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박대전 쿠폰 덕분에 올해 마지막 부산영화여행은 2박 3일로 계획하고 일찌감치 숙소를 예약했다. 마지막 주 수요일에 맞추려니 너무 연말이었고 날짜를 당기되 성탄 직전의 북적거림은 피하고 싶어서, 그리고 IBK기업은행알토스의 경기 일정이 18일과 23일이기 때문에, 12월 20일부터 22일까지로 결정하고 매우 흡족하였다. 아, 그런데 기다렸던 [드라이브 마이 카]가 23일에 개봉한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고, 예약을 변경하자니 쿠폰이 날아가게 생겨서 에라 모르겠다, 하루 더 늘렸다. 마침 이번에 볼 영화 중에는 러닝타임이 5시간 반인 [해피 아워]도 있었기 때문에, 2박 3일은 너무 빠듯하다는 마음의 소리를 매우 수렴한 결정이기도 했다.
부산행 11시 45분 버스를 타야 첫 번째 영화인 2시의 [돈 룩 업]을 안전하게 볼 수 있는데, 11시가 다 되어서 집을 나서게 됐다. 지도앱에서도 버스정류장 안내 스크린에서도 정확한 버스 도착 시간을 적절하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터미널 향하는 길에는 늘 약간의 불안과 초조가 동반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서 지도앱의 도착 예정시간은 39분이었지만 버스정류장 안내 스크린에는 아무 정보도 뜨지 않았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므로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니 몇 분 지나서 터미널행 버스가 왔다. 보통 버스로 30분 정도 걸리니 다행이다 싶었는데, 월요일 오전은 원래 그런 것인지 정류장마다 내리고 타는 승객들이 있었고 토성고개 사거리에서는 긴 신호에 걸렸다. 마음이 바빠지니 그때부터 계속 걸리는 신호들이 야속했고 사람이 없는 버스정류장에서도 서행과 잠시 멈춤을 잊지 않는 훌륭한 기사님께 속으로 '빨리 좀...' 자꾸만 텔레파시를 보내게 됐다. 고요한 버스 안에서 혼자 마음의 말을 줄곧 내뱉고 있자니, 마스크를 쓰고 조용히 앉은 다른 승객들도 나처럼 속으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졌고,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이 공간의 어떤 차원은 꽤 시끌시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터미널 버스정류장에 내린 게 42분, 다행히 출발 직전 부산행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고 기사님은 통로에서 티켓을 걷는 중이셨다. 내 자리에 어떤 아주머니가 앉아계셔서 멈칫하며 "자리 맞으세요?" 했더니 빈 자리에 앉으라는 식의 반응, "네?" 했더니 마침 곁에 있던 기사님도 마찬가지 말씀을 하셨다. 뒷쪽에 빈 자리가 있어서 거기에 앉기는 했는데, 마음은 납득이 되지 않아서 계속 생각이 났다. 다행히 좌석의 반쯤은 비어 있었고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모두 앉을 수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그렇다 쳐도 기사님은 정해진 자리에 앉도록 안내를 해야 맞는 것 같은데 이런 식이면 좌석제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별 일은 아니지만 이럴 때마다 정해진 것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 대한 가볍지 않은 스트레스와 함께 '질서'를 좋아하는 나를 새삼 느낀다. 어려서 '공중도덕'을 주입받은 세대인 데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고 타인과 피해를 주고받는 걸 싫어하는 나는, 이런 상황을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다. 어쨌든 예매한 첫 영화를 놓칠 일은 없어졌으니, 2021년 마지막 부산행의 액땜 삼기로 했다.
