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3:15


감옥 자체가 갖는 반인권성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박노자의 책에 등장하는 여느 집 거실과 같은 북유럽의 감옥에도 수인의 자유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어떤 감옥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군사독재 치하 비전향수들의 수감 생활이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반인권적이었을까 하는 점은 상상이 어렵지 않다. 
 

1945년 재일교포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난 저자는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뒤 조국을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한국 유학을 선택한다. 유학 후 강사 임용이 예정되어 있던 그는 고향에서 방학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1971년 '재일교포 학생학원침투 간첩단사건'에 연루된다. 불안정한 시국을 조작사건으로 타개하려는 정권에 의해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하는 간첩으로 둔갑된 그는 보안사에서 고문을 받던 중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저항 자체가 무력화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결심하고 분신한다. 얼굴과 몸에 큰 화상을 입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년 동안 비전향정치범으로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19년의 옥중 생활을 기록한 이 책은 제목만큼 담담하고 절제된 문체로 기록되어 있으며, 자전적 경험보다는 비전향 정치범으로서 겪은 감옥 사회의 실태와 그 속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오랫동안 가려져왔거나 무관심 속에 놓여있었던 현대사의 또 다른 그늘을 보여준다.
 

총 5장으로 구성된 내용은 1장(보안사 - 옥중생활의 시작)에서 간첩조작 사건에의 연루와 고문, 분신 그리고 재판과 수감 과정을, 2장(죄수의 나날 - 70년대 대구교도소)에서 은폐되어 있던 비전향 정치범의 열악한 수감 실태와 70년대의 감옥 생활을, 3부(사상전향제도와 투쟁)에서 인권 침해적 요소가 다분한 사상전향제도의 실상과 비전향 정치범들의 투쟁을, 4부(어머니 - 80년대 대구교도소)에서 저자가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부모님의 죽음과 80년대 감옥 생활을, 5부(재회 - 80년대 대전중구금교도소)에서는 전두환 집권 이후 비전향 정치범 집중 관리 및 '행형의 현대화와 효율화'를 명분으로 새로 지어진 대전중구금교도소에서의 감옥 생활과 1990년 2월 출감까지를 담고 있다.
 

저자가 특히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부분이 사상전향제도의 문제이다. 기본적 인권을 박탈당한 수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사상전향제도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반하는 반인도적인 탄압이다. 옥중에 있는 19년 동안 꾸준히 이어졌던 사상전향의 공작은, 민주화되는 사회의 분위기와 함께 방식의 변화를 꾀하며 지속되었다. 사상전향인가 죽음인가, 라는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 끊임없이 수인들을 몰아넣으며 진행된 사상전향 공작은 국가보안법ㆍ반공법ㆍ보안관찰법ㆍ사회안전법이라는 이름으로 계승되고 재생된 반인권적 악법들에 근거하여 체제유지를 위한 핵심적인 기제로 활용되었다.
 

사상전향의 관철을 위해 공권력은 밥을 줄이고 가족들을 동원하고 백색테러를 자행하는 등의 다양한 수법을 구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십 년간 신념을 지킨 비전향수가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약속에 전향을 하고, 전향해 달라고 울며 매달리던 가족이 빈곤과 사회적 박해로 자살을 하고, 병이 난 비전향수에게 전향을 하면 치료를 해준다고 위협하는 비인도적인 상황이 벌어졌으며 심지어 죽은 비전향수의 손에 도장을 찍어 전향의 전과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가공할 만한 인권 탄압이다. 인간의 영혼을 완력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난폭한 발상의 이 제도가 종이 한 장으로 확인하고자 한 것은 어쩌면 사상의 전향만이 아닌 기득권이 인정할 수 없는 인간 권리의 포기였을지도 모른다. 
 

