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처음 예매권 구매에 실패해 좀은 시무룩하게 올해 나의 영화제가 시작되었다. 떠나기 전날 시간표를 점검하다가 [사라진 소년병]의 GV 이후 [청춘(봄)]을 보러가는 시간이 애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예매할 때는 들뜬 마음에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영화의전당 8층 시네마테크 퇴장과 cgv까지의 이동 그리고 215분의 러닝타임을 생각하니 첫날부터 뭔가 꼬여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하여 왕빙 감독 영화 한 번 제대로 보겠다고 먹었던 큰맘을 접고 작은 마음으로 9일 저녁 시간표를 살펴보다가 GV가 있는 몽골 영화 [바람의 도시]를 예매했다. 취소수수료 1,000원이 아까웠지만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으쓱했는데, 취소하고 보니 9월에 예매한 거여서 맞춰놨던 카드 이용실적에 구멍이 났다. 무척 속이 쓰렸지만 온전히 내 탓이니, 액땜 삼기로.
4박 5일은 길다면 긴 시간이므로 오전에 나름 열심히 집 청소를 하고 재활용 쓰레기들을 챙겨 나왔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교통카드가 없어져서 식겁, 다시 집에 올라갔지만 아무데도 없고 비닐 재활용 쓰레기에 쓸려들어갔나 싶어 팔을 걷고 다시 내려왔는데 쓰레기장 앞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5분 내에 마무리된 해프닝이었고 카드를 잃어버린 게 아니니 됐다고 자위했는데 공휴일이라선지 터미널행 버스가 죽어라 안 오고, 택시의 유혹을 어렵사리 떨친 끝에 불안한 환승으로 겨우 시간 맞춰 통영터미널에 도착했다. 4박 5일 동안 얼마나 행복하려고 그러나? 두 번째 액땜.
사상터미널에 내려 3시부터 체크인 가능한 숙소로 이동, 예전부터 묵어보고 싶었던 부산도시공사 아르피나. 살펴본 후기대로 연식은 있지만 깔끔하게 관리되어 어제부터 이어진 경솔과 불길의 조짐을 떨칠 수 있었다만, 첫날 밤 가글을 하느라 욕실에서 고개를 젖혔을 때 돔형 천장 한가운데에 바디헤어 한 올이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개찝찝함을 느끼며 프런트에 연락을 할까 사진을 찍어둘까 갈등하다가 자정이 넘었고 일단 없애는 게 최선이란 생각에 휴지를 뜯어 변기에 올라가서 직접 제거, 메이드님이 청소하며 욕실 천장까지 확인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만족스러웠던 마음은 사라졌다. 다음 날을 위해 1시 조금 넘어 불을 끄고 누웠지만 간헐적으로 냉장고 웅웅거리는 소리, 위층 사람의 쾅쾅거리는 소리에 한참이나 뒤척였다. 새벽에는 너무 추워서 잠에서 깨어 온도 제어기 버튼을 눌러봤지만 객실 온도는 중앙관제 시스템인 듯 효과가 전혀 없었고, 7시 30분에는 청하지도 않은 모닝콜이 울려 DND 버튼을 누르고 남은 잠을 청해야 했다. 다음 날에도 모닝콜은 울렸고 세 번째 액땜은 불필요하므로, 그렇다. 좋은 숙소는 없다는 걸 깨닫는 걸로 타협. 큰맘을 먹을지라도 내가 감당 가능한 수준에서는 말이다.
아르피나에서 이틀을 묵고 그다음엔 처음 가보는 동네로 숙소를 옮겼다. 센텀시티/영화의 전당과 그나마 도보 이동 가능한 거리의 숙소는 숙박앱에서 광안리나 재송역으로 검색해야 나온다. 2년 전 25만 원쯤의 거금으로 4박을 했던 센텀프리미어호텔 등의 호텔들도 있지만 놀랍게 뛴 물가로 애초에 포기하고, 재송역 인근의 싼 모텔 2박을 미리 예약했다. 역시나, 싸고 좋은 숙소는 당연히 없다. 다행인 건 영화 관람 사이에 돌아가 쉴 수 있는 텀이 없는 시간표였고 밤 11시 넘어 들어가 푹 자고 나오는 게 주목적인 숙소였다는 것. 앞으로 다시 그쪽 숙소를 잡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산책 겸 극장까지 걸어가다가 영화의 전당 너머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며 처음 보는 영화 관련 조형물들을 발견했다. 2010년대 이후 다시 가게 된 영화제는 언제나 영화보기에만 빠졌다가 나오는 시간이어서 주변을 둘러보는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괜히 반가운 느낌. 영화 사이 시간을 보낼 때도 불가피하게 신세계 센텀시티 둘레길 걷기가 많았는데, 다음부터는 다른 쪽으로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년에도 올해도 개막식을 유튜브 중계로 집에서 보았는데, 무척 상반된 느낌이었다. [다이빙벨] 사태 등의 외압과 나는 알 수 없는 내홍 등을 거치며 어수선해 보였던 영화제가 팬데믹 이후 정상 운영을 맞으며 재도약의 활기를 발산하는 느낌이었던 작년 개막식 분위기를 기억한다. 강수연, 방준석, 장 뤽 고다르 등 세상을 뜬 영화인들을 추모하는 영상과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깊은 소회가 담긴 듯한 발언이 인상적이었고, 내 삶의 한편에 큰 자리를 차지한 영화와 영화제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 느껴지기도 했다. 간혹 인스타그램에서 지원 예산 삭감에 대한 성명서니 하는 걸 보긴 했고 예매를 하며 상영작과 상영 일정이 줄어든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영화제가 어떤 상황인지는 전혀 몰랐는데, 영화제 호스트를 소개하는 직함들 뒤에는 '대행'이 붙고 이용관은 부재했다. 궁금해서 찾아본 기사에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영화제 내부의 편가르기며 전횡에 대한 비판, 외부의 색깔론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렇구나, 그런가? 모르는 일에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지만 어쩐지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영화제에서 열한 편의 영화를 보았고 폐막식인 금요일에는 cgv서면에서 나만의 폐막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보고 돌아왔다. 영화가 시작될 때마다 상영되는 작년과 같은 트레일러가 영화제의 현재를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대체로 스폰 운영 스모킹 컨테이너가 놓였던 자리는 부산시가 사활을 걸고 있는 2030 엑스포 조형물이 차지하고 있었다. [북두칠성]이라는 영화를 보러 들어가고 나오는 길에 정성일 영화평론가를 목격해 괜히 반가웠고 서울에서 영화를 보고 그의 열정적인 gv를 들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잠시 돌아봤지만 손 가는 게 하나도 없었던 굿즈샵 컨테이너에는 "Theater is not dead"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 있었다. 바람일까 발악일까, 28회를 맞은 영화제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재작년의 [6번 칸]이나 작년의 [죽은 친구를 구하는 법]처럼 사로잡히듯 좋은 영화는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부고를 마음에 담고 다시 본 [서칭 포 슈가맨]의 인상이 앞선 4일간 본 영화의 여운과 잔상을 압도하는 느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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