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2. 9. 12. 11:22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즈넉한 시골 동네를 배경으로 교복을 입은 여고생 하나와 남고생 둘이 어울려 놀고 있다. 가게에서 산 쌍쌍바의 쭈쭈바 버전 아이스바를 사이 좋게 나누자 여자 아이의 손에는 두 개의 아이스바가 놓인다. 어떤 감정으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는 세 사람의 평화롭고 풋풋한 한때는 아련한 과거다. 어른이 된 나츠미와 아츠히사, 타케다는 여전히 함께지만 그들을 둘러싼 밀도와 온도는 달라졌다. 아츠히사와 결혼한 나츠미는 다섯 살짜리 딸 스즈를 키우는 전업주부, 아츠히사와 타게다는 각자의 일을 하며 함께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면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부부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세 사람, 아츠히사는 어딘가 무심해보이고 나츠미의 수다 상대는 타케다다.

 

감정 표현도 말수도 없는 아츠히사는 타케다와 함께 배우는 서툰 외국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때 그나마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딸 스즈와 놀아줄 때도 다정한 말보다 침묵의 그림자 놀이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츠히사의 방식이다. 사치코와 교제하며 약혼한 사이였던 아츠히사는 어떤 계기로 나츠미와 관계를 맺었고 임신으로 인해 두 사람은 결혼했다. 표정 없는 얼굴과 꾹 닫은 입술이 한결같은 아츠히사와 달리 나츠미에게는 어린 시절의 밝은 기운과 활력이 느껴지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는 집안의 공기는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다. 그의 부모도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형도 말수가 없고 속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 오랜만에 만난 가족은 어색하리만큼 조용하고 와중에 시어머니는 나츠미를 달가와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다.

 

어느 날 몸이 안 좋아 회사에서 조퇴한 아츠히사는 집으로 돌아와, 낯선 남자와 섹스 중인 나츠미를 발견한다. 순간의 충격으로 몸의 균형을 잃은 아츠히사에 의해 미닫이 방문의 유리창 하나가 부서지고, 조마조마하게 유지되던 두 사람의 관계도 부서진다. 미닫이 방문에 끼워진 반투명유리처럼 두 사람 사이를 채우던 뿌연 감정의 일부가 파멸적인 방식으로 사라졌다. 아츠히사로 인해 외로웠고 이따금 아츠히사의 전 약혼녀 사치코를 떠올리며 괴롭기도 했던 나츠미는 결별을 선언한다. 혼자가 된 나츠미는 타케다를 찾아가 고독하고 버거웠던 결혼 생활을 털어놓고 어렸을 적의 마음을 끄집어내지만, 우정이 소중한 타케다에게는 이미 지난 일일 뿐이다.

 

함께 살던 집에서 나온 아츠히사는 혼자가 되었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타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음악을 하며 미래를 꿈꿨던 타케다만이 여전히 그의 곁에 있다. 함께 술을 마시고 그의 집에서 잠을 청하다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 오버스러운 뮤지션의 메시지에 혹해 공연에도 가면서, 아츠히사는 하루아침에 아내와 딸을 잃은 상실감을 떨쳐보려 애쓴다. 고향의 부모님댁에 홀로 찾아가 뒤늦게 이혼 사실을 전하는 아츠히사도 받아들이는 가족들도 무덤덤할 뿐 별 반응이 없다.

 

나츠미는 불륜 상대였던 남성과 동거를 시작했다.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놀고먹는 그는 나츠미에게 또 다른 삶의 무게를 더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 나츠미의 고단함에 사채빚 연대보증이며 콜컬 제안 같은 낯설고 위험한 세계의 일들을 보탠다. 충동적인 사랑과 임신 때문에 결혼한 아츠히사에게서 느꼈던 감정적 갈증과 사무치는 고독은 차라리 우아한 권태였을지 모른다. 스스로의 선택과 스즈를 책임지고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나츠미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인내를 발휘한다.

 

돌이킬 수 없는 파탄과 전락에 예기치 못한 전기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츠히사의 형 히데다. 지박령처럼 고향집에 붙박혀 즉석라면과 맥주와 함께 등장하고 아츠히사에게 뜻모를 미소와 엄지척을 날리곤 했던 그가 흰 옷을 차려입고 길을 나섰고, 아츠히사와 나츠미가 살던 집 앞에 도착해 마침 음료수를 사러 나온 동거남을 미행한 끝에 돌로 수차례 쳐서 죽인다. 수감된 히데를 면회한 아츠히사와 부모님은 허름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어색한 가족사진을 찍고, 주변 공원을 산책하던 중 멀리 보이는 감옥 건물을 배경으로 다시 한 번 가족사진을 남긴다.