비전향 정치범으로 그들과 함께 옥중 생활을 하며 관찰자의 입장에서 저자가 남긴 기록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강철 같은 혁명가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빨갱이가 아닌, 격동의 시대를 거쳐 온 우리 사회의 비극을 온 몸으로 떠안은 그들의 갇힌 삶을 생생히 복원해 보여준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사상과 이념이 무엇이었건 간에, 죽음 앞에서도 지키려 했던 신념이 곧 인권에의 의지였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감상과 개인적 소회가 지극히 절제된 이 책에는, 저자가 감옥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 대다수는 독재 권력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았거나 민주화 운동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거나 지금도 공적인 공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많은 인물들이지만, 더불어 저자는 '인간도처유청산'이라는 소제목을 빌어 일반 수형자와 봉사원, 지도, 간수, 전향 공작관 중에서도 '인간'을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가난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피 직업을 선택하게 된 간수들, 산업화에서 소외되고 궁여지책으로 교정직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전라도 출신 교도관들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인식은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 사이의 적대의식을 조장하는 감옥 속에서도 제복 속에 가려진 인간을 보려했던 저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저자는 자신을 비롯한 비전향 정치범 석방의 공을 유신독재에 맞선 저항으로부터 87년 민주화항쟁을 일궈낸 민중들의 치열한 투쟁에 돌리고 있는데, 이와 함께 '서형제 구원운동' 등을 통해 7-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지지를 보냈던 일본의 시민운동 세력과 양심수 석방을 종용하며 국제 여론을 환기했던 '국제사면위원회' 활동 등이 보편 인권의 가치를 기반으로 한 운동세력 간의 광범한 연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NGO의 시대라 할 만큼 활발한 연대와 교류가 이루어지는 오늘 날과 같은 상황은 이러한 작은 시도들로부터 비롯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회의' 주도 등 제국주의와 국가 테러리즘을 넘어서기 위한 저자의 연구 역시 자신의 옥중 경험이 체험적 자산이 된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다방면의 관찰을 통해 묘사하듯 감옥 생활을 그려 보이는 이 글은 문익환 목사님이나 신영복 선생님 혹은 또 다른 이들의 기록에 등장하는 감옥과 많이 다른 느낌이다. 무기수가 된 후 정치범 특사의 실정을 알아가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고생하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감옥살이를 바치기로 결심했다던 저자는 출감의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부여된 이러한 기록의 소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담담하고도 신랄하게 비전향 정치범들이 처한 극한의 상황을 문자로 재구성한 저자는 독방에 홀로 앉아서도 날마다 억압의 공간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고 했다. 불가항력을 인정하지 않는 삶의 행로와 객관을 잃지 않은 기록의 행간에서도 여실히 느껴지는 뜨거운 민족애와 인간애는,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이 절제된 열정으로 거듭난 것이 아닐까 싶다. 
 

1995년 일본에서 먼저 출간된 후 1999년에 한국판을 내며 저자는 한국에서의 출간이 때늦은 감이 있다고 말한다. 1990년대 급속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과 더불어 군부정권이 물러가고 문민-국민의 정부로 이어진 한국 정치사는, 청산주의와 형식주의에 의거해 졸속하게 과거를 정당화한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많은 수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석방되고 송환되면서 마치 이제 감옥에는 '진짜 범법자'들만 남은 것 같은 사회적 착시현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 뒷전이 된 경향이 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은 이념과 사상의 견고한 벽이 무너진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억압의 시대는 가고 누구에게나 보편 인권이 보장되는 시대라고 여기고 있는 바로 지금 더욱 많이 읽히고 성찰되어야 할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핵심을 비껴가는 지적일지 모르나, 이 책이 담고 있는 역사적 진실과 소중한 문제의식 그리고 문헌적 가치에 비해 너무나 조용히 묻혀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저자의 형제들의 책들이 출간될 때마다 출판계에서 받는 주목과 독자들의 반향 그리고 대체로 스테디셀러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이 묻혀버린 이유 중 하나가 (적당하지만) 너무나 평이하여 눈길을 끌지 못하는 제목 때문은 아닐까 싶어 안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2006-03-21 02:35, 알라딘



서승의옥중19년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서승 (역사비평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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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