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님의 새 책이 나왔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겨레21'에 연재했던 인터뷰글 모음집이란다. 이 역시 '하종강의 노동과 꿈'에 가면 대부분 다 볼 수 있지만,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글들을 책장 넘기며 읽는 맛은 또다른 것이다. 꽤 두툼한 책을 받아들고, 이 많은 사람들의 겹겹이 주름진 삶을 삽시에 읽어내려가려면 꽤 숨이 가쁘겠다 싶기도 했는데 너무 쉽게 책장을 넘긴다는 미안함 약간을 빼고는 읽는 내내 역시나 감동스럽고 행복했다. 연재 시기가 몇 년 전이다보니 읽으면서 지금은 어찌 살까 궁금해진 사람들의 근황까지 짤막한 후기로 덧붙인 저자의 정성도 고맙다.
저자가 정한 '비교적 간단'한 기준 덕분에, 인터뷰 주인공 중에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 기준이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우리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지 않는 사람, 운동권 내에서조차 중심에 우뚝 서 있지 않은 사람, 투쟁 대열의 끄트머리쯤에 겨우 참여했다가 전투경찰에 쫓겨 골목에 숨어 두려워 떨었던 사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화려한 조명을 받을 일도 없지만 진정한 우리 사회의 주역인 사람...... 이다.
오랜 세월 동안 노동 상담과 교육 활동을 해 온 저자의 이력 탓인지, 인터뷰이들 중 다수가 저자와 인연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인 듯 했다. 게다가 저자는 특유의 섬세함이랄까 속 깊은 정으로 오래 전 스쳐간 인연의 자락을 기억하고 끄집어내어 인터뷰를 핑계 삼아 다시 만난 그들의 현재와 과거를 찬찬히 적어내린다. 지극히 평범하거나 혹은 지극히 외곬이거나 한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모두들 참으로 쉽지 않은 선택을 자신의 길이라 여기며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각별한 심정을 나누며 살아가려면 얼마나 바쁘고 정신이 없을까, 뭐 이런 시덥잖은 생각이 곁가지를 치다가... 문득, 산만하고 정리되지 않는 인간 관계를 짐으로 여기며 일정 기간의 만남이 없으면 지레 마음에서 접어버리곤 하는 내 행태에 생각이 미쳤다. 수많은 싸이 일촌과 네이트온 친구 리스트를 자랑처럼 여기는 시끌벅쩍한 세상 한 쪽에 대한 조용한 반발치고는, 나는 너무나 무책임하게 인연의 끈을 거둬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늘 만나고 안부를 주고 받는 것 이상으로,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반갑게 마주치거나 안부를 전해듣는 것이 또한 사람살이의 별미이고 소중한 기쁨일텐데 말이다.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한시적으로 무척 가난하다는 이유로 언제부턴가 주변을 단속하고 사람 만나는 일 자체를 부담으로만 미뤄두며 살고 있는 내 모습이, 실은 꽤나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쉽게 마음 주지 않으며 문을 꼭 닫아둔 채 상처 받지 않으려 혼자 있기를 고집하는 내 모습이 괜스레 안스럽기도 했다.
아무려나, 자리를 지키며 살다가 저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은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거절을 거듭하다가 마지못해 응해서는, 남다를 것 하나 없이 그저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라고 담담히 말한다. 그런 그들의 평범하되 굴곡지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모두 옮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아직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반복하는 저자의 마음이 애틋하다. 제각기 가는 길도 사는 모양새도 다르지만,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겸허하고 그런 그들에 대한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는 저자의 따스하고 정겨운 마음이 행간에 오롯이 묻어난다.
솔직히 말하면, 읽다가 반한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상형의 모습으로 출몰해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속으로 멋지다! 를 연발하다보면, 그예 이어지는 것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사랑하는 가족들 이야기. 아무렴 이렇게나 멋잇는 사람이 설마 짝이 없겠냐 싶어 괜히 김이 빠지기도 했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반문하며 우습기도 했다가. 나도 모르게 삼천포로 빠지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왔을까도 잠시 돌아보다가...
물론 길고 긴 삶의 한 과정을 뚝 떼어내고 짧은 시간의 인터뷰로 정리한 글에서 일상사의 잔주름들까지,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진 고유한 개성과 고약한(?) 습성까지 모두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불가피한 축약과 강조 속에는 분명, 의도되지 않은 미화와 피워올리고 싶은 감동도 함께 반죽되었을 터이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것은, 인생사건 무엇이건 정점의 순간 불타오르는 희열과 흥분이 거두어진 후 남겨진 평시의 비루함을 견디는 일일테니 말이다.
실은 얼마 전부터, 너무 이런(?) 이야기들에 골몰하면서 치열한 삶의 의지를 다지기보다는 오히려 어줍잖은 선망과 헛꿈의 지수만 높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자기 검열이 없지 않다. 처방전도 없이 사들인 약을 땡기는 대로 먹어가며, 정작 필요한 운동은 내팽개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흙탕물 위에 띄워놓은 튜브 위에 앉아 물이라도 튈까 근심어린 얼굴로 오염된 물을 굽어보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 대 인간이라는 혹은 인간 자체라는 복잡하고도 오묘한 존재와 관계에 대한 부담스러운 고민을 돌파하는 일은, 골몰하는 생각이 아니라 만나고 부대끼는 체험으로나 가능한 것일 터. 내 경우라면 분명 복합적으로 생동하는 인간을 대상으로 쉽게 열광하고 쉽게 지겨워하는 버릇에 대한 각성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 못지 않게, 지난한 인내와 의식적인 이해의 노력이 또한 더해져야 할 것이고. 어쨌건 실천적 노력 없이 그저 주워섬기듯 읽으며 감동 받고 잊어버리는 반복이 되지는 않아야겠다는 새삼스런 다짐.
사실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도 최소한 '단면'이나마 아름다운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단지 근접했을 때 느끼게 될 어떤 적나라한 동질성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내 이기심이 자꾸만 멀리로만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일 뿐. 여전히 모든 인간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인간도매금론에는 동의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그러나...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건 오랜 시간 한결 같고 또한 더불어 살아가려는 진심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환장하는 어떤 지점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훌륭하고 가치있는 것이라는 당연한 교훈을 확인한다. 지나치게 제도를 저주하는 나의 습성이 혹 어떤 열등감과 불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고백과 더불어.
길게 주절거렸지만, 매우 개인적으로 뻗어나간 다단한 감상을 제외하면...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본의 아닌 냉소를 날리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착한 마음과 열심히 살아낼 용기를 듬뿍 선사하는 '아름다운' 책이다. 우후죽순 쏟아지는 자기계발서들과 비교할 바는 물론 아니지만, 혹여나 이런 좋은 책이 내게 와서 독이 되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좀 까칠한 감상이 되어버렸네. 무던하고 눈물 나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보니 딴에는 지병인 감동 중독에의 매몰을 경계한답시고 그렇게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하종강 님의 쾌유를 진심으로 바란다.
2007-07-18 02:44,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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