터미널에 내려 서면역으로, 알라딘중고서점에 가서 챙겨온 책을 팔고 cgv서면삼정타워로 가니 시간이 딱 맞았다. 통영에서도 [돈 룩 업]을 짧게 상영했지만 영화관에 갈 때마다 무례한 관객들 때문에 불쾌해졌던 경험이 강렬해 차라리 영화를 놓치자 했었는데, 다행히 부산에서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재밌게 읽고서 별과 하늘 이야기에 대한 마음의 문턱이 조금 낮아졌고, 같이 늙어가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귀여운 티모시 샬라메도 궁금했는데 영화가 무척 깔끔하고 재미있어서 시작이 상쾌했다. 2박 3일 예약한 숙소에 가서 짐을 풀고 한숨 돌린 후에 cgv서면에서 [피부를 판 남자]를 봤다. 이번 달 모임 책으로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었는데, 영화에 그 책과 닿는 부분들이 많아서 흥미롭기도 하고 정연하게는 어렵겠지만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가서는 넷플릭스를 살펴보다가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았다. 예전이지만 두세 번 봤고 좋아하는 영환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 또 새로웠다.
다음 날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던 [티탄]을 첫 영화로 보았다. 수상 이력과 '충격파'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이전 몇 편의 영화에서 보고 좋아하게 된 뱅상 랭동에 대한 믿음이 주효했다. 새벽 늦게까지 잠들지 못해 걱정했지만 다행히 잘 일어나서 무려 조조로 상영되는 영화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영화는 공식 러닝타임이 328분인 [해피 아워], 어렸을 때 동숭씨네마텍에서 심야에 본 [킹덤]이 내가 본 가장 긴 영화였는데 정확한 러닝타임은 기억나지 않는다. 10분의 인터미션 덕에 적절한 휴식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상영관이 리클라이너 좌석인 art2관이어서 몸도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껏 내가 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티탄]과 아마도 가장 긴 [해피 아워]를, 고작 10분 텀으로 보고 나니 몰입과 흡수의 낙차에서 오는 불균형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하여 컨디션 봐서 한 편 더 볼까 했던 생각은 지우고 숙소로 돌아가 쉬는 걸 택했다.
원래대로라면 마지막 날이었을 수요일에는 조금 부담없이 세 편을 보기로 했다. [끝없음에 관하여], [노트르담], [아멜리에]. 영화제가 아닌 부산영화여행에서는 여지없이 cgv서면 아트하우스 두 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 중 시간이 맞고 조금 더 당기는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데, 3일차에는 [해피아워] 덕분에 임권택관의 상영작을 줄줄이 보는 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러닝타임이 짧고 긴장도나 자극도도 낮은 영화들이었는데, 프랑스 영화 두 편은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굳이 찾아보지 않았을 것도 같다. 마지막 날의 숙소는 cgv서면을 오가면서 눈여겨보던 곳이었는데, 시설은 좀 노후했지만 극장에서 아주 가깝고 창밖 풍경이 보이는 드문 곳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전반적으로 깔끔했지만 암막스티커로 가려진 창문을 열면 바로 옆 건물 벽이어서 답답한 숙소에서 이틀을 묵었던 탓인지, 이제야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tv에서 무료 영화를 찾아보다가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발견, 러닝타임이 1분인 관계로 대여섯 번을 반복해서 보았다. 어느 때보다 영화에 많이 의지하며 지내고 있어서인지, 일종의 정보로만 알고 있던 1895년 12월 28일의 역사적 사건을 뒤늦게나마 경험하게 된 것에 약간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당시 영화를 본 사람들의 경이와 충격을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1895년의 뤼미에르 형제가 아니어도 누군가 영화를 처음 만들고 상영했겠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 신사동에 위치한 뤼미에르 극장에 가끔 갔었는데, 세 개관이 있었던 그곳에서 난생처음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경험을 했었다. 재수생이었던 나는 학원을 땡땡이치고 당시 많이 좋아했던 연극배우 이얼 님이 주인공인 [짧은 영화의 끝]을 보러 갔고, 매표소에서 권하는 [은밀한 유혹]과 [지중해]를 물리치고 꿋꿋이 티켓을 샀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극장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순간의 생경함, 영화가 시작된 후에도 닫히지 않는 출입문과 커튼을 내가 직접 닫고 쳤던 기억이 아직도 있다. 영화는 이얼 님이 나왔다는 것 외에 별 감흥을 주지 않았지만, 극장에서 오롯이 혼자의 처음 경험은 강렬했던 것 같다.