 

동거남의 죽음은 나츠미에게 해방이 아니라 더 깊은 질곡이다. 멋모르고 연대보증한 사채빚을 요구하며 조폭들이 집을 찾아오고 나츠미는 살아생전 고인이 건넸던 불량스러운 제언을 기억해낸 것 같다. 스즈를 엄마에게 맡기고 대도시로 떠난 나츠미는 콜걸이 된다. 성매수자에 의해 다치고 죽는 콜걸의 비극적인 뉴스를 이따금 접했지만 또 한 번의 피할 수 없는 선택, 그리고 뉴스 속의 주인공들처럼 나츠미도 목숨을 잃는다. 슬픔에 잠긴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치르는 장례에 타케다와 함께 찾아간 아츠히사는 전 장모의 분노와 원망을 살 뿐이다. 로비로 물러나 자리를 지키는 아츠히사, 유리창을 통과한 햇살에 문 밖으로 나온 스즈가 아빠와의 그림자 놀이를 기억하며 다가오지만 곧 외할머니의 제지로 돌려세워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운전하는 타케다와 조수석에 앉은 아츠히사를 실은 차가 어느 동네의 골목길로 들어선다. 긴장한 듯 상기된 표정으로 골목을 살피는 아츠히사의 눈에, 코너에 자리한 집 마당에서 놀고 있는 스즈가 포착된다. 스즈를 발견한 타케다가 차를 세우고 천천히 후진하며 아츠히사를 독려하지만 그는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한다. 마음에 가득한 감정들을 좀처럼 꺼내지 못한 채 담아두고만 살아가던 아츠히사와 그런 친구의 곁을 지키며 격려하는 타케다, 둘은 결국 한계에 이른 듯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대폭발시키고 만다. 마침내 차문을 열고 골목길로 나선 아츠히사, 눈물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스즈에게 다가가는 그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청춘기를 함께 보낸 세 사람 사이를 오갔을 감정선이나 전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언뜻 무구해보이지만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도 같은 인트로 뒤에 이어지는 것은 여전히 청춘이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현재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어 속엣말을 전혀 꺼내지 못하는 아츠히사, 그런 아츠히사를 잠시 사랑했지만 곧 숨막히는 외로움에 잠식된 결혼 생활에 지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나츠미, 그들 곁에 조용히 함께하며 자신의 사랑을 접어두고 우정을 택한 타케다. 한 시절의 파탄과 소멸을 조용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이상한 설득력을 갖춘 이상한 캐릭터들의 힘으로 전개되는 느낌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고통을 내보이는 데에 급급한 세상에서 조금은 이채롭게 느껴졌던 아츠히사는 원인을 제공하는 대신 더 깊은 고통을 떠안아야 하는 이기적이고도 슬픈 존재였다. 어릴 적 타케다에 대한 마음을 접고, 아츠히사와 사랑하고 결혼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아픈 선택의 연속 끝에 세상을 떠나는 나츠미는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까웠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가장 의문스러운 존재였던 히데는 박정범이 연기한 덕에 더욱 놀랍고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그의 수감 이후 전에 없는 아츠히사 가족의 가족스러운 행태가 어딘가 불안을 야기하던 존재가 마침내 일을 친 후의 안도감인지, 사라진 후에야 느끼는 소중함을 담은 것인지, 둘 다인지 애매하고도 우스꽝스럽고도 짠하게 느껴졌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딱히 좋지도 않았고 그럼에도 희한하게 여러 장면들이 마음에 남아 복선이나 암시가 없었던 어떤 사연들을 상상하게 되는 영화이기도 했다. 아츠히사와 타케다의 우정은 실은 우정 이상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나츠미가 사랑하는 사람은 불륜의 상대가 아니라 타케다였겠지? 약혼녀 사치코의 불임 고백은 아츠히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튀는 느낌인데도 씬으로 삽입된 이유가 뭘까 뭐 그런 것들. 생각해보면 잔잔한 분위기에 비해 상당히 많은 사건들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었는데, 일본판 포스터를 크게 장식한 엔딩시퀀스의 대폭발이 결국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였을까도 궁금하다. 나는 이전 감정들과의 진폭이 너무 큰 그 장면이 많이 민망하여 거리감이 느껴졌는데... 인간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말하는 존재, 말하지 못한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감독은 강조하고 싶었을까.


9/10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 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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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