 숙소 체크인을 하고 짐을 두고 나왔다. 오래된 모텔을 리모델링한 체인모텔이었는데 무려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이 붙은 객실이었지만 천정이 너무 낮고 퀴퀴한 느낌이 들어서 좀 그랬다. [나의 끝, 당신의 시작]과 [파워 오브 도그]를 연달아 보고 여운에 취해 돌아온 숙소에서 화장실 변기 청소가 전혀 안 된 걸 발견했는데 시간이 늦어 그냥 넘기려니 내내 신경이 쓰여 잠을 더 설친 것 같다.
다음 날 첫 영화는 [연애 빠진 로맨스], 예전에 우연히 중간부터 보게 된 [최고의 이혼]이라는 드라마의 손석구 배우도 이름만 들었던 전종서 배우도 궁금했는데 덕분에 발랄하고 솔직한 요즘 로코를 오랜만에 봤다. 범죄 액션 스릴러 일색이라 이따금 독립영화가 아니면 한국 영화를 잘 안 보게 되는데, 로코든 드라마든 잔잔한 장르의 영화들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다음엔 [듄]과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통영에서 [듄]을 흥미롭게 보고 나도 SF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기도 했고 실은 그냥 티모시 샬라메를 보는 것만도 재미있기 때문에 다시 보았는데, 날짜를 맞출 수 없는 아이맥스 상영이 새삼 아쉬워지긴 했다. 나중을 위해 짧은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지만 나의 감상은 언제나 기억이 휘발된 후의 나를 위한 줄거리 정리에 집중되기 때문에 미뤄지고 있다. [프렌치 디스패치] 역시 즐겁게는 보았는데 한 번으로 끝이라는 게 벌써 아쉽다.
마지막 날은 이른 기상에 성공하면 [송해 1927] 조조를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네시가 넘어 잠들었으므로 불가능했다. 일찍 잠들고 싶어서 애드빌을 먹고 불을 끄고 누웠지만 실패하고 무료 영화 목록을 살펴보다가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이야기]가 있어 플레이했는데, 디지털 리마스터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30분쯤 보다 말았다. 며칠 전 도서관 가는 길에 들은 팟캐스트에서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서 우연치고는 운명적이라고 반가워했지만 열악한 화질과 자막을 인내하기 어려웠고, 이틀 동안 여섯 편의 영화를 본 뒤여서 무리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하여 잔뜩 늦잠을 자고 회복된 컨디션으로 [뉴 오더]와 [행복의 속도]를 보았고, 마지막 영화가 잔잔한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무리해서 알라딘중고서점 경성대부경대역점에 들렀다. 사들인다고 바로 듣고 보고 읽는 것도 아니면서 cd와 dvd와 책을 자꾸 사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올해도 덜컥 럭키백을 사버렸고 해서 올해의 럭키백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그래도' 소장하고 싶은 것들을 이번까지만 사자고 마음먹었다. [내 사랑]을 비롯한 몇 개의 dvd와 좋아하는 책이지만 누군가에게 줘버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을 사들고 터미널로 향했다. 부산서부터미널에서 통영터미널의 배차 간격은 괜찮은 편이지만 저녁 7시 40분차 다음은 10시이므로, 조금 서둘러야 했고 버스도 전철도 앱에 뜨는 대로 딱딱 도착하는 대도시의 시스템 덕분에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나의 살던 소도시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다시 막연한 기다림을 동반했지만 다행히 20분을 넘기지는 않았다.
'사는게알리바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영화여행, 2022-01 (0) | 2022.01.15 |
---|---|
2021 마지막 부산영화여행 (0) | 2021.12.23 |
4박 5일, 부산 (0) | 2021.10.17 |
추석맞이 수도권-서울 여행 (0) | 2021.09.24 |
6th 부산영화여행, 조신한 대구 방문 (0) | 2021.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