다음 날은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통영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으므로 영화 목록을 둘러봤는데 [스모크]가 있었다. 얼마 전, 곧 크리스마스네 생각하며 다시 보고 싶어진 영화였다. 비디오테이프는 가지고 있지만 십수 년 플레이하지 않은 데크가 제대로 작동할지 알 수 없고, 몇 년 전에 클리너를 사긴 했지만 귀찮아서 테스트를 미루고 미루는 중이다. 이번 성탄에는 클리너로 청소를 하고, 두 개 있는 비디오테이프로 테스트를 하고, 성공하면 [스모크]를 다시 보겠다는 생각을 며칠 전 의식의 흐름처럼 했었는데, 신기했다. 하비 케이틀의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모크]의 오기는 많이 좋아했고 깊은 주름이 잡히는 그의 미간도 좋아하기 때문에, 언젠가 그가 [라스트 갓 파더]에 출연했다는 소식이 오랫동안 의아함으로 남았고 여전히 그러하다. 그가 [라스트 갓 파더]에 출연하면 안 되는 것은 아니고 난 그 영화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참 오래도 의아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의아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그런 의아함 속에는 알지도 못하면서 심형래 감독을 무시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암튼 [스모크]를 플레이해 루비의 이야기까지 보고 잠들었다가 다음 날 오전에 나머지를 보았다. [스모크]의 백미 중 하나는 마지막에 흐르는 탐 웨이츠의 "Innocent when you dream"이기 때문에, 체크아웃과 영화 시작 시간을 고려해 그 부분까지 보느라 영화의 20%쯤은 1.2배속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스모크]는 기억 속 이미지보다 더 재미있어서, 집에 가서 비디오테이프 테스트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기대와 기다림 그리고 숙박비 써가며 하루 더 부산에 머무른 성의에 충분히 답을 해준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세 시간, 미동도 소리도 없이 함께 숨죽이며 몰입하는 객석의 공기까지 완벽해서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익명의 연대감이 새삼 감동적이었다. 하루키의 책은 두어 권 읽어봤을 뿐이고 영화의 원작이 수록되었다는 [여자 없는 남자들]은 낯설었지만 읽어보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알라딘중고서점 부산덕천점에 들러서 그간 장바구니에 담아놨던 cd와 dvd 들을 잔뜩 샀다. 앞으로 책은 가급적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로 했지만 올해 참지 못하고 지른 럭키백 포인트가 아까워서 한 짓인데 사실 한심한 감이 있다. 하지만 덕분에 내년부터 럭키백은 없다,로 시작해 알라딘 탈플래티넘은 물론 일반회원 되기라는 구체적 목표가 탄생했으니 나름 교훈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통영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영화의 여운을 곱씹으며 아무것도 듣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팟빵에서 찾은 [드라이브 마이 카] 낭독을 찾아 1/3쯤을 들었다. 시작 부분의 내용부터 낭독자들의 목소리나 분위기가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소설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영화는 상당히 많은 부분 각색이 된 것일 것 같고,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하다.
계획했던 대로 7시 전에 집에 도착해 IBK기업은행알토스의 배구 경기를 보았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졌잘싸, 세트스코어 2:3의 패배였는데 경쟁이든 승부든 자신들의 목표하는 최선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선수들을 보고 있자니 응원도 응원이지만 나는 뭘하고 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추석 이후 나는 통영에 산다기보다 집에서만 살고 있다. 영화가 아니면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데 통영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갈수록 난감한 일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다가는 집안 지박령이 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부산영화여행은 좋아하는 영화들을 몰아보는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약간은,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인가를 시험하는 시간이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무리없이 작동하고 있지만, 부산영화여행과 이외의 시간들에 대한 성실함과 책임감 같은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무턱대고 잡아두려는 강박과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잘 흡수하고 소화하고 기록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온전히 내게 달린 일인데, 쉽지는 않다. 배구 경기를 보고서 베란다에 나갔는데 심은 지 일주일도 안 된 대파가 나흘만에 엄청 자라 있었다. 부산 가기 전에 하얀 밑동에 물을 줬는데, 놀랍다. 파만큼을 바라지는 않지만 나 역시 조금씩 성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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