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건, 그리고 그 앎과 모름 사이에 아주 작은 감정이라도 매개되어있다면 적어도 내게 그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 내가 만나거나 알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지만, 그들 모두는 내가 일찌감치 단정지어 버린 무언가를 흔들어주고 닫아버린 문을 열어 새로운 풍경을 눈 앞에 펼쳐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심한 채근이 조금은 마음에 걸렸던 어느 날, 새 생활에 보내는 축복의 전언처럼 내게 온 책. 발간 직후 여러 사람들의 아낌을 받았던 이 책을 나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속이 좁고 편견이 많았던 예전의 나는, 한때 자기 정체성의 일부인 양 이 책을 트레이드 마크 삼았던 과히 좋아하지 않았던 한 사람 덕분에 책에까지 덩달아 의심스런 눈길을 보냈었다. 당시 우연히 저자가 출연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꼈었고 너무 친절하게 붙여진 제목이 불편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일면이라도 알고 있다는 것이, 오랜 편견을 바꾸는 데에는 적잖은 힘으로 작용하는 법. 책을 보내온 이에 대한 일종의 믿음과 마침 내 속의 오랜 편견을 한참 돌아보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함께 책장을 펼쳐주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오랜 편견과 선입견이 결국 내가 가진 모순들에 대한 양가감정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과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래서 하염없이 마음이 가다가도 문득 그 마음의 위험함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밖에서 나를 비추어주는 존재. 친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친근함과 불편함을 동반하는 솔직함이 세월이 갈수록 깊은 우정을 만들어주는 것도 그런 이유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온전히 같은 둘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캘커타의 프렘단과 칼리가트에서 저자가 만난 각국의 친구들 이야기는, 아주 새롭거나 특별하지는 않았다. '한 자유주의자의 춤'이 떠올랐다는 책날개 추천글의 한 구절이 내내 공감과 함께 머리를 맴돌았는데, 나 역시 이 책의 주인공은 정답게 소개해준 친구들보다는 저자라고 생각된 탓인 것 같다. 읽으면서는 사실 한달 쯤 전 17주기를 맞은 이르게 떠난 시인의 이야기에 괜히 마음이 삐죽거리고 만나는 모든 이와 친구가 되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저자의 무용담(?)에 내심 시비스런 마음이 일기도 했다. 뭐야 겨우 이거야, 이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뀌나, 하는 정말 심퉁스런 마음이 한 구석에서 내내 툴툴거리는 것만 같았고 그 와중에 역시 나는 안된다니까 하는 꼬인 심사도 없지 않았다.
책장을 펼친 곳이 주리를 트는 듯 괴로운 미용실이었던 탓에, 그렇게 불만스럽게 한 번을 읽고서 다시 한 번 되짚어 읽어내려갔다. 그래 뭐 친구들은 이제 대충 알겠고, 다시 보면 새로운 게 보이지 않을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의 가벼움과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신이 나면 웃고 춤추고, 슬프면 실컷 울고, 미우면 미워하고, 그야말로 마음 가는 대로 그가 구가하는 삶이 많이 부러웠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바로 그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진심 어린 자리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그러면서도 더불어 살아가려고만 한다면 그만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정작 나는 가만히 앉아 머리나 굴리고 마음이나 재고 있는 주제에, 나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웃기지도 않은 잣대를 들이대고 판단하며 세상과 나를 온통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생각. 결국 각자의 답은 각자의 삶 속에서 찾는 것인데, 나는 어쩌면 그리도 어리석었는지 말이다.
책을 읽은 후 한참 동안 최성원의 '색깔'을 흥얼거렸다. 어차피 갖다 붙이기 마련이지만, 또 진실이라고 생각하면 오로지 그것만이 진실인 것만 같은 게 사람 마음이지만. 한편 진실은 무지개 같은 어릴 적 마음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적어도 수많은 색깔들을 놔두고 늘 빨간색 쪽으로만 기웃거리고, 실은 회색 쯤에서 멎어버렸던 나에게는 말이다. 남의 색을 볼 수 없는 색맹이 되지 않으려, 자기색을 보호색 삼지 않으려 애쓰면서 살 수만 있다면... 여러가지 색깔로 가득한 세상이 조금은 더 예뻐보이지 않을까.
초록색깔이 나는 좋아 파란색깔 있기에 주홍색깔이 나는 좋아 빨간색깔 있기에 이 세상 모든 색 한 색깔이면 오 그건 너무 너무해 파랑 빨강 모두 다 필요없잖아 오 그럴 수는 없잖아 슬픔이 여기 있었기에 기쁨 또한 여기에 이별이 여기 있었기에 만남 또한 여기에 그 색깔로만 칠하자고 자꾸 너는 우기고 이 색깔만이 좋다고 자꾸 나도 우기네 도화지 하나에 한 색깔이면 오 그건 너무 너무해 그러면 도화질 찢어버릴까 오 그럴수는 없잖아 미움이 여기 있었기에 사랑 또한 여기에 웃음이 여기 있었기에 만남 또한 여기에빨주노초파남보 우린 모두 무지개 빨주노초파남보 우린 모두 무지개 색깔, 최성원
2006-04-04 03:36,